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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thorn
여름이라는 이름의 계절이 나부낍니다.
2023-01-19
KPC. 성유찬 · PC. 최치승

철제 창문 바깥에 드리워진 하늘이 물처럼 일렁입니다.
그 아래에 놓인 흙바닥 운동장에서는 다른 학생들이 축구라도 하며 노닐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은 분명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공간이 분리라도 된 듯 수업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과 성유찬, 세상에 둘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청량한 하늘, 제 몸 아래로 쏟아지는 땀, 숨을 쉬면 들어차는 축축한 향.

여름이라는 이름의 계절이 나부낍니다.

 
 
 
 
 
 
 
 
 
 
눈을 뜹니다.
 
역광으로 비치는 당신의 모습 왼편에
 
푸른 하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숨을 들이쉬면,
 
당신의 뺨 옆으로 땀이 한 줄기 떨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벽에 붙어있는 선풍기는 고장 나기 직전인지라,
 
잘 맞물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돌아갑니다.
 
수업을 듣고 있었군요.
 
새하얀 셔츠 바깥으로 튀어나온 당신의 두 팔이
 
책상 위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것이 느껴집니다.
 
감각은 이윽고 선명해집니다.
 
하얀 종이 뭉치 하나가 어깨에 맞고 튕겨
 
결국 바닥으로 곤두박질칩니다.
 
종이가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을 때,
 
익숙한 인영이 의자에 기대어 당신을 바라봅니다.
 
최치승: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4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시선을 조금 내리면,
 
명찰에 이름 석 자가 정갈히 새겨져 있습니다.
 
'성유찬'
 
당신은 그와 잘 아는 사이인가요?
 
말간 낯으로 흰 교복 셔츠를 입고 있는 그는,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킵니다.
 
철제 창문 바깥에 드리워진 하늘이 물처럼 일렁입니다.
 
그 아래에 놓인 흙바닥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축구라도 하며 노닐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은 분명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공간이 분리라도 된 듯 수업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두 사람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청량한 하늘,
 
제 몸 아래로 쏟아지는 땀,
 
숨을 쉬면 들어차는 축축한 향.
 
여름이라는 이름의 계절이 나부낍니다.
 
 
수업 종이 울리자 모두가 일제히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립니다.
 
성유찬:(옆에서 멀거니 쳐다봄) ...뭐 해, 수업 끝났어. 안 나가?
 
최치승:... (매미소리 때문인지, 더위 때문인지. 수업시간에 통 집중을 못 하고 딴생각만 줄창 한듯 멍하니 있다가) 아니, 근데 형은 왜 여기 있어요?
 
성유찬:(물어볼 줄 알았다...) 오늘은 좀... 뭐 확인해 볼 게 있었거든. (천장에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에 잠시 눈길을 준다. 고작 이런 선풍기로 더위를 날 수 있나? 그럭저럭 잘 버티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덥냐?
 
최치승:(뭐야... 선생님은 뭐라 안 그러시나. 아직 반애들 얼굴을 못 외우신 건 아니겠지. 텅 빈 교탁을 흘긋 보다가) 더운데... 뭐 여름을 어쩌겠어요. 수업중에 은행이나 도서관으로 피신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곤한듯 마른세수를 하며) 형네 교실도 이래요?
 
성유찬:(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네게로 눈을 돌린다. 햇빛이 운동장의 모래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오래 볼 수가 없어.) 우리 교실도 비슷해. 여름인데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애초에 내 주변이 어떤지 신경쓰질 않으니...) 쉬는 시간인데, 바람 좀 쐬고 오지 그래.
 
아이들은 더운지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조용한 교실 안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두 사람의 대화만이 들립니다.
 
최치승:나가자고요? (같이인지, 나를 내쫓으려는 건지. 애매한 말들을 쉽게 해석이 되지 않는다. 생각보다 한 자세로 오래 있었는지 밀려오는 뻐근함에 어깨 한쪽을 느릿하게 주무르다) 확인할 건 다 했어요? 뭐, 형이 2학년 교실에 확인할게 뭐가 있다고... 아니면 저 또 뭐 잘못했어요? (사실 지금 가자는게 옥상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라든가...)
 
성유찬:어. 내가 여기까지 친히 내려와 줬으니까 배웅이라도 좀 해주지? (아무도 오라고 한 적 없지만) 넌 교실이 좋냐? 텁텁해서 숨 막혀 뒤질 것 같구만. (뒤에 딸려오는 물음에는 그냥 책상만 톡톡 두드리다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백한 고의적 말씹기!!!)
...이거 근데 왜 혼자 쫄지?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무표정이었다가 갑자기 의심 가득해진 얼굴;)
 
최치승:네,네. (네 말대로 찌뿌둥하기는 했는지 대충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으로 몇 교시가 더 남았더라... 아니 근데 왜 대답을 안해.) 아뇨, 그냥. 이 교실이면 저밖에 볼 일 없잖아요, 다른 애들은 3학년 눈치 보여서 진작 다 도망간 것 같은데. (중얼...)
 
성유찬:... ...그러니까 니 친구들이 나간 게 다 내 탓이다? (중얼거리는 걸 또 들음. 그냥 애교로 치고 봐줄 수야 있겠다만 아무래도 여름이라, 불쾌지수가 치솟고 있기 때문에, 화풀이 겸, 대답 겸. 뒤돌아 의자를 집어넣는 척하며 어깨빵 ) 아. 미안. 그러니까 왜 거기 서 있어. (대충 사과하는 둥 마는 둥하며 설설... 뒷문으로 나가버린다)
 
최치승:그럴 수도 있다~ ...는 거죠. 누가 그렇댔나. (특히 이런 양아치같은 선배면 더. ...라고 생각하다 얼얼한 어깨를 더듬으며 따라 나간다. 하 xx... 내가 안쪽에 서있었는데? 저 형은 언젠가 손버릇 때문에 망할거다. 꼭.)
 
성유찬:야, 있잖아, 넌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보이는 거 알고 있냐? (지금도 봐. 나한테 시비터는 얼굴 같아서 빡치잖아. 되도 않는 말 씨부리며 손가락으로 네 어깨를 꾹 눌러 밀어버린다. 제3자가 보면 학교폭력 그 자체...)
됐으니까 3학년 교실까지 데려다 주...기 전에 잠시만. (무언가 생각난 듯 계단쪽을 쳐다보다가) 옥상 좀 들렀다가 가자.
 
떠들거나, 장난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복도에서 저마다 돌아다니고 있네요.
 
최치승:솔직해서 그래요, 솔직해서. 말로 안 꺼내는게 기특한 거 아니에요? (으쓱) 그러는 형은 맨날 싱글싱글 웃으면서 화내잖아요. 알기도 힘들게. (뻔뻔하게 버티고 서서는) ......옥상이요? 진짜? (주머니 뒤적...) 저 거지새끼에요.
 
성유찬:(이걸 죽여 살려...) 생각을 바깥으로 다 뱉어내니까 문제지. 진짜 뒤지기(중의적) 전에 따라 올라와. 지금 올라가면 한 대, 나중에 올라가면 두 대. 어떻게 할래.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선택권을 준다. 본인이 선한 사람이니까 특별히 아량을 베푼다는 듯이...)
 
최치승:하... 내가 무슨 꼬붕으로 보이나, 한 대요. (잽싸게 계단 올라감) 제가 먼저 올라가면 한 대 까주는 거예요.
 
성유찬:...난 까준다는 말은 안 했는데?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무게를 실어봅니다.
 
왠지 올라가는 길이 참 멀게만 느껴져요.
 
뒤를 쳐다보면
 
묵묵히 계단을 오르는 그가 보입니다.
 
당신은 성유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성유찬:야, 넘어지지 마라. 계단에서 굴러갖고 뒤통수 다 깨져도 119 안 불러줄 거니까.(..)
 
최치승:그 정도는 좀 불러줘요. 정없네 진짜...
 
성유찬:장례 정도는 치러줄 수 있는데.
 
보폭이 맞춰진 발소리가 바닥을 쿵쿵 때립니다.
 
최치승:그냥 죽으라는 거죠?
 
성유찬:그래주면 좋고.
 
끼익ㅡ, 철문이 요란스럽게 열리고,
 
제일 먼저 눈에 드는 것은
 
당신이 수업 시간에 보았던 푸른 하늘입니다.
 
