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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겨울의 뉘앙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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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뉘앙스
Writter. 얌 CM | Design. 열 CM
진단은 차가웠다. 깔끔하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보운은 제 상태를 공들여 설명하는 의사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도록 굳건히 고정한 오른손을 침대 난간에 올린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앞으로 어떤 식의 재활이 이어질 것인지, 어떻게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지루하게 설명하던 의사가 침묵했을 때조차도 그랬다. 보운은 붉게 변한 이파리가 가을바람에 창문을 툭툭 건드리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음은 파동이다. 저런 떨림은 음악의 시각화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생각은 선율처럼 이어졌다. 왼손은 마치 낮은 음의 건반을 누르듯이 까닥거렸다. 보운은 의사가 제 손, 정확하게는 오른손과 대비되게 살아 움직이는 왼손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실 이 병실을 찾은 누구나 그런 식으로 보운을 대했으니까. 병원 생활은 보운이 평생을 기대하던 정적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었다. 작고 일정한 기계음을 제외한다면 대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문도 다인실보다 두꺼워 바깥의 소리가 넘어오지 못했다. 혼자 쓰기에는 확실히 호화로운 병실이었다. 손을 다친 일로 사용하기에는 과분했다. 하지만 보운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고에 통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최고를 누리게 해주었다. 보운은 자신이 홀로 앉아 보내는 하루마다 말도 안 되는 거금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참을 수 있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모여 있는 듯한 병실에 앉아서 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하루에 한 번 오전 회진을 도는 의사는 보운의 회복이 무척이나 빠르다고 칭찬을 일삼았으나, 들이는 돈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결과라는 사실을…… 보운은 알았다. 그래서 증오스러웠다. 적어도 그 돈이었으면 새로 손을 돋아나게라도 했어야지. 어린애처럼 굴지 마. 보운은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면 끊임없이 되뇌었다. 자주 씨근덕거리고 오래 분노하는 사이사이를 진정시킬 문장이 필요했다. 사고라는 부조리에 대한 절망과는 결이 달랐다. 보운이 정말로 견딜 수 없는 것은…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씨발… 내 평생이 여기 있었어!”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올라온 빼곡한 계단이 한 번에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보운의 절규는 금세 고통에 뒤덮여 흔적조차 없었다. 닫힌 문은 굳건했으며 그는 오로지 혼자였다. 아주 잠깐. 잠깐만 더 견디면 모든 게 보장된 삶이었다. 그가 커다란 홀에서 연주하게 될 날로부터 불과 두세 달 남짓한 시간만이……. “조금만 더 하면 됐었는데, 조금만 더…….” 보운이 상체를 풀썩 숙였다. 고급스러운 일인실의 침대 시트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이라던가, 향긋했으나 고통스러웠다. 아름다움이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이 보운을 조롱하는 듯했다. 괴롭게 만들었다. “조금 더 손가락을 굴리듯이…….” 우아한 보운의 은사, 미경은 아직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보운이 그녀를 보면 길길이 날뛰리라고 판단한 것일 테다……. 보운의 부모님, 친인척,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전부 보운을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 보운은 미경을 볼 수 없었다. 볼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을 보여서 뭘 하겠는가? 이제 그녀가 늘 요구하던 것처럼 손가락을 굴리듯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공고히 해 봤자 무엇이 남지? 보운은 왼손으로 시트를 쥐어뜯으며 끙끙거리다 온몸에 힘을 쭉 빼냈다. 그 짧은 움직임으로도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절었다. 또 곳곳이 아팠다. 사고는 한곳만을 예리하게 노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가장 심하게 다친 건 분명 오른손이었지만, 보운의 몸 곳곳에는 울혈과 상처, 그리고 고통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보운은 오래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더 나빠질 거야. 사람들은 입을 모아 조언했다. 뭘 안다고?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니 끔찍한 저주가 아닐 수 없었다. 보운은 늘어져 누워 깨끗한 흰 천장을 바라보았다. 격자무늬가 그려진 천장은 무심했다. 의사의 진단처럼, 미경을 막아섰을 사람들의 말처럼, 보운에게 내려진 재앙처럼…. 참을 수 없어 짓눌러 밟듯 눈을 감으면 코끝이 매웠다. 사람들은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가장 절실히 깨닫는다고들 하던데, 바로 그 꼴이었다.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보운이 중얼거렸다. 쇳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가 힘없이 입꼬리 옆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눈꺼풀의 뒷면은 너무 검었다. 저를 향해 번쩍이던 한 쌍의 헤드라이트, 귀를 찢어놓는 브레이크 소리, 아스팔트와 마찰한 타이어에서 피어오르는 탄 고무 냄새…… ……. 보운의 기억 속에서 사고 현장은 점점 더 과장되고 기괴하게 뒤틀렸다. 보운은 차량의 블랙박스를 확인한 적 없었다. 그게 정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니 진위를 가릴 수는 없었지만, 분명 거듭할수록 악랄해지는 검정과 비명이 있었다. “안 돼.” 보운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고통 외에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몸을 움직여보려고 노력했다. “안 되는데….” 오른쪽 팔이 뜨거웠던 그때…… ……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오른손이 상아 건반 위를 노니는 일은 없으리라. 영원히.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 보운은 긴 꿈을 꾸었다. 콘서트홀이었다. 관객이 많았고, 개중에는 낯이 익은 얼굴이 절반이었다. 눈앞에 놓인 악보는 보운이 사고 직전까지 지문이 다 닳도록 연습했던 라벨의 곡이었다. 라 발스, 보운은 그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발을 구르듯이, 조용하지만 소란스럽게, 끊임없는 춤을 추도록 운명에 종용당하는 한 명의 무용수를 떠올린다…… ……. 숨을 짧게 삼키며 두 손을 건반 위로 올리면 모두가 숨을 죽였다. 무대 위 선명하고 밝은 빛이 닿은 이마가 따가웠다. 내도록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긴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시작할 땐 언제나 너만의 박자를 가지고 들어가면 돼.” 미경이 했던 말을, 보운은 기억했다. 자신의 어깨에 부드럽게 얹혔던 섬세한 손가락의 감촉 또한. 그녀는 보운을 성심으로 가르쳤다. 보운이 한 손에 꼽을 나이일 적부터 미경이 있었다. 그녀는 한때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였고, 성악을 겸하기도 했으며, 짧게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력이 있었다. 보운의 아버지는 재학 중의 기억을 더듬어 미경을 찾았다. 미경은 아버지에게 음악의 힘을 일깨워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노래하고 건반을 두드리는 힘에 아버지는 매료되었다. 나이가 더 들어서는, 사소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은혜를 갚는 것에 후했다. 처음 미경은 이제 자신보다 훨씬 유명해진 음악가이자 과거의 제자였던 이의 부탁을 거절했다. 음악의 불꽃은 언제고 타오를 것이었으며 저는 그저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을 뿐이었다는 게 요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제 과거에 살아 숨 쉬는 아름다움을 보운에게 이식하려고 했다. 보운은 그것이 끔찍하다고 여기는 한편 순응했다. 미경은 실제로 좋은 선생님이었다. 마지못해 액수를 절반으로 깎고서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미경은, 보운을 정말로 좋아했다. 언젠가 그녀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학교에서의 기억은 좋게 남아 있었지만, 제 아래 두고 영영 키울 아이를 만드는 건 어쩐지 두렵게 느껴진다고. “그러니 네가 내 아이 같기만 하다.” 미경의 음색은 언제나 깨끗했고, 가장 진실한 선율 같았고, 다정했다. 보운은 고백하건대 그녀에게서 종종 부모의 정을 느꼈다. 언제나 바쁜 두 사람을 대신해서 그녀에게 얻는 것이 많았다. 간섭하지 않는 부모와 적절히 대응할 줄 아는 선생의 화음이 절묘했다. “어린애들은 참 섬세하지.” 미경은 조금의 교정만으로도 나날이 실력이 늘어나는 보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널 볼 때마다 느껴.” 그럼 보운은 의기양양하게 입을 비죽이며 준비 자세를 취했다. 미경의 따스한 눈길을 받고 하나, 둘, 셋… 속으로 저만의 박자를 헤아렸다. 손가락이 건반을 깊고 강하게 누르면 첫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나이를 좀 더 먹어가면서는 실수를 하는 법이 잘 없었다. 오로지 소리, 제가 만들어 내는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보운을 기쁘게 했다. 몇백 년이나 흘러 보운에게 날아온 악보가 가슴을 치고, 난해함에 도저히 풀리지 않는 부분을 두며 서러운 적도 더러 있었지만, 보운은 분명히 기뻤다. 바이올린을 들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레슨을 진행하는 선생은 미경만큼은 되지 못했다. 보운은 분명히 피아노를 사랑했다. 그가 사랑하는 만큼 돌려주는 음악의 뜰에 안겨 평생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이미 완공이 끝난 철로라고 봐도 좋았다. 좋았는데……. 꿈속에서, 보운은 손가락을 구부리지 못했다. 손이 납처럼 무거웠다. 첫 음은 고사하고 악보가 새하얗게 바래갔다. 연주가 시작되지 않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소란스러운, 그리고 마음을 두렵게 만드는 웅성거림이 보운을 향해 달려왔다. 보운이 딱딱하게 굳은 고개를 돌려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연미복이 무척이나 답답했다. 그때에서야 해일 같은 소리의 재앙이 코앞까지 다가온 게 보였다. 보였다고? 보운이 눈을 뜨자 비명과 같은 울음이 귀를 뚫고 들어왔다. 어머니의 것이다. 보운은 몽롱한 정신으로도 그것을 깨달았다. 온몸이 아팠다. 눈으로 퍼부어지는 빛이 힘겨웠다. 삑삑, 삑, 삑…… 하는 소리가 울음과 소란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보운은 단단히 손을 고정한 깁스 안에서 무거운 오른손을 움찔거렸다. 그의 왼손은 시트 위를 구겨가며 더듬거리고 있었다. 라 발스의 시작을 알리는 묵직하고 두려운 소리의 건반을 두드리기 위해 손가락을 구부리고 손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음악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저 소란스러운, 보운의 평생을 괴롭게 한 요란함만이 가득했다. 시야로 어머니의 우는 얼굴이 불쑥 들이닥쳤다. 보운은 입안으로 넘어오는 절망의 쓴맛을 받아 삼켰다. 그리고는 모두가 다 아는 것과 같이, 보운은 입원했다. 다시는 어떤 악기도 연주할 수 없을 만큼 손상된 신경과 근육 조직, 재활을 거쳐도 완전한 원복이 어려울 만큼 엉망인 오른손……. 사형선고였다. 단 몇 달 만을 남기고 목을 내리치는 칼날이 매서웠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보운은 생각했으나 답이 되돌아오는 법은 없었다. 그의 몸 상태와는 무관하게도 시간은 흘러갔다……. 빨갛게 익었던 나뭇잎이 간신히 가지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계절이었다. 늦가을은 아주 짧았다. 금세 써늘함이 거리를 얼렸다. 보운이 창문으로 내다보는 거리에 슬슬 질릴 무렵 퇴원 허가가 떨어졌다. “자택에서 안정을 취해도 좋습니다.” 의사는 이제 보운을 바라보지 않았다. 차트에 시선을 박은 채 단조로운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보운의 배경이 의사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의사는 어린 사내가 아니라 한 사람의 거장을 대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했다. 사무적이었지만 경외나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찌나 입김이 거셌던 건지. 