뜨거운 바람이 전신을 에워싸지만
 
딱히 불쾌한 느낌이 들진 않습니다.
 
하늘은 끝을 모르는 듯 높게 치솟아있습니다.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몇 점만이
 
이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시켜줄 만큼
 
정말 비현실적인,
 
지독하리만치 고요한 공간입니다.
 
성유찬:...아. 진짜. 날씨 한번 드럽게 푹푹 찌네. 괜히 올라왔나...
 
무심코 철조망 아래를 내려다 봅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텅 빈 운동장.
 
덥지도 않은지
 
한 학생이 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새빨갛게 물든 셔츠를 입은 그의 몸은
 
기괴하게 뒤틀린 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면,
 
운동장은 즐겁게 뛰노는 친구들로 가득 찹니다.
 
최치승:
SAN Roll
기준치: 60/30/12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합니다.
 
성유찬:(슬쩍 얼굴을 바라보다가 흥미 없다는 듯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들었다.) 아 맞다. 최치승, 너 이거 뭔지 아냐?
 
유찬이 운동장을 등지고, 철조망에 기댄 채
 
테이프를 넣은 작은 물건을 이리저리 돌려봅니다.
 
그러고선 이어폰을 단자에 꽂은 뒤,
 
당신의 손에 건넵니다.
 
성유찬:(들어보라는 듯, 손 위에 올려둔 이어폰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최치승:네? 아니, 저기...... (말이 잘 안 나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눈을 깜빡이자 거짓말같이 사라진 모습에 고개를 한번 턴다.) 더위를 먹었나...... (어쩐지 어지러운 기분을 느끼며 이어폰을 귀에 꽂아본다.)
 
성유찬:...귀신이라도 봤나 왜 이래? (너를 의아한 얼굴로 보다가, 따라서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린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뛰어노는 친구들, 흩날리는 흙먼지 같은 것들. 이 자식 덥다 덥다 하더니 드디어 정신을 놨나 보네... 순순히 이어폰을 꽂는 걸 보고는 다시 철조망에 등을 기대었다.) 이거 워크맨이라는 건데, 누르면 음악 나와. (익숙지 않은 듯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달칵,)
 
버튼 하나를 누르자, 테이프 감기는 소리와 함께
 
노래 하나가 흘러나옵니다.
 
 
짙푸른 빛의 하늘이 쨍쨍하게 당신의 각막으로 내비칩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요.
 
수십, 수백 번 눈을 감았다 떠도 영원히 같은 하늘빛일 것 같습니다.
 
최치승:아니에요, 아무것도. (다시금 바닥을 쳐다보고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운동장에서 등을 돌린다. 네가 들려주는 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평온해서, 방금 전 봤다고 생각했던 광경과 동떨어져 있었다. 약간의 기이함을 느끼며 옆을 흘끔 본다.) 형이 좋아하는 노래에요?
 
성유찬:싱거운 새끼. ...이건 그냥 있길래 가져온 거야. 구경시켜주려고. 그리고 음악 듣는 건 별로 내 취향이 아니라서. ...지루하고 늘어지잖아 기분이. (지금도 그렇지 않나. 좋은 점이 있다면 주변에 있는 소음이 안 들린다는 점?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덧붙이지 않았다.)
(의미 없이 기계를 몇 번 건드려 본다. 해가 뜨거워 조금 따뜻해졌나. 교실에 있을 땐 몰랐는데, 확실히 꽤 덥네 여기. 하늘이랑 가까워서 그런가, 열기가 후끈하다. 공기중에 불덩이가 떠다니는 것같이.) ...안 덥냐?
 
최치승:어쩐지 다루는게 어색하더라. 들을거면 신나는 노래로 들어요, 이런거 들으니까 지루하고 늘어지지... 뭐, 저는 나쁘진 않네요. (잠깐의 잔상이 쉽게 잊히는 류는 아니었는지 미적지근한 목소리로 감상을 말하고는) 덥다니까요, 아까부터 계속... 그래도 여긴 밖이라 그런가, 답답하진 않은데. 안 그래요?
 
성유찬:신나는 노래는 시끄럽잖아. 그런 거 들으면 오히려 더 더워지던데. (안 그래? 정해져 있는 대답을 요구하는, 좋은 말로 할 때 내 의견에 동의하라는 눈빛. 그게 아니어도 충분히 더위에 지쳐 보이니까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아도 핀잔은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더우면 내려가든가 왜 멍청하게 여기 서 있냐? (자기가 끌고와놓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확실히 숨이 막히진 않는다. 작은 상자 안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것보다 탁 트인 옥상이 낫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다가, 느리게 내뱉는다. 잠시 정적이 일다가, 뜬금없이 공기를 가로질러 한다는 말이) 최치승, 내일 바다 가자. 시간 없으면 만들어.
 
최치승:신나는 노래도 신나는 노래 나름이죠. 그래도 어떤 건 들으면 제법 기분이 괜찮아지는데, ...... (뒤늦게 눈빛을 마주한다... 암묵적인 요구에 살짝 질린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금세 못 참고 입을 연다.) ...형은 아직 사춘기에요? (참 속을 알 수가 없다. 이랬다 저랬다, 싫었다 좋았다... 이어 들려오는 말에는 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인다.) 바다는 왜요?
 
성유찬:(나는, 날씨가 정말 더워서, 움직이면 더 더우니까, 그래서 가만히 있자고 다짐했는데, 이 새끼 주둥이가 너무 자유로워 보여서.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네 앞에 바르게 마주 선다.) 옥상에 철조망이 없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고개를 숙여 제 운동화 앞코를 가만히 보다가, 그대로 차 네 정강이를 갈긴다.) 바다는 시원하니까. 됐냐? 시간 있어 없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최치승:악, (제 딴엔 순수한 질문이었어서 얻어맞을 거라곤 예상도 못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정강이를 내어주곤 바닥에 주저앉는다.) 저 지금 심신미약이거든요...? 아, 씨... (나올락 말락한 욕을 겨우 삼켜내곤 억울한 듯 고개를 처든다.) 안 가요! 내일 갔다가 바다에 밀어버릴 줄 누가 알아요? 무서워서 진짜.
 
성유찬:심신미약인데 어쩌라고. 우대라도 해줘? 호 불어드려? (세게 차지도 않았는데 사내 새끼가 엄살은... 혼잣말인 것치곤 다 들리게 말해놓고서 다시 철조망에 기댄다.) 그래도 옥상에서 밀리는 것보다 바다에서 밀리는 게 낫지 않아? 적어도 바닥으로 추락하진 않잖아. 내일 너희 집으로 찾아가기 전에 빨리 간다고 말해. 하나, 둘...
 
최치승:둘 다 해주시면 조온나 감사하겠죠. (손 쓰는 운동 하는 사람이 다리는 왜 써? 됐다... 이 형이랑 무슨 말을 한다고. 바닥에 그냥 털썩 주저앉은 채로 삐딱하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왜 전데요? 형 성격 지랄맞아서 친구 없죠...
 
성유찬:...진짜 죽여버릴까... (일순간 험악해지는 공기...라고 해봤자 고등학생 두 명이서 틱틱대는 것밖에 더 되겠냐마는. 네가 삐딱하게 하늘을 쳐다보면, 저 역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못마땅한 눈으로 널 내려다본다.) 해변에서 스파링 뜨려고 그런다 왜. 어차피 내일 주말이라 학교도 안 가는데 바람 좀 쐬고 오자니까 말이 많아.
 
최치승:진짜 그게 다예요? (끈질기게 쳐다보다 맥이 빠졌는지 한숨 푹...) 진짜 뜬금없네, 이 형. 내일 제 정강이 보장해주면 갈게요.
 
성유찬:(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한다. 꽤 오래, 많이 고민한다.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들어갈 때까지 고민한다. 보장 가능한가? 아마 안 될지도. 그래도 된다고 말해야 따라올 것 같으니까, 원하는 대로 어울려 주겠다는 뉘앙스를 풍겨본...다.) 보장은 못 하겠지만 안 때리려고 노력할게. 됐냐? 너 그렇게 존나 하나하나 따져서 어떻게 사냐 피곤해서.
 
최치승:하나하나 안 따지면 맞다 못 살 것 같은데요... (습관적 말대꾸) 형이 너무 쉽게 쉽게 사는 거예요. 마음에 안 들면 때리고, 협박하고. (그제서야 철조망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하... 받아주면 버릇 나빠지는데. 이미 나쁜 것 같지만...) 내일 몇 시, 어디서요.
 