보운은 비아냥거리고 조소하고 싶은 심정을 억눌렀다. 그의 퇴원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집은 보운이 사고 당일 나섰던 모습과 완벽하게 똑같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보운은 약간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방에 틀어박혔다. 한발도 나가지 않겠다는 의견을 전달했을 때, 그의 부모는 의견을 수용하여 몸을 돌렸다. 그를 성가시게 하는 건 이제 없었다. 병실에서보다 더 짙고 깊은 고요가 그를 에워싸고 무겁게 짓눌렀다. 보운은 병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주 누워 지냈다. 그러면서도 긴장을 놓지 못해 몸은 늘 뻣뻣했다. 편안한 공간이랍시고 귓가에 익숙한 선율이 들려올 때가 있었다. 그러면 불에 덴 듯이 일어나 방의 모든 물건을 던지고 휘둘러야만 끝낼 수 있었다. 기진맥진하여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난동을 부려야만 했다. 손이 더 나빠지면 어쩌려고,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하는 우려는 날아오지 않았다. 보운은 이미 이 집에서 특별 대우 그 이상을 받는 중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그 자신을 해치는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보운은 그것을 무기로 모든 걸 적대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이따금 집의 일을 돌보는 직원들이 문을 두드리고 식사를 넣어줄 때, 어지러운 방을 치워줄 때, 그리고 바깥의 일을 조금씩 전달해줄 때만 문이 열렸다. 누구도 보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시끄러웠다! 이렇게 고요한 방이…… 시끄러웠다. 한때는 세상의 온갖 클래식이 흘러나오던 그 방이, 어떤 테이프도 돌아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시끄러웠다……. 소란은 보운의 몸속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우글거리는 검은 음표가 가득했다. 머리는 터질 것 같았고 가슴은 뜨겁게 답답했다. 악을 지르고 발버둥을 쳐도 소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제발! 보운은 가슴과 목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를 추적하는 소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진땀을 뺐다. 또 가구가 부서지고,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파편이 바닥을 어지럽혔다. 벗어나고 싶었으나 벗어날 수 없다. 이 네모난 공간 안에서 보운은 무력했다. 어떤 식으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보운은 여전히 소음 속에 있었다. 그는 등을 아프게 누르는 잡동사니 위에 누워 수술 흉터가 얽히고설킨 손을 들었다. 새로 돋아난 살갗이 주변보다 약간 밝은 빛으로 반들거렸다. “하하…… 씨발, 씨발…….” 흔히들 욕설이 고통을 상쇄한다고 하는데, 효력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심장이 꽉 죄는 것처럼 아파 왔다. 보운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몇 번이나 흔들었다. 땀으로 흥건한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났다. 몸이 더웠다. 끓고 있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어서 눈꺼풀을 열면, 달라진 몸의 방향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책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 …….” 책상 위에는 호로비츠의 얼굴이 찍힌 음반이 세워져 있었다. 애수와 부드러움, 그리고 세월을 담은 거장의 눈이 늘어진 보운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몇 번의 격정과 히스테리를 겪고도 보운이 건드리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정훈과 함께 부평 시내에 나갔을 때 구매했던 음반들 중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운은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트로이메라이를 사랑했다. 보운이 아직 어렸을 시절, 지금은 산산이 조각났지만, 침대맡을 지키던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바로 그것이었다. 흰 말이 위로 아래로 떠다니듯 움직이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선율이 흘러나온다. 잔뜩 기분이 나쁘다가도 트로이메라이를 들으면 한결 나아졌다. 그중에서도 호로비츠는 제일이었다. 깊은 아픔과 단절을 겪었던 사람만이 연주할 수 있는 트로이메라이였다. 꿈을 너무 그려서, 이 세상이 꿈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그 연주가…… ……. 가슴을 영롱하게 두드리는 꿈결 같은 선율을 들을 때면, 낯부끄럽지만, 정훈을 떠올리기도 했다. 보운에게 처음 통한다는 마음을 준 이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닐는지도 몰랐다. 정훈이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의기양양해질 테니, 보운은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다만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각자의 심상에 잠길 적에 은근슬쩍 틀어나 보곤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데, 조금 슬프네?” 정훈은 그렇게 말했었다. 음악실에서였다. “내내 헛돌던 페달을 딱 처음 밟았을 때가 기억나.” 정훈의 손이 은근슬쩍 보운의 어깨를 감싸고 건드리는 것이 간지러웠다. “봄이었고, 어떤 큰 공원이었는데, 계속 실패했거든?” 가벼운 말투와는 다르게 따뜻한 과거의 즐거움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보운은 한쪽으로는 트로이메라이를, 다른 한쪽으로는 정훈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전거 타는 걸 말야.” 정훈의 입술 사이에서 말과 함께 새어 나오는 숨이 달았다. “근데 막상 딱 처음 성공한 순간에, 내가 아주 어렸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어. 벅찬 것도 슬픈 일도 아니었는데. 너무 염원하던 걸 이루어서였을까. 혹은 길게 꿨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 아쉬워서였을까. 다시는 그렇게 자전거 페달 밟기를 염원할 수 없어졌다는 걸 그때 알았을까.” 그야말로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2학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 장면은, 음악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눈 쌓인 나뭇가지와 겹쳐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웠다. 겨울의 은근하고 섬세한 분위기가 서려 있는 그 장면. 넌 정말 특별해. 보운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정훈의 어깨에 옆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었다. 차갑게 식은 깨끗한 겨울의 냄새가 맡아졌다. 정훈은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어깨가 그의 일정한 호흡으로 떠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보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아름다운 걸 두고 온 미래에서, 저 자신의 꼴이 너무도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정훈이 집까지 몇 번이나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보운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모든 만남을 차단한 건 보운의 판단이었다. “만나고 싶지 않아요.” 사납게 말하며 문을 열어줄 생각도 하지 않으니 입주 가정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정훈을 돌려보냈으리라. 정훈은 높고 철저한 정문조차 넘지 못한 채로 몸을 돌렸겠지. 보운이 퇴원하기 무섭게 세 번이나 방문했으나 보운은 완고했다. 그의 사랑하는 반려견 두 마리조차 넘지 못한 턱이었으므로 어찌 보면 지당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운은 문득 그가 그리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날 들었던 트로이메라이를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사고 이후로 모든 아름다움은 역겨웠지만, 그것이라면 조금쯤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닥에 딱 달라붙은 오른팔이 움찔거렸다. 약간 아렸고,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보운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백 번을 읽었던 악보의 첫마디가 희게 바래있었다. 다만 정훈과 함께했던 시간이 조각나 머릿속을 둥둥 떠돌았다. 그 또한 그런 기억으로 하여금 이곳까지 찾아왔으리라. 보운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이고 거듭……. 보운이 다시금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런 꼴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코끝이 차갑게 식었다. 물보다 정결한 얼음, 눈 쌓인 나뭇가지의 냄새가 훅 끼쳤다. 히터를 틀지 않아 손이 딱딱하게 얼어서 칠 수 없었던 그날 음악실의 피아노……. 덮개조차 열어보지 않았던 것이 후회됐다. 만약 그때 정훈에게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해줬더라면. 보운이 숨을 길게, 폐가 아주 납작해질 때까지 내뱉었다. 그러고 나니 언뜻 기억이 돌아왔다. 맑은 도, 꿈꾸듯 몽롱하면서도 명확하게, 트로이메라이의 첫 음이었다. 보운은 이후로도 자주 물건을 망가뜨렸다. 펄펄 뛰는 열기가 그를 괴롭혔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시간은 이상하게 어그러진 꼴이었다. 도대체가 며칠이 지났는지 알기 어려웠다. 감히 그의 시간 개념에 훈수를 둘 수 있는 이는 집안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보운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사고 전에는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몸의 둔함이 어느 사이엔가 그의 발목에 매달려 있었다. 이것은 가사인가? 일종의 죽음인가? 짧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보운은 어느 아침 창문을 열었다. 한바탕 물건을 내던진 뒤였다. 열과 탈력감이 그의 몸을 장악해서, 무언가 전환이 필요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뜨거운 소란이 그의 몸속에 여전했다. 내보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보운은 두꺼운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이제 완전히 차가워진 바람이 아주 빠르게 방으로 들이닥쳤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정원과 그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 두어 명의 정수리가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고부터는 바깥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더니, 멀쩡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낯설었다. 암막 커튼으로 굳건히 가려져 있던 세계는 보운이 예상했던 것보다 깨끗하고…… ……. 아름다웠다. “빌어먹을.” 보운이 고개를 떨구었다. 찬바람이 그의 뺨을 마구잡이로 내려쳤다. 분명히 붉어졌을 것이다. 창문틀을 짚은 오른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몸은 빠르게 차가워졌다. 한기가 돌자 잊고 있었던 몸의 통각이 깨어났다. 부들거리며 신음하던 보운이 다시금 창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창밖에서…… 점차 저택을 향해 가까워지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층에서 강아지 두 마리가 교차하여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훈이었다. 내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 애의 머리꼭지가 똑바로 보였다. 추위에 제 팔과 뺨을 연신 문지르던 정훈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철제 현관 너머로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보운은 죄인처럼 몸을 빠르게 돌리고 창문을 닫았다. 숨이 가빴다. 그래, 이럴 것을 알아서 거절했던 것이다. 정훈은 그대로 초인종을 눌렀다. 입주 가정부가 그 소식을 전달하기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보운은 비틀거리며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예민하고, 사고 전보다는 훨씬 마른…… 음울과 불행, 그리고 고통으로 얼룩진 여보운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 꼴로 만나는 게 옳은가? 그를 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건데? 여러 생각이 사방에서 휘몰아쳤지만, 책상 위에는 여전히 호로비츠의 앨범이 올라와 있었다. 