성유찬:입만 조심하면 오래 살아~ 네가 자꾸 주둥일 털어서 그렇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선 머리 위에 높게 떠 있는 태양을 보다가, 바닥을 보다가. 역광에 그림자 진 바닥이 새카맣게 짙어 보인다.) 그리고 나 최치승 씨 같은 양아치 말고는 안 때리니까 걱정 마세요.
(가자고는 했는데 막상 언제 만날지를 안 정했다. ...정하고 사는 성격도 아니고.) 내일 내가 마음 내킬 때 데리러 갈 테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망한 약속..)
 
최치승:저는 사람도 안 때리고 삥도 안 뜯어요. 선배들한테도 꼬박꼬박 존댓말 하는거 보면 몰라요? 이렇게 참한 후배가 어디있다고... 거 듣는 최치승씨 섭섭하네. (억울한듯 눈썹 한쪽을 올리다가) ...마음대로 해요, 자고 있어도 제 탓 아니에요. (어깨를 으쓱하며 옥상문을 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성유찬:...사람도 안 때리고 삥도 안 뜯고, 꼬박꼬박 존댓말하는데 왜 저렇게 재수가 없지... (희한하네. 사람 한 명, 벌레 한 마리 없는 텅 빈 운동장을 죽 보다가 다시 뒤돌아 따라 내려간다. 왜지? 쟨 왜 저렇게 재수가 없지? 하는 의문 비스무리한 것을 가지고.)
 
당신은 평소처럼 수업을 받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잠에 들겠죠.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일상입니다.
 
눈을 감고 후덥지근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당신의 심장박동에 숨을 맞춰 들이쉬다, 다시금 내쉽니다.
 
언제나와 같은 날입니다.
 
 
...
 
오후인 듯한데, 하늘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코 안으로 후덥지근한 향이 풍겨옵니다.
 
창밖에서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축축한 몸은 움직일 때마다 끈적거려 불쾌해지기 일쑤예요.
 
오늘은 주말입니다.
 
학교에 갈 일 없이 편안하게 늦잠을 자기도 했죠.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하나요?
 
적어도 등굣길에 양말 젖을 일 없어 다행이겠어요.
 
안 그래도 찝찝한데, 와중 어질러진 방이 눈에 띕니다.
 
피곤하지만 조금은 정리해 볼 수 있을까요?
 
옷장과 책상, 침대 주변만 대충 청소하면 될 것 같네요.
 
최치승:(이불부터 챡챡 갠다. 양아치 아니라니까.)
 
치승이는 양아치가 아니니까. 착착 이불을 갭니다.
 
글러브나 영수증 조각, 마시던 음료수 같은 것들...
 
열심히 이불을 개고 침대를 정돈합니다.
 
그 사이에 눈에 띄는 소설책 한 권이 보입니다.
 
책등에는 '데미안'이라고 적혀 있네요.
 
책갈피가 끼워져 있습니다만, 펼쳐볼까요?
 
최치승:(전에 읽었던가... 애매모호한 기억에 책갈피가 있는 곳을 펼쳐본다.)
 
 
습기를 머금은 책은 눅눅하기 그지없습니다.
 
최치승:(이런 날씨에 어울린다면 어울리는 책이네. 감상적인게. 책을 책상위의 책꽂이에 꽂아넣는다.)
 
책까지 깔끔하게 책꽂이에 넣어 정리합니다.
 
침대 주변이 한눈에 보기에도 깨끗해졌네요.
 
최치승:(책을 정리한 김에 책상도 대충 정리한다.)
 
책상 위에는 어질러진 필기구, 교과서 등이 보입니다.
 
그 옆에 장래 희망 계획서 작은 라디오가 하나 놓여 있군요.
 
최치승:(계획서 흘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종이 한 장입니다.
 
잉크로 인쇄된 검은 글씨를 빼면 모두 빈칸이군요.
 
장래 희망…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다,
 
어떠한 결말을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일 텐데요.
 
이런 것들은 참 허울 좋은 망상 같기도 합니다.
 
원한다면 적어봐도 좋습니다.
 
최치승:(이대로 간다면 무난하게 살겠지. 기왕 희망사항을 적으라면 돈이나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백만장자를 끄적인다. 장난으로 적었다고 교무실에 또 불려가게 생겼네. 스스로도 어이없는지 피식 웃다가 옆의 라디오를 살핀다.)
 
장래 희망 칸에... 또박또박 글씨가 적힙니다.
 
백만장자!
 
옆에 있는 라디오는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라디오를 켜보면 지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어떤 주파수에 맞춰도 제대로 된 음성이 흘러나오지 않아요.
 
망가진 것 같진 않아 보이는데, 이상하네요.
 
최치승:왜 이러지? (안 그래도 성한 물건이 몇 없는데 얘까지 말썽이네. 기계니까 몇번 손바닥으로 쳐본다...)
 
라디오를 손바닥으로 몇 번 쳐봅니다.... 만,
 
지지직거리던 소리마저 뚝 끊겨버리고 맙니다.
 
아예 전원이 나가버린 걸까요...?
 
최치승:......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의자에 널어둔 옷이나 옷장에 넣으러 간다...)
 
라디오는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둡니다.
 
의자에 널어둔 옷은 습기 때문인지 여전히 축축합니다.
 
날씨가 이런데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옷장 안에는 깨끗이 다림질 된 교복만 몇 벌 걸려 있습니다.
 
사복 같은 것은 없어 보입니다. 세탁이라도 한 건가요?
 
최치승:(이렇게까지 다 빨았다고? 엄마가 건드셨나... 아직 다 안 말랐으니 옷걸이에 대충 끼워 문고리에 걸어둔다.)
 
 
빗소리는 끊이질 않습니다.
 
당신을 여름 한가운데에 가둬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장마는 계속됩니다.
 
꼭, 영원한 여름에 갇힌 것만 같습니다.
 
침대 위에 놓인 이불은 잔뜩 습기를 머금어
 
축축해 부스럭거릴 새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곧 비는 멎을 거예요.
 
이 여름이 금세 지나가고, 가을을 지새운 뒤, 겨울을 보내면,
 
당신은 조금 더 자라게 되겠죠.
 
지금이야 꿉꿉하겠지만, 그래요.
 
뭐든 지나가기 마련이니까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현관 밖을 살펴보면,
 
유찬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최치승:...와, 기어이 바다를 가겠다고. (문을 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네 성격에 이런 날씨면 변덕을 부렸을거라 짐작했으나... 보란듯이 빗나갔다.)
 
성유찬:...어... (...진짜 나왔네? 예상 못 했다는 얼굴. 얼마나 두드려야 일어날지 가늠 중이었는데.) 자고 있어도 지 탓 아니라더니. 벌써 일어나서 바다 갈 준비하고 있었네 최치승? (아님..)
 
최치승:이런 날씨에 가요? 진짜? 지금은 덥지도 않은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가에 비스듬히 서서 너를 응시한다.) ...역시 그냥 들어가서 잘래요. (문 스윽 닫기)
 
성유찬:(스윽 닫히는 문에 손 끼워넣기) 핑계 대지 마 비 거의 그쳤어. 이따 다시 쨍쨍해질 테니까 좋게 말할 때 가자? 얼른 옷 챙겨입고 나와.
 
최치승:일기 예보가 그래요? ...어쨌든 당장은 이렇게 쏟아지는데 굳이 오늘이어야 하냐고요. 잡는 날도 참. (궁시렁대며 현관문 발굽을 발로 쳐서 내린다. 그러고 보니 사복을 다 빨지 않았나...) ...기다려요, 바지만 갈아입으면 돼요. (옷장 뒤적이러 가며)
 
성유찬:(잠시 하늘 봄) 아까보다 빗줄기가 많이 작아졌어. 그만 토달고 나와. (손 끼인 채로 문 닫힐 줄 알았는데. 나랑 사고회로가 약간 다르네. 문 앞에 심드렁하게 서서 네가 나오길 가만히 기다린다. 한 3초 정도 지났나...) 바지를 만들어서 입냐? 왜 이렇게 느려?
 
최치승:(어쩌자고 저렇게 아무데나 덥썩덥썩 손을 들이밀지... 서로 이해가 안 가는 중) 저 아직 옷장 문도 안 열었거든요? (어이 x... 그제서야 옷장 문을 열어 아무 바지나 꺼내 입는다.) 제가 무슨 변신 로보트에요?
 