보운은 바지 주머니 안으로 오른손을 밀어 넣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 보운의 허락이 감격스러운 듯이, 문이 열리기 무섭게 입주 가정부의 낯이 보였다. 그녀는 옆으로 천천히 비켜서고는 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보운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정훈이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웅얼거렸다. 그에게서 냄새가 났다. 청아한 겨울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다시 들끓는 보운과는 전혀 다른 그 냄새. 완전한 착각이었다. 괜히 그를 불렀다. 아무리 그립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냥 흔들린 것이다, 새 공기를 좀 맡았다고 우쭐해져선……. 보운이 주먹을 쥐었다. 아직 엉성하게 근육이 붙어 떨림이 뒤따랐다. 힘을 세게 주기도 어려웠다. 후회가 휘몰아쳤다. “얼굴 좀 보여줘라.” 정훈이 낮게 말했다. 걱정이 서린 음성이었다. 바닥으로 기어 묵직한 보운의 발목을 쓰다듬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러나 보운은 분노했다. 감히! 그런 생각만이 번뜩 뛰었다. 차라리 정훈이 잘하던 농담이나, 실없는 장난을 걸어왔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구제 불능, 불통의, 불치의 환자를 대하듯 저 말도 안 되는 목소리를 듣지는 않았을 텐데! 적어도……. “좆 까.” 보운이 빈정거렸다. 자로 잰 듯 정확한 비난이었다. “그냥 나가라… 널 부른 게 실수였어.” 보운은 어느새 다시 헐떡거리고 있었다. 정훈의 낯이 굳었다. 그는 방안에 도사린 이상한 훈기, 아니 열기라고 부를 수 있는 온도에 당황한 차였다. 보운은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나 더운데……. 아까 정문에서 본 인영은 착각이었나. 창문을 열어뒀을 리가 없나. 들어서기 전 가정부가 해줬던 주의 사항을, 정훈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많이 힘든 상태라는 말. 정훈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이상했다. 전혀 보운 같지 않았다. 화가 나고, 분노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보운답지 않은 분노였다. 보운의 분노가 아니었다. 보운이라면 운명에 삿대질을 해서라도 흐름을 제 쪽으로 끌고 왔을 터…… ……. “뭐 하는 거야.” 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보운은 환자였다. 언성을 높이면 전부 끝이다. 정훈은 울컥울컥 치솟는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너 이러는 거 마음에 안 든다, 여보운.” 입꼬리가 버르르 떨렸다. “네가 마음에 안 들면, 뭐.” 보운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은 손 잘 움직여요, 응 괜찮아, 그렇게 해줘야 해? 내가 왜? 좀 꺼지라고….” 몸을 벌떡 일으킨 보운이 정훈을 노려보았다. 참아야 해. 정훈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옴폭 들어간 보운의 뺨을 보는 순간…… 속절없이 마음이 무너졌다. 눈 밑의 희미한 그늘도, 메말라 갈라진 입술도…… ……. “진짜 지랄 좀 그만해. 너 이러는 거…….” 안 돼, 안 된다. 정훈은 알았다. 이건 멈추는 게 맞았다. 하지만…… 혀끝에 대롱거리는 문장에는 날이 서려 있었다. “존나 병신 같거든?” 당연하게도 정적이었다. 보운에게는 소란이었다. 보운이 고개를 들었다. 정훈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금색 눈동자가 살짝 젖어 있었다. 눈물이 아니었다. 그건……. “그래, 나 졸라, 병신이야.” 보운이 주머니에 꽂혀있던 손을 빼 들었다. 이리저리 얽힌 흉터가 가득한 오른손이 무력하게 흔들렸다. 손의 진동, 보운으로선 주체할 수 없는 그 떨림이 훤히 보였다. “어쩔래, 이 씨발놈아, 어?” 보운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어쩔 거냐고.” 딱딱하게 얼어 굳은 정훈에 대고 쉼 없이 매서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차피 병신이라고 해 봤자 네가 뭔 상관인진 모르겠지만, 걱정인지 동정인지 모를 것 좀 그만해. 역겨우니까.” 보운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퇴할 거고 음악도 관둘 거야. 됐어? 어떻게 살 건지 더 말해줄까? 그래 내 인생 망했어. 아무것도 못 해, 이딴 손으론…….” 정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혼란스러웠다. 정말이지, 제가 생각한 보운의 모습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아서……. “후회.” 정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혀끝을 씹어 진정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려웠다. “안 하겠냐.” 보운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이 크게 열린 채로 정훈을 바라보는 그는 일종의…… 정물화 같았다. 사고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멈춘 주인공. 정훈은 제가 이런 말을 건넬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보운의 아픔은 보운만이 알았다. 하지만 그를 그냥 이렇게 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정훈은, 정훈은…… ……. “왜 안 하겠어.” 보운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는 곧, 버릇처럼, 자신의 망가진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그때 뒤졌어야 했는데. 왜 꾸역꾸역 살아서 이딴 꼴을 보지? 졸라, 좆같네 진짜… 하지, 후회, 이런 대답 바라고 한 말 맞지?” 적어도 보운은 그렇게 말해선 안 됐다. 정훈은 무언가 크게 어긋나 걷잡을 수 없는 서로의 방향으로 내달리는 감정을 추슬러 잡을 수 없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모든 걸 포기한 채로 자조에 가까운 말만을 쏟아내는, 그러면서도 정훈마저 상처 입히고자 안간힘을 쓰는 그가 미웠다.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정훈이 손을 든 것은 그 까닭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서글픔이 손목에 힘을 주게 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보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얼음의 차가움이었다. 아프고 뜨거운 감각은 없었다. 보운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경험에 휘청거렸다. 정훈의 손이 겨울의 비수를 내리꽂았다. 후회, 라는 단어가 입안에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날 이 지경으로 내몬 건 너잖아. 보운의 합리화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불안정하고 상처받은 날 몰아세운 게 바로 너잖아…… ……. 보운이 뺨을 짚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병신이라고 생각하니까 막 대하기도 쉬워?” 떨리는 속눈썹이 선명하게 보였다. 제가 들은 말을 의심하듯 눈을 찌푸린 정훈이 보운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너…….” 입술이 진동했다. 혀끝이 쓰고, 목울대가 아팠다. 보고 싶었어. 그런 말을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훈은 후회했다. “차라리…….” 그러나 후회를 발산하는 방법을 몰랐다. 보운만큼이나 정훈도 어렸고, 닳은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저…… ……. “내가 다치는 게 나았겠다, 네 꼬라지 보아하니.” 주체하지 못한 말만을 쏟아낼 뿐이다. 보운이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의 등은 위태로워 보였다. 떨고 있었다. 머리를 빙글빙글 돌게 하는 감정이 뭔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정훈은 그를 잡아야 했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손을 든 것도, 잘못된 말을 선택한 것도 전부 사과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네가 뭔데?” 그러나 보운이 빨랐다. 그는 방금까지 제가 앉아 있던 침대 옆의 책상을 걷어차더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뭔데!” 방 밖에서 강아지가 짖었다. 주인의 불안정과 고함에 반응한 것이었다. 가정부가 놀라 뛰어 들어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이 빠진 정훈을 이끌어 방 밖으로 내보낸 가정부가 몸을 덜덜 떨었다. 다시 닫히는 문틈으로 보운이 두 손에 고개를 묻은 것이 보였다. 그의 옆으로 놓인 책상과, 어렴풋이 기억날 듯 말 듯 한 검은 앨범까지…… 순간이었지만 모든 게 선명했다. “이, 이제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가정부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누구보다 제 도련님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에서야 머리가 차게 식었다. 정훈은 보운처럼, 보운이 했던 것처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다 자란 티가 나는 큼직한 손이 있었다. 종이에 베였던 흉터가 엄지 바깥면을 따라 희미하게 남아 반짝거렸지만, 견고하고 완전해 보였다. “…… 죄송합니다.” 제 발목과 종아리에 비비는 커다란 강아지를 밀어낸 정훈은 비틀거리며 집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더 있었다간 까무러쳤을 것이다. 정훈은 도망쳤다. 차가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가 막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보운처럼, 그는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마와 뺨에 차가움이 차례로 내려앉았다. 흰 입김이 짙게 내뱉어졌다. 손등으로 광대 위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면, 먹먹한 회색빛의 하늘과 춤추듯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보였다. “…… …….” 정훈의 입이 달싹거렸다. 그는 때아닌 겨울의 한가운데, 슬픔을 느꼈다. 격정과 분노가 아니라 순수한 슬픔만을 느꼈다. 눈을 찌푸리듯 감으면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차가운 바람이 그의 등을 마구잡이로 떠밀었다. 정훈은 비틀거리며 회색 거리를 걸었다. 감히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울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닌데.” 그런 중얼거림은 입김과 함께, 금방 사라져버렸다. 정훈은 자신이 왜 보운을 찾았어야 했는지를 알았다. 언어화하지 못했던 감정이 그의 안에서 차갑고 투명한 얼음판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전부 비치는 너머에는 보운이 서 있었다. 정훈은 헐떡거리며 보운의 열기를 떠올렸다. 식혀주었어야 했는데. 혼란스럽고 힘들었을 텐데. 누구보다 무서운 게 바로 저 자신이었을 텐데. 나는 왜 그랬어야만 했나. 그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보운을 너무 위했기 때문이었다. 보운을 너무 선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운의 곁에서 누릴 수 있었던 아름다운 정적이 흔적조차 남지 않았음이 두려웠던 탓이었다…… ……. 보운을 도망치듯 떠나온 정훈은 확신에 한참을 앓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익숙해졌다. 어떤 사이는 그렇게 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마냥 같을 수는 없다. 게다가 보운은 사고를 겪었잖은가. 그것을 기점으로 둘 사이에는 넓고 거대한 강이 흐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훈이 해야 할 일은 보운을 잡아다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더는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잘못된 일이다. 그렇게 이 주가 지났을 무렵, 몸도 마음도 어느 정도 회복된 정훈은 보운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안부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아우르며 시도 때도 없는 메시지를 날렸다. 보운에게서 답장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정훈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런 방식으로 관계를 절단하지 않는 방향으로 걷는 것이었다. 느리지만 어떻게라도 가닿는다면 충분했다. “내가 존나 싫어했던 애들이 하는 짓이랑 다를 게 뭔지.” 정훈은 이제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학우들을 생각하다 자조했다. 이제야 그들의 마음을 조금쯤은 알 것 같았다. 그들도 간절했을 것이다. 일방적인 단절이라거나, 상황으로 인한 파투를 원하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정훈은 한숨과 같은 웃음을 자주 지었다. 보운이 학교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확인했으나 늘 보운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정훈은 교정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고, 내기한 농구 경기의 결과를 보내기도 했다. 