성유찬:(서로 이해가 안 가는 중) 너 지금 체육관이었으면 엎드려뻗쳤어야 돼. 사람이 이렇게 느릴 수가 있어? 굼벵이야? (라고는 하지만 이쪽도 비슷한 속도였을 것... 물론 지금은 이쪽이 기다리는 입장이라. 그거 조금 기다렸다고 벌써 지루해졌는지 현관문까지 똑똑 두드리며 무언의 재촉 중) 빨리 나오세요 아저씨. 비 다 그쳤어.
 
최치승:하.. 저 아저씨 성격 진짜 급하네. (독촉에 못이겨 아예 바지지퍼를 잠그며 나간다ㅋㅋ 현관에 대충 쓸만한 우산이 있던가 생각하다가) 이따가 진짜 비 안온대요?
 
성유찬:저기요, 할아버지, 미치셨어요? 안에서 다 처 입고 나와야 될 거 아냐. (못 볼 꼴 봤다는 눈...) 바다 보러 가자고 한 내 잘못이지 그래. 형이 미안하다. (참을 인을 세 번이나 새겨서 살인을 면한 자들, 정말 참된 성인군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걸 세 번이나 참아? 그게 가능한가?)
 
유찬의 말대로 정말 비가 그쳤습니다.
 
집은 동네가 보이는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바닷가 근처라 지대가 제법 높은 편이네요.
 
넓고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입니다.
 
비가 갠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에 스민 빗물 냄새가 공기중에 섞여듭니다.
 
최치승: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66
판정결과: 실패
 
성유찬:아직 안개가 좀 꼈긴 한데... 좀 있으면 개겠지. 내려가서 버스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돼. 주말에 퍼질러 자지 말고 놀러 좀 나가라. (어머니 잔소리st)
 
최치승:더 나가있으면 깜둥이 돼요. 그리고 비 오는 날은 집에 있는 게 상식적인 거 아닌가... (귀 후비적...) 형은 뭐 자주 놀러나가요? 허여멀건해서는, 집에만 콕 박혀있을 것같이 생겼는데.
 
성유찬:비 오면 비 오는 대로 운치가 있잖아. 감성이 부족해 이 새낀... (코끝으로 비릿한 비냄새가 훅 끼친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끈적해서, 아. 이거 진짜 싫다.) 자주 나가나? 최치승보다는 많이 나가는 듯. 적어도 주말에 늦잠은 안 자니까. 집에 뭐하러 박혀 있어 할 것도 없는데.
 
최치승:음악도 안 듣는 메마른 사람한테 이런 소리 듣네요, 제가... (방금도 감성 넘치는 책 하나 보고 왔는데, 일부긴 하지만. 뒤로한 책의 이름을 떠올리며 느른한 걸음으로 네 뒤를 따라간다.) 나가면 뭐 하는데요? 체육관 가는 거 말고요.
 
성유찬:음악이랑은 또 다르지. (여러 면에서. 젖은 길에 이따금씩 생겨 있는 물 웅덩이를 피해 걷는다. 잘 따라오고는 있는지, 혹시라도 몰래 쨌을까 싶어 중간중간 고개 돌려 확인도 해보고.) ...나가면? (...체육관 말고는 어디 안 가는데. 라고 말하면 싸가지없게 비웃을 것 같으니까 대충 둘러대자, 고 생각 중) 친구들이랑 놀러다니거나, 영화 보거나. 이게 궁금해?
 
최치승:그냥, 나가면 뭐 대단한거 하나 해서요. (은근 친구 많나 보네. 의외라는 생각으로 네 등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불시에 고개를 돌리자 시선을 슬쩍 피한다.) 감성적이라 그런가... (인정은 못하겠지만) 바다도 자주 가요?
 
성유찬:고삼 하는 짓이 다 똑같지 뭐, 용이라도 잡으러 갈까봐? (어깨를 으쓱이고는) 바다는... 별로. (한두 번 가봤나. 갔을 때마다 별 감흥이 없었다. 모래, 파도, 태양, 끝. 아직 그 감성이라는 게 부족해서 그런가.) ...근데 너 나랑 있으면 어색하냐?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 뒤에서 자꾸 시끄럽게 짹짹대.
 
최치승:형을 이해하려면 뭐라도 알아야 될 것 같으니까요. 형이 좀 유별나요? (그러지 않고서야 저 사고를 따라가지 못한 채로 휘둘리기나 하겠지. 어색하다면 어색하려나? 싸우기만 해서 모르겠네. 실험해볼 겸 일부러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본다...)
 
성유찬:가끔은 이해 못 하고 사는 게 나을 때가 있어. 넌 평생 나 이해 못할걸. (그리고 다음에 올 말을 기다린다. ...기다린다...) ... (매미가 우는 소리랑, 젖은 길을 밟아 작게 찰박이는 소리 같은 거. 말고는 아무것도 돌아오는 게 없는데, 설마 집으로 튄 거 아닌가 싶어 슬쩍 뒤를 쳐다보면 얌전히 따라오는 신발이 보인다. ...조용해서 좋긴 한데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 ... ...야. 떠들 거면 끝까지 떠들지 왜 하다 말아 빡치게.
 
최치승:뭐, 저는 그럴지도 모르죠. 근데 그러면 제가 답답하니까. (나름 노력해본대도 뭐라 하네. 저놈의 삐뚤어지다 못해 비관적이기까지 한 성질머리...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더운 숨을 뱉는다.) ...... (생각보다 안 어색한데, 그냥 이대로 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들려오는 열 받은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곤) 이제 궁금한거 없는데요. ...없을 때 말하면 진짜 어색해져요.
 
성유찬:답답할 게 있나... 진짜 특이한 새끼네. 더위라도 먹은 거 아니냐? (넌 그 호기심이 문제인 것 같기도 해. 어제보다 축축하긴 해도 더 덥진 않은데. 아님 점심을 잘못 먹었나...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투로 지나가듯 던졌다.) 아무튼 고맙다 치승아. 분위기 진짜 존나 어색해졌어 너 덕분에. (라고 말은 했지만 더 말을 얹진 않았다. 어쩌면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가 더 편하게 느껴졌을지도)
 
옆에서는 세차게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가 들립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조금 불어나있네요.
 
시원한 물길을 따라
 
둥둥 떠다니는,
 
사람 하나가,
 
 
눈을 깜빡이면, 사라집니다.
 
최치승:
SAN Roll
기준치: 59/29/11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물살이 거센
 
단지 깨끗한 하천입니다.
 
성유찬:거의 다 내려온 것 같은데... 야, 잠만.
 
유찬이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손으로 가리킵니다.
 
성유찬:나 여기 있을 테니까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와.
 
태평하게 말하고선 근처 벤치에 냅다 앉아버리는군요.
 
최치승:(이제는 아이스크림 셔틀까지? 이 형은 정말 제대로 놀랄 새도 없이 골때리게 한다. 하... 진짜 뭐였지. 아이스크림은 모르겠고 피로 회복제라도 사마셔야겠다. 여러 생각들을 하며 터덜터덜 편의점으로 간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당신을 맞이합니다.
 
바깥 온도와 천지차이네요.
 
지루한 얼굴로 카운터를 지키는 알바생이 보입니다.
 
무엇을 구매할까요?
 
최치승:(안은 그래도 좀 시원하네... 계속 여기 있으면 안되나? 미적미적 시간을 끌며 비타오백 하나를 집고, 아이스크림 쪽으로 가서 고심한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맛있게 만들어. (이상한 맛을 고르고 싶었으나 실망한 채로 토마토 쭈쭈바를 골라 계산대로 간다.)
 
알바생이 무표정으로 물건을 찍고, 무미건조하게 말합니다.
 
이천백 원입니다.
 
과연 이 아이스크림을 그가 좋아할진 모르겠으나...
 
에너지드링크 하나와 맛없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구매합니다.
 
시원한 에어컨을 뒤로 하고 편의점 문을 나서면...
 
멀리서 치승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성유찬이 보입니다.
 
성유찬:(손가락으로 너를 가리켰다가 다시 저를 가리켰다가. 설마, 그 아이스크림, 내 거?)
 
최치승:(말없이 내밈..)
 
성유찬:...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건다 이거지 (오해했다!)
 