원하던 대학의 합격 통지를 받은 날만 제외하고 단방향의 연락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생각 속의 보운은 점차 선명해졌다. 꼬박 두 달을 그리고 써냈으니 당연한 일일는지도 몰랐다. 조금씩 풀어지던 보운의 표정부터 시작해서 둘이서만 구축했던 시간,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던 모습까지…… ……. 어김없이 끝에 가선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보운과의 시간이었다. 정훈은 이를 놓을 수 없었다. 놓을 생각이 없었다. “괜찮아.” 그런 말을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겨울이 절정을 향해 깊어지는 때였다. 성인이라는 타이틀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고작 몇 주가 더 흘렀을 뿐인데,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부쩍 늘어나 정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처음 입에 대 본 술은 솔직히 웃겼다. 어른들이 생명수라도 되는 듯 찾는 이유도 모르겠거니와 돈이 새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불러대는 아이들의 연락을 모두 쳐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반쯤은 정훈도 즐기고 있었다. 또, 혼자 있다 보면 자연히 보운의 생각으로 빠지기 마련이었으니 차라리 더 나은 방향일는지도 몰랐다. 술잔을 기울이는 날로 겨울이 채워지고 있었다. 문득, 곱창과 소주를 처음 함께 먹고 마신 날, 1월의 마지막 날…… 불콰한 얼굴과 뜨거운 속을 하고 거리로 나선 정훈이 생각했다. 머리가 아팠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종종걸음으로 조심히 그를 지나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이마를 짚어도 좀처럼 열이 가시지 않았다. 눈앞이 핑핑 도는 게 바람을 조금 맞아야 할 것 같았다. “너도 이랬냐.” 정훈이 중얼거렸다. 숨에서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온통 어지럽고, 소란스럽고, 뜨겁다. 그날 보운도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왜인지 과장되게 행동할 수밖에 없어서…… 매스껍고 힘들어서, 차가운 벼락이라도 맞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모든 게 멈출 수 있도록. 정훈은 찝찝한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가 내도록 보운을 생각했다. 새로이 구워지는 곱창도 미지근해진 소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정훈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시큰둥한 대답 밖에는 나오는 게 없었다. “얘 왜 이래 또?” 민성이 상기된 얼굴로 낄낄거렸다. 정훈의 어깨를 툭 치자, 여기저기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아 씁…… 나 신경 끄고 마시기들이나 하셔.” 그 관심들을 돌리고자 정훈이 술잔을 들었다. 너도 나도 정훈을 따라 잔을 기울이는 사이, 정훈은 거의 비우지 않은 잔을 내려두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반쯤은 충동이었고 나머지는 호소였다. 성인으로 누릴 수 있는 건 전부 해보는 이 겨울의 밤, 역시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는 보운에게 서운함을 느껴서…… ……. 그러면서도 너를 이해해버렸노라고, 그리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닿지 않을 테지만. 정훈은 그새 다른 이야기로 빠진 아이들에게 웃어주며 단축번호를 꾹 눌렀다. 열한 자리 숫자가 빠르게 찍히더니 금방 발신으로 이어졌다. 소란이 밀려간다. 아득한 저편으로. 정훈은 어딘가 기묘하게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에 감겼다. 무미건조한 발신음이 이어지는 와중 술기운이 어른어른 올라왔다. 받지 않을 것이다. 그냥 감정에 들떠 전화한 꼴이 되겠지. 하지만 여태 문자로만 전했던 진심이 조금 다르게 다가가지는 않을까. 부재중 전화라는 묘한 흔적이 보운을 뒤흔들지는 않을까. 정훈은 한쪽 귀에 휴대전화를 댄 채 벽 쪽으로 몸을 돌리듯 기댔다. 받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실망하거나 상처받지 않으리라. 그냥…… …….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신음이 끊겼다. 정훈이 화들짝 놀라 화면을 확인했다. 또렷하게 시간이 서서히 올라가는 게 보였다. 오 초, 육 초, 칠 초……. 받았다. 받은 것이다. 보운은 언제나 정훈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고는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훈은 뒷덜미를 붙들려 잡히는 섬찟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주변의 흐름이 영화처럼 아주 느려지는 경험이 이어졌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정훈이 다시 조심스럽게 귀에 휴대전화를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끊기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정훈에게 무엇보다도 큰 위안을 주었다…… ……. 용서를 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정훈은 두서없는 말을 시작했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이유를 설명하는 말로 시작된 꼬리를 무는 문장들. 아마 보운은 눈치챘을 것이다. 정훈이 약간 취했다는 사실도, 무엇을 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었는지까지도. 정훈은 점점 다급해졌다. “너랑도 술 마시면 좋을 것 같은데.” 깜빡, 무거운 눈꺼풀을 움직이면 뺨이 뜨거웠다. 손끝으로 훑어보면 눈물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리고…… …….” 혀끝이 따끔거렸다. “미안해, 그때.” 정훈이 깊은 한숨과 닮은 목소리로 어렵사리 덧붙였다. 심장이 발바닥까지 추락하는 듯한 감각에 머리가 다 어찔했다. 술기운이 점점 가시고 있었다. “그렇게 하려던 거 아니었거든.” 사과에도 곧바로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끊었나, 정훈이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화면을 다시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에 무어라 대답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몇 초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정훈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미안하다.” 