최치승:뭘 사다달라고는 안 했잖아요. (ㅡㅡ)
 
성유찬:센스 다 뒤져가지고... 토마토 아이스크림? 토마토? 너라면 이런 걸 먹고 싶겠냐? (봉지를 뜯어서... 꼭지를 따서 한 입 먹어봄. 꼬라지는 이래도 아이스크림이라 나름 맛이 있다.) 내가 살면서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에 제일 맛없다. (그래도 야금야금 잘 처먹는다. 다른 네 손에 들린 걸 힐끔 보고서) ...웬 비타오백. 피곤하냐? 형이 대낮부터 바다 가자고 불러서?
 
최치승:센스 죽이죠, 형 눈색이랑 똑같구만 뭘. (아이스크림으로 깔맞춤하기...) 어제부터 자꾸 헛걸 봐서요. 기가 허해졌나, 영... (비타오백을 까서 들이킨다.)
 
성유찬: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먹기 싫어졌어. (어떻게 사람 눈이랑 똑같은 색의 아이스크림을 사올 수가 있지? 미친놈 보듯 힐끔거리다가) 요새 귀신이라도 보나봐. 괜찮냐?
 
최치승:엥... 잘 먹다가요. (다 먹은 빈 병을 벤치 옆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형 귀신같은거 믿어요? 아니, 귀신이라기보단 멀쩡한 곳에서 자꾸 변사체같은거를... 근데 또 눈 한번 감았다 떠보면 없어요. 짜증나게.
 
성유찬:별로야. 빠삐코 같은 거 많잖아 수많은 아이스크림 중에 꼭 토마토를 사와야 했냐고. (정말 이해 안 된다는 듯... 열기 탓에 금세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쭉 마셔버리곤 그 옆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렸다. 물 묻은 손을 네 옷에 슥슥 닦고)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그냥 네가 헛것 보는 거 같으니까 대충 어울려 준 거지. ...근데 변사체보단 귀신이 낫겠네. 괜찮냐 진짜? 그냥 집 가서 좀 쉬든지.
 
최치승:다른거 사왔어도 형은 욕했을 걸요. (옷에 남은 물자국을 내려다보며 어이없는지 바람 새는 소리를 낸다. 확, 비나 다시 와라. 젖을 거면 둘다 젖게.) ...됐어요, 여기까지 나온거. 가겠다 하면 보내주긴 할 거에요? (불신)
 
성유찬:그건 맞지. (생각해보니 최치승을 제대로 칭찬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 ...애도 아니고 칭찬이 필요한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냥 눈만 한번 굴리고 끝냈다.) 안 보내주는 것도, 맞지. 쓰러질 것 같으면 말해라 양지 바른 곳에 묻어줄게.
 
최치승:이 정도면 저 형 이해 존나 잘하는듯... (뿌듯하지는 않지만 일단 의기양양함)
 
성유찬:좋냐? (시비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쯤,
 
성유찬:야 잠깐 와봐. 여기 들러야 돼.
 
라며 대답할 새도 없이 어떤 가게 안으로 들어갑니다.
 
꽤나 낡아 보이는 전파상이네요.
 
여러 가지 전자기기들이 놓여있어요.
 
무선호출기나 라디오, 유선전화기 같은 것들...
 
그는 당신의 손에 테이프 하나와 워크맨을 넘깁니다.
 
성유찬:어제 쓰던 거랑 같은 거. 녹음도 되더라 나중에 써봐.
 
 
가게 밖으로 나오면
 
콧잔등과 팔목께에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게 느껴집니다.
 
바다 위를 제외한 곳에 먹구름이 끼는 것이 보여요.
 
다시금 비가 오려나 봅니다.
 
성유찬:금방 쏟아지겠는데... 가자 빨리. 버스 왔어.
 
최치승:오란다고 진짜 오네... (중얼...)(아니, 전파상 들릴 줄 알았으면 집에서 상태 이상한 라디오도 가져와보는 건데. 따위의 생각을 하다 버스에 오른다.)
 
성유찬:왜, 비 오라고 기도라도 했어? (힘을 실어 어깨를 퍽 친다. 나름 살살 쳤음)
 
때 맞춰 도착한 버스에 두 사람이 오릅니다.
 
도로를 가로질러 달리는 버스 창문에
 
종종 빗방울이 스치며 투명한 빗금을 그립니다.
 
 
짙푸른 바다에서 파도가 연신 쏟아져 나옵니다.
 
일렁이는 푸른 물들이 사방을 흩어버리듯
 
마구잡이로 물결치기 시작합니다.
 
저편에 놓인 해는 노을이 져가는 시간인 탓인지,
 
곧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가득, 가득 커진 채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바람이 느껴져요.
 
수평선 위를 제 집인 듯 노니는 새들이 간간이 보입니다.
 
두 사람은 그곳에 서 있습니다.
 
가만히 서서 숨을 쉬기만 해도 땀이 배어 나오는
 
후덥지근하고 습한 날씨에 더해,
 
피부 겉에 짠 바다가 몰고 온 소금기가 달라붙는 것만 같습니다.
 
성유찬:괜찮네? 기대 안 했는데. 짠 냄새가 많이 나긴 하지만.
 
최치승:집에서 선풍기 바람 쬐는게 더 시원할 거 같은데요... (가만히 서서 소금내 섞인 바닷바람을 들이마시곤) 그래도 보기는 좋네요.
 
성유찬:...새끼 진짜 진짜 감성이라고는... (됐다 말을 말자. 파도가 칠 때마다 쓸려내려가는 모래사장에 한참동안이나 시선을 고정한다. 발로 쿡, 찍었다가 파도가 문지르고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진다.)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 바다 온 게 더 낫지? 잘 선택했지? 응? 대답해 봐. (어깨 꾹꾹 찌르며...)
 
최치승:방금 말했잖아요, 보기는 좋다고... ...후회하진 않아요. (나름 최선의 표현인듯... 상체가 미는대로 조금씩 기울어지다, 아예 푹푹 밟히는 고운 모래에 쪼그려 앉는다. 파도가 귓전을 울리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녹음도 된다고 했던가, 주머니에서 아까 네가 넘겨준 워크맨을 꺼낸다. 자연소리도 녹음이 잘 되려나.) ...이거 어떻게 쓰는 거예요? (그러나 기계엔 잼병...)
 
성유찬:내가 선물한 건데 작동법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돼? ... ...형 존나 귀찮게 만든다 최치승. (가만히 앉아 사각형 모양의 작은 기계를 쥐고 있는 모양새를 본다. 시간대만 다르지 어제 옥상에 있을 때랑 똑같네.)
...여기, 옆에 버튼. 테이프는 들어 있으니까 이거 누르고 녹음하면 돼. (그래도 어제와는 다르게, 이번엔 저도 네 옆에 쪼그려 앉았다. 참으로 이상한 광경.) 파도소리 녹음하게?
 
최치승:...이거 저 주는 거예요? 왜요? (그냥 잠깐 보관해두라는 정도로 이해했었는지 힐긋 네 옆얼굴을 바라본다.) 이왕 선물한 거면 책임지고 작동법까지 알려줘야죠. (네가 가르쳐준 대로 옆의 버튼을 누르고, 말소리가 섞여들어갈까 너를 바라보며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었다. 뒤로 물러서지 못해 얕게 밀려오는 파도가 신발 밑창을 적시지만,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성유찬:그냥? 넌 이런 거 없을 것 같아서. 하나 갖고 있으면 좋잖아. 그리고 사용법은 알아서 좀 터득해라. 애도 아니...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한 채, 조용히 하라는 포즈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게 지금 형 말하는데...) ...
(테이프가 감기는 것을 조용히 바라본다. 때때로 들려오는 갈매기 우는 소리라든가, 바람이 우는 소리라든가. 이런 것도 녹음이 되려나? 아무도 듣지 못하는 별 뜻 없는 질문을 허공에 뱉는다. 혼자 바다에 왔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작은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딘가 기분이 묘해진다.) ... ('발'. 말하고 싶은데 녹음 중이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입모양으로나 말하며 네 운동화를 가리켰다. 다 젖는 것 같은데.)
 
최치승:(맞는 말이라 딱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있는 라디오도 고장나는 판국에, 돈들여 이런 걸 살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그래, 있어도 아마 사용법을 물어볼만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말마따나 애도 아니니까, 혼자 만지작 거리다가 고장내거나 했겠지. ...근데 이렇게 막 줘도 되는 건가? 대가없이 뭘 받아본적이 있어야지... 타인의 호의를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잡생각이 많아진다. 의미모를 눈으로 어색하게 기기를 들고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신호한답시고 네가 순순히 입을 다무는 모습은 좀 신선하다고 생각하며, 됐다 싶을 때 즈음 다시 버튼을 눌러서 녹음을 종료하고, 신발을 탈탈 털었다.) 이제 됐어요. 날도 더우니까 빨리 마르겠죠.
 
성유찬:와, 답답해서 뒤지는 줄 알았네. (쓰는 법 알려줬으니까 잘 보관해라 그거. 망가뜨리거나 잃어버리면 그날 나한테 죽도록 맞는 거야. 진심 반 농담 반 섞인 우스갯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옆에 앉아서 제 신발까지 젖은 것 같고, 꽤나 마음에 안 드는 표정. 누가 앉으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가 옆에 가 앉은 거면서도 그런다. 이런 성격에 진즉에 질려서 떨어져 나가도 성유찬은 아무 말 안 했을 테다. 최치승이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 녹음 잘 됐을지 모르겠네 성능은 별로인 것 같던데. (아까 앉아있던 그 자리에서 더 물러나지 않고 발장난을 치며 덧붙였다. 물이 어디까지 올 수 있나 시험해보고, 축축히 물 먹은 모래들을 발로 쭉 그어보기도 했다.)
 
최치승:(몇 분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새삼 성격 한번 급하다. 워크맨의 단단한 모서리를 손 안에서 만지작 거리다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망가뜨리는 건 모르겠는데... 아마 잃어버리지는 않을 걸요. 아깝잖아요. (바닥에 발의 물기를 몇 번 비비다가, 괜히 모래가 밑창에 들러붙어 포기한 채로 따라 일어선다. 생각해보니 바다 근처에 살면서, 이렇게 여유롭게 바다 구경을 한 적이 없었다. 오렌지 빛깔로 물드는 하늘의 색을 그대로 반사하는 물결에 조금 더 시선을 두었다가) 녹음이 잘 됐는지는 뭐, 나중에 들어보면 알겠죠. 형은 뭐 따로 녹음한거 있어요?
 
성유찬:이왕 선물받은 거 안 망가뜨리겠다는 보장도 좀 해주지? (그래도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더 따지고 들진 않는다. 소유권은 이미 상대방한테 넘어갔으니 자신이 뭘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지만, 소홀히 대한다면 적어도 기분이 좋진 않을 테니까.)
(네 시선이 머무는 곳을 눈으로 좇는다. 일전에 봤던 바다는 푸른색이었는데, 지금은 온통 오렌지빛이라, 환하게 일렁이는 수면을 잠시간 응시했다.) 난... 글쎄. 너처럼 파도소리 녹음해두는 취향이 없다 안타깝게도. 직접 와서 들으면 되지 굳이 녹음할 필요까지 있어? 집도 가까우면서. (무미건조하게 말하고선 파도를 콱 밟아 물을 튀겼다. 바지 밑단이 조금 젖어들지만 아랑곳않고 발장난. 아마 네 바지에도 조금 튀겼을 것...)
 
최치승:보장해드리고 싶어도, 저 오늘 라디오도 하나 고장내고 왔거든요. (시선은 여전히 수평선과 평행하게 고정한 채로 뻔뻔하게 대꾸한다.) 감성은 저보다 더 있다면서...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요. 녹음된 소리가 이렇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원래 사진이나 녹음같은 건, 그냥 당장을 기록하는데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지금은 좋은 파도소리가 내일은 싫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 굳이 보러 올 생각은 들지 않아도, 녹음된 소리를 들으면 아 이땐 괜찮았었지, 하며 적당히 위안을 받을 수도 있는 거겠지.) ......재미있어요? (어느새 바지 밑단도 축축해진 것 같은 기분에 너를 돌아본다.) 아예 들어가서 놀지 그래요.
 
성유찬:고장낸 게 자랑이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설 저었다.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발장난을 치면서도 이어 네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기록을, 왜 하는 건데. 과거의 장면을 담아둬서 뭐에 쓰려고. 어차피 새로운 기록으로 덧씌워질 것들 아닌가. 파도소리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 성유찬은 네 말이 끝나는 족족 질문을 더해갔다. 물론 전부 속으로 삼켜냈지만.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로. 아마 최치승도 날 이해하지 못하겠지.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어쩌다 운 좋게 맞아도 한 바퀴를 채 돌지 못하는.) ... (겨우 돌아가는 그 반 바퀴가 마음에 들어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건가? ...아마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어, 재밌어. (진짜 들어가서 놀까봐. 네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한 발자국 더 파도에 붙였다. 신발 밑창만 괴롭히던 파도가 이제는 복사뼈 아래까지 건드리고 지나간다. 아예 다 적셔버리겠다는 듯 다리에 힘을 주어 더 세게 물을 튀겼다.) 미안해서 어떡하냐? 물에 빠진 나보다 물 밖에 있는 최치승 옷이 더 많이 젖었네.
 
최치승:아뇨, (하긴, 고장낸다는 보장을 못 하는 만큼 이게 무조건 고장난다는 보장도 없으니. 어차피 그렇다면 고장나지 않고, 잃어버리지도 않고 오래 쓰겠다고 생각하는 쪽이 건강하다.) 반성 중이에요.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평범하게 후회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미래가 덧씌워질 시간같은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지나간 건 돌아오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를 수도 없기 때문에.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미래에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은 자신은, 너와 비슷한 결에 다른 의미의 비관을 품고 사는게 습관적이 된지 오래라. 한 바퀴도 아니고, 반 바퀴도 아닌... 어쩌다 한번 맞물리는 순간을 질 나쁜 노이즈 섞인 형태로라도 기억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까는 신발 젖는다고 말린 게 누군데. (진짜 들어갈 줄은 몰랐는지 반사적으로 한 발을 따라 앞으로 내딛었다가 주춤 멈춰선다. 그 찰나에 물러서봤자 피할 수 없는 고의적인 물살을 고스란히 맞고서야 허탈한 듯 웃었다.) 형은 내년이 돼도 어른은 못 될 거예요. (복수 겸 발에 걸리는 것도 없는 물을 네쪽으로 걷어찼다.)
 
성유찬:잘못한 거 알았으면 됐어. (어딘가 훈장님 포지션;) 그리고, 야, 생각해봤는데, ...녹음해 두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과거에만 머물러 사는 새끼들이 한심한 거지 가끔씩 꺼내 보는 것 정도야. (돌돌 감기던 카세트 테이프의 소리를 되새겨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듣고 있는 것만큼 선명하지도 않을 테고, 후덥지근한 바다 내음이 나지도 않겠지만, 이 순간을 기록하는 것도 나름 메리트가... ... ...아. 내 것도 가져올 걸 그랬나.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 작은 플라스틱 상자를 떠올렸다가, 그냥 다시 파도에 다시 눈을 돌렸다. 생각 같은 것도 전염이 되나.)
그거 대충 칭찬으로 알아들을게. (뻔뻔하게 굴고선 돌아올 복수 비스무리한 것을 기대해본다. 비록 돌아온 건 저의 기대치에 한참은 못미친 수준이었지만.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며 밖으로 걸어나와 널 잠시 응시했다.) 많이 고민했는데, 역시 이게 맞는 것 같다.
 
유찬은 그렇게 말하며 나란히 당신의 옆에 서 있더니,
 
이내 숨을 들이쉽니다.
 
성유찬:넌 이런 하루가 영원했으면 좋겠어?
하늘과 땅이 사실은 붙어있다는, 그런 착각이 들게 만드는 이곳에서.
혹시나 영원하지 않더라도… 기억 속에 남겨 두면 되지.
이 정도면 많이 즐겼다.
 
유찬의 말이 끝나고, 당신은 눈을 감았다 뜹니다.
 
...
 
...
 
수많은 플랑크톤이 죽어 떠내려오는 붉은 바다가 보입니다.
 
노을빛을 녹인 파도 색은 핏빛으로 물들고,
 
하얗던 모래사장에는 아무렇게나 파묻힌,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살덩이들이 굴러다닙니다.
 
거짓이 씌워진 청량하기 그지없던 폐허는 이제
 
잿빛으로 탁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최치승:
SAN Roll
기준치: 59/29/11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이성 5 감소합니다.
 
지금도 바다는 꼭 하늘과 같아요.
 
당신이 이전에 보았던, 푸른 하늘은 아니지만.
 
타오르는 해가 아지랑이로 변해 세상을 덮치고 있는 이 광경이
 
마치 하늘과 같다 하지 않으면 무어라 칭할까요.
 
성유찬:살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없고.
약해빠진 새낀 줄 알고 불쌍해서 도와줬는데... 내가 착각했어.
그만 도망치고 이제 돌아가.
버틸 수 있잖아 너.
 
붉은 해안가에서 당신의 발목을 파고드는 물은,
 
몸에 닿으면 투명한 빛으로 부스러집니다.
 
성유찬:하늘은 다시 푸르게 변할 거야. 네가 어제 봤던 것처럼.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난 뒤,
 
일 년이 넘고,
 
몇 십 년 더해지게 된다면,
 
당신은 그의 존재가 희미하게만 느껴질 겁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까요.
 
성유찬:그치만 지금 풍경도 나쁘지 않으니까, 이건 기억해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최치승:(발끝에 핏물이 밀려드는 것 같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소금내에 익숙하고도 비릿한 철분냄새가 섞여든다. 착각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무서운 꿈에서 깨어나는 감각과 비슷했다. 심장이 내려앉고, 현실이 몇 초 간 분간이 들지 않는 가물한 상태.) ...최악인데요. (방금 전의 테이프를 지금 당장 돌려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녹음된 것은 정말 파도소리였는지, 누군가의 비명이 섞여들지는 않았는지. 눈 앞의 인영을 바라보면, 공교롭게도 그림자가 져 표정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요? ...왜 그랬어요? 형은 끝까지 속일 수 있잖아요.
 
성유찬:(노을지는 태양이 네 얼굴을 고스란히 비쳐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겁이라도 먹었나? 날 따라 이 바다까지 온 걸 후회하고 있을까? 그런 거라면 실망인데.) ... (최치승은 참 나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붉어지다 못해 아주 새빨갛게 익어버린 하늘을 잠깐 보다가, 다시 네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와 같은, 아무런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넌 알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행동하면 돼. 그게 내 결론이고, 곧 정답이니까.) 속여? 왜? 너 좋으라고? 난 네가 이런 상황까지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뿐이야. 뭐 문제 있어?
 
최치승:(눈을 어지럽히는 새빨간 하늘이 시선을 앗아간다. 네 눈도 꼭 저런 색이었던 것 같은데, 뜨겁게 불타는 노을, 버릇처럼 주먹을 꽉 쥐면 몰리는 피, 토마토맛 아이스크림... 뭐 마지막은 차치하고서라도. 눈에 띄는 만큼 어지러운 색이다.) ...하. 저 좋으라고 한 거잖아요. 살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없고. 약해빠진 새끼가 불쌍해서 붙들어놨다면서, 이제와서 왜요?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망해버린 세상에서 파란 하늘을 절절하게 붙잡을 정도로 미련이 있었는지. 만약 정말 있었다면 무엇 때문이었는지.) 제 무엇을 보고 버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또 뒷걸음질 치면 어디까지 칠 줄 알고. 줬다 뺏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
 
성유찬:... ... (내 판단이 틀렸나? 네가 원하던 세상으로 돌려준다고 하면, 넌 좋다고 뛰어갈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네 태도에 눈썹이 조금 꿈틀거린다. 마음에 안 들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내가 원망스러워? 난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넌 약해빠졌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새끼니까. 아니야? 또 엄살부리려고? (나는 네가 허상을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널 완벽히 이해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최치승이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나 가늠하는 게 재밌었다. 아무리 밟아도 꿈틀대는 지렁이처럼 발버둥치는 저 끈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자꾸만 따지고 드는 게 심기에 거슬리는 것일 테다.) 결론이 뭐야. 너는 허상이 좋냐? 어차피 다 없는 것들이야. 집도, 학교도, 네 친구들도. 줬다가 다시 뺏을 만큼 가치 있는 게 아니라고.
 
최치승:누가 몰라요? 저도 알아요, 이게 적반하장이라는 것쯤은. 저도 웬만해서는 그냥 남이 하라는대로, 등 떠미는대로 돌아가서 모른 척 마음 편히 살고 싶은데, 그게 안돼서요.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바라는게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버티는 것은 분명 가장 잘하는 것일텐데,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신발 밑창에 자잘하게 눌러붙은 모래알이나, 끈적하게 피부에 눌어붙은 소금기 따위의 찝찝함이 남았기 때문인가.) 그래요, 저는 여기가 그렇게 좋은 것도, 뺏기기 싫을 만큼 간절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 왜 진작 그렇게 안 했어요? 그 기회라는 걸 안 준 이유도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에서야 그걸 주기로 한 형의 생각, 뭐 그런게 궁금한 거라고요, 저는.
 
성유찬:그럼 내가 뒤져야 하니까. 됐어? (의외로 명쾌한 답변이 튀어나온다. 네가 살아가는 대신 내가 뒤져야 하는데, 멀쩡하게 만들어놔도 네가 또 멍청하게 군다면 내가 억울하잖아. 그래서 굳이 도박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야, 있잖아, 내가 너였으면 그냥 감사합니다- 넙죽 인사하고 꺼졌을 거야. 이렇게 하나하나 처묻지 않고. (네가 그 다 죽어가는 세계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어찌저찌 빌빌대며 목숨 붙이고 있는 꼴이, 잔뜩 시든 채 곧 뒤져버릴 것 같았던 그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호기심에 시작한 장난이 이렇게까지 돼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최치승:하하, 진짜 뭣 같네...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다 아니어도, 이 생각 하나만큼은 틀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선택에도 완벽한 행복은 뒤따르지 않는다. 이면을 걷어보면 뭔가 구린 게 나오지, 이렇게. 그렇다면, 적어도 선택을 하는 사람만큼은 알아야 되는 게 당연한거 아닌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망각에 의존한다 하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멍청하게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바보가 되기는 싫었다.) ...진짜 안 어울리는 거 알죠. 나는 정말 형이 이해 안 가요. 저는 그렇다 쳐도, 형은 형이 이해가요? (제발 누가 좀 풀어서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저 꼬인 심리를.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널 이해하는 사람 하나쯤 없겠냐 생각했던게 한심해진다. 내가 인간이고, 네가 그 대단하신 신이기 때문인가? 이런 시도는 다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으레 그렇듯, 인간은 신의 의중을 궁금해하기 마련이다.) 죽어도 좋다는 거냐고요.
 
성유찬:예전부터 느꼈는데, 너 진짜 궁금한 거 되게 많네... 언제까지 이렇게 재미없게 굴 거야.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돌리려 하니까 이렇게 삐걱이는 거다. 어쩌다 한 번 맞았을 때는 아마, 서로의 톱니 중 누군가의 이가 하나 빠져버려서 그런 게 아닐까. 어느 한 쪽이 부서져야지만 돌아갈 수 있는 기계라니 참으로 웃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어쩌다 이런 새끼랑 엮여서...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가. 애초에 그럴 시도조차 안 해봤거든. (근데 네까짓 게 그걸 해보겠다고. 최치승은 아무리 밟아도 자꾸만 꿈틀거리고 기어올라, 미치도록 거슬린다. 저 작고 까만 머리통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것 같아 기특하지만, 서로는 결코 서로의 입장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을 테지. 뜨거운 열기에 말라버린 운동화를 모래 바닥에 문질렀다.) 죽는 게 좋든 싫든, 말하면 네가 이해할 수나 있고? 내 판단에 토 달지 마. 내가 스스로 결론 내린 거니까.
 
최치승:... (지랄하네. 이런 걸 재미있어 하는게 아니었나. 우습게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네가 어떤 성격인지는 자신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랬다. 너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결국 귀찮아서라도 어떤 대답을 내주었고,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흥미를 가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해를 하고, 말고는 받아들이는 내 문제죠. 달라지는 게 없다고 해도요. 언제까지 그렇게 벽을 칠 거예요? 지금 형이 하는 선택이 저한테 무슨 말로 들리는지 알기는 해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생각 끝에 답을 내었든, 결국 대신 죽겠다는 거잖아.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이게 얼마나 좆같고 무거운 선택인지, 신들은 그런 거를 모르나? 목숨이 열 개쯤 되는 거면 제발 말해줬으면 좋겠다. 원하는 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미련 없이 가버릴 수 있을 테니.) 제가 감히 토를 어떻게 달아요. 심지어 저 좋은 일인데, 뭐 죽지 말라고 매달리기라도 할까봐요. ......그냥, 알아야 할 자격같은 게 있다면. 누구보다 저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건방지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은요. 또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도 제가 할 거예요.
 
성유찬:(아. 좀. 사람이. 이 새낀 왜 볼 때마다 이렇게 멍청한 짓만 골라서 하는 걸까. 뭐가 문제지? 어디서부터 꼬인 거야? 알아야 할 자격이라니, 그런 게 있겠냐고 너한테. 지친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올렸다. 최치승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그것은, 가끔 나를 신경질나게 만들기도 한다. ...미친 새끼. 정이 많은 건지 아님 멍청한 건지. 혹은 둘 다 해당될지도 모르겠다. 이러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있나.)
너 하나 살리고 내가 뒤져버린다는 게 그렇게 이해가 안 가? 미안한데, 착각하지 마. 난 인간을 살리는 거지 널 살리는 게 아냐. (어떤 인간은 불구덩이에 집어 넣으면 손발이 다 타도 벽으로 기어 올라오고, 바다에 빠트리면 육지까지 헤엄쳐 나온다. 모든 이가 그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 있는 놈은 쉽게 뒤지지 않을 거라는, 몇 날 며칠을 옆에서 지켜보며 느낀 것들이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은 강하다. 결국 무뎌지게 돼 있으며, 그것이 한 발짝 나아가는 동력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내 눈으로 확인한 최치승은 그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넌 그냥 날 재밌게 해준 대가로 선물 하나 받는 거라 생각해. 쉽네.
 
최치승:그런 거면 더 이해 안 가고요. (자신이 본 네 일면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상기하게 된다. 너의 말이 제가 알던 '성유찬'에게서 거리를 벌리면 벌릴수록 생경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살리기 위해 죽는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와, 진짜 신 같은 말을 하네, 빌어먹을. 뭐라고 꼬투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하나로 숭고하고 완전해지는 변명을. 그래서 너에게만은 절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소리를 기어이 한다. 순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것이 진실인지는 모를 일이다.)
...싫어요. 그렇게 하면, 살기 거지같을 때도 꾸역꾸역 살아야 할 것 같아서. 빌어먹을 신의 희생인지, 선물인지... 알게 뭐야. (슬슬 밀려오는 짜증에 고개를 돌린다. 평생 종교라고는 가져본 적도 없는데. 원인 모를 신의 자비에 속이 엉망이 됐다. 하다못해 그때 네 욕이라도 같이 녹음할 걸 그랬지. 그랬으면 너도 기록으로 남았을까? 아, 또 과거를 후회하고 있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으세요. 안 말린다고 했잖아요. 살리고 싶은게 나든, 인간이든... 형 손해에요. 그리고 저는 형이 미련하다고 욕을 박든, 건방지다고 짜증을 내든 잊을 생각은 없어요. 이건 제 손해네요. ...그런 거예요.
 
성유찬:살기 좆같아도 꾸역꾸역 살아야지. 내가 뭐 때문에 널 살리는데? 자꾸 선 넘지 마. (마치 내 판단이 틀렸다는 걸 네가 증명하고 있는 것 같잖아. 내가 선택한 사람이,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로, 행동으로,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좋아해야 할 거 아냐,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고 꺼지라고. 좀. 제발.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미친듯이 솟구쳐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여름이라 그런 거야. 지금이, 여름 그 개같은 계절이라 화가 나는 거다.) ... (가만히 눈을 뜨면 마주치고 있던 시선이 어긋난다. 저 약해빠진 새끼.)
최치승. 나 봐. (한평생 이렇게 무식한 사람은 처음 본다. 근본 없는 생물의 끝이 어떨지 다 알면서, 다시 되돌려 준대도 이딴 태도라니. ...애도 아니고. 돌아가 있는 고개를 손등으로 살짝 끌어 마주보게 돌렸다.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주머니에 꽂는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꿈속에서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준다고. (이 시커먼 놈한테 기회라는 걸 대체 몇 번이나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미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 같은데.) 손해를 보든 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결정해. ...말했잖아. 화 안 낸다고.
 
최치승:...하하, 꾸역꾸역 사는 게 꼴보기 싫다고 해놓고, 선을 제대로 긋지 않은 건 형이에요. (낮게 실소를 흘린다. 어쩌면 최치승은 그냥, 산다는 게 거지같았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망한 세계가 그런 감정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보란듯이 멀쩡한 세계에서도 자신은 이렇게 꾸역꾸역 사는데, 세상이 망했다면 더하면 더했지. 다시 돌아가도 똑같겠지. 이건 진짜 적반하장이긴 한데, 무력감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목숨으로 원래의 삶을 돌려받는다면. 상대가 어떤 빌미를 끌고오든, 무엇을 말하든, 마땅히 감사해야함을 알고있다. 이런 삐딱한 태도로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도.)
(정말 반항할 생각은 없는지, 힘없이 돌려지는 고개는 이내 네 눈을 다시 마주한다. 열여덟의 적은 나이에 마주한 세상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끝내 하기 싫은 선택도 해야만 했다.) ...저도 제 손해 정도는 책임져야죠.
살게요. ...그게 어거지든, 보란 듯이든. 좋든 싫든... 어쨌든 제 인생이잖아요. 미안해요, 형. 그럴듯한 각오의 말 같은 건 생각이 안 나요. (돌고 돌아, 수많은 감정 앞에서 결국 회피가 아니라 직면을 선택한다. 결국 너는 나를 제대로 본 걸까. 보란 듯이 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고 봐도 좋다.)
 
성유찬:(다시금 저를 마주하는 저 또렷한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응시한다. 나약해 보이면서도 그 안에 든 손톱만 한 불씨가 마음에 들었다. 그건 아무리 밟아도 꺼지질 않더라. ...모든 문제가 그렇듯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던 거였으니까.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상황에, 마음에 드는 대답이라, 이 모순된 감정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일전과 같이 감정 없는 낯을 띠었다.) 난 응원 같은 거 안 한다. 뒤지고 싶어도 살아. 선물은 소중히 써야지. (발치에 닿는 바닷물, 발에 밟히는 모래 같은 것들을 힘주어 꾹 밟았다. 이거, 파도 소리, 나도 녹음해둘걸. ... ...쓸데없이 감상이 길다.)
... (기특하다고 해야 돼, 아님 당연하다고 해야 돼? 줄곧 별다른 고민 없이 항상 생각한 대로 내뱉었었는데. 같이 다니다가 무슨 병이라도 옮은 건지 생각이 길어진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숨을 들이켜 공기로 폐를 가득 채우고,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한참 시간이 지났음에도 수평선 너머로 숨지 않는 해는 이 공간이 허상임을 방증한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것 같은데.)
 
안녕을 고합니다.
 
이 여름은 그저 마음속에 박힌 가시로 남겨두고,
 
계속 살아가야죠.
 
 
흐릿해지는 유찬의 신형은 점차 사그라듭니다.
 
그의 말이 맞아요.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고통을 기억 한 구석에 넣어놓기 때문에
 
금세 잊어버릴 것이 분명해요.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멸망한 세상도,
 
언젠가의 꿈이나 환상이 되어 잊혀질 겁니다.
 
당신은,
 
다시금 한 걸음을 걷기 위해 고개를 들겠죠.
 
붉어졌던, 저편이 검게 변했던 잿빛이 더해진 짙붉은 세상은
 
유찬의 발끝에서부터 점차 정화되기 시작합니다.
 
먹먹한 하늘은 청량하게 변하고,
 
먹구름이 끼었던 것 같은 수평선 너머는 맑게 일변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이윽고 교복을 벗었습니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 이 정화한 세상을 살아가요.
 
당시 혼란을 겪었고, 많은 것을 잃었던 이들은
 
회복된 지구에 금세 적응하여 나름의 삶을 지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강하니까요.
 
나름의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당신은 자신의 방에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나요?
 
그가 건넸던 워크맨과 테이프 말이에요.
 
틀어보면, 시간이 오래된 탓에 잡음이 섞여 들려옵니다.
 
귓가를 때리는 시원한 파도소리가 흘러나오고,
 
잠시 정적이 일면,
 
▦▦▦ 의 목소리가 함께 끼워집니다.
 
 
 
 
"..."
 

핸드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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