다시 한번 재차 사과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주 희미하게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훈은 이제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한 휴대전화에서 내뿜어질 말에 온 감각을 쏟아부었다. “올래?” 문장은 짧았다. 그러나 분명 보운의 목소리였다. 정훈이 입을 열었다. 단박에 대꾸하려는데 전화가 맥없이 끊긴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면을 확인하던 정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연정!” 술잔을 들던 아이들이 일제히 정훈을 바라보았다. 뜨끈뜨끈해진 뺨을 손으로 문지르던 정훈이 다급하게 겉옷을 고쳐 입었다. “나 간다. 급한 일 생겼어. 뭐 있으면 전화해!” 정훈이 재빠르게 내뱉고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다리가 몇 번 풀려 비틀거렸지만 속도만큼은 기가 막혔다. 찬바람이 뺨을 때리는 와중 어렵사리 눈을 떠 가며 택시를 잡는 것도 금방이었다. 정훈은 택시에 타기 무섭게 보운의 집 주소를 읊었다. 술 몇 잔이 들어갔어도 줄줄 나올 정도로 자주 찾은 주소였다. 택시가 부드럽게 출발하자, 정훈이 초조하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보운에게서 다시 연락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꿈이었을까 걱정이 되는 일은 당연지사였다. 정훈은 여러 번 발신 기록을 확인하며 숨을 골랐다. 몸속이 덥고 후끈거렸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오 분 이십삼 초의 통화 기록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아아…….” 정훈이 길게 탄식을 토하며 앉은 몸을 축 늘어뜨리자, 그를 태운 기사가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님, 조금 더 빠르게 가능할까요?” 정훈이 정신을 똑바로 곤두세우며 물은 게 세 번이었다. 젊은 친구가 유난이라는 말을 연신 내뱉던 기사는 십오 분 뒤에야 택시를 세웠다. “어, 기사님… 잠시만요.” 정훈이 막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웅얼거렸다. 빠릿빠릿하게 결제를 마쳤어야 했는데…… 지갑이 없었다. 놓고 왔나? 애초에 작은 가방도 없이 가볍게 외출했던 터라, 주머니가 아니라면 둘 곳 또한 없었다. 정훈이 당황에 젖은 사이 기사가 몇 번인가 눈총을 주었다. “야간 할증에 거리가 꽤 있는데…….” 타박하는 말이 얹어지자, 정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보운에게 이런 식으로 다시 연락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집 앞이야, 나 지갑을 놓고 와서 그런데…… 로 시작하는 메시지 옆의 숫자는, 다행히도 빠르게 지워졌다. 품이 넉넉하고 두꺼운 카디건을 걸치고 나온 보운이 눈을 흘기며 택시 요금을 결제할 때 정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제 완전히 깨버린 술기운 탓에 멋쩍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뒷덜미를 긁적이며 보운을 따라 방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보운은 정훈이 뒤따라온 것을 확인하고는 침대에 몸을 앉혔다. 그날과 완전히 같은 구도였다. 주뼛거리며 등 뒤로 문을 닫은 정훈이 방에서 느껴지는 후텁지근함에 숨을 길게 뱉었다. “…… …….” 눈만 연신 굴려대던 정훈이 목을 가다듬었다. “불렀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 보운의 손으로 시선이 자연히 흘러갔다. 보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오른손 위로 왼손을 올리는 행동이 느리게 이어졌다. “뭘 봐? 술 많이 마셨나 보다.” 완고하고 딱딱한 말투가 정훈의 속을 후비는 듯했다. “좆같이 굴다 가 놓고 연락은 왜 그렇게 해대는 건데. 전화는 또 뭐고.” 그에는 정훈 또한 반론할 거리가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끝냈냐…….” 정훈이 은근슬쩍 어조를 가볍게 띄웠다. 술도 들어갔겠다, 차갑게 식은 겉에 비해 속은 뜨겁겠다…… 보운을 이해할 수 있었던 순간도 지나갔겠다. 기회였다. “내내 확인도 안 하다가 받은 건 뭔데. 왜 받았냐, 이럴 거면.” 정훈이 타박하듯 말하자 보운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뺨이 긴장으로 경련하는 게 보였다. 오랜만에 본 보운의 얼굴은 여전히 수척하고…… ……. “두 달 만에 전화하길래, 뭔 말 하나 보려고 했다. 왜? 졸라….” 보운이 보란 듯 미간을 좁혔다. 수척하고, 좀 귀여운 것 같았다. 술이 문제지. 정훈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보고 싶어서 불렀겠지. 올래? 라니….” 이죽거리는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보운이 하, 하는 헛숨을 터뜨렸다. “올래, 한 마디에 달려온 건 너야.” 보운의 왼손이 오른손 위에서 바쁘게 움지럭거렸다. “보고 싶었던 건 너겠지.” “아, 씨발…….” 정훈이 큭큭거렸다. 완패였다. 더 할 말이 없는 정곡이었다. 모르는 줄 알았더니. 그런 생각과 동시에 풀어진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감지한다. 정훈은 느긋하게 보운에게로 다가갔다. 거리가 좁아지자, 움찔 눈썹을 들어 올린 보운이 입 모양으로 왜, 하고 물었다. 화가 많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정훈이 생각하며 보운의 몸 옆으로 몸을 앉혔다. 이게 얼마만의……. 그런 생각에 입이 바짝 마른다. “보고 싶으면 안 돼?” 정훈이 물었다. 숨에 섞인 알코올 냄새를 맡은 보운의 콧잔등이 살며시 찡긋거렸다. “…… 좀? 이상하지 않냐? 졸라…. 패놓고, 보고 싶다는 건 무슨 심보야?” 보운이 팩, 하고 고개를 돌렸다. 창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달이 밝았다. 눈이 조금씩 내리던 것이 이제는 완전히 갠 듯싶었다. 달빛이 창문 턱을 넘어 방바닥부터 침대까지를 적시고 있는 것이 그때에서야 눈에 들어왔다. 정훈은 흐르는 달빛을 따르던 시선을 보운에게 고정했다. “잘못하긴 했지. 사과도 했잖아, 그래서.” 정훈의 목소리는 느긋하게 뱉어졌다. 이제는 완전히 제 속도를 찾을 수 있었다. 고개가 가까웠다. 달빛이 얹어진 보운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빛났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왜 전화를 받고 나를 불렀을까. 정훈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애달프게 시선을 맞대고, 보운을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를 지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 그니까 사과 좀 받아주라.” 정훈의 손이 보운의 어깨를 건드렸다. 보운이 몸을 돌려 눕힌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망이라기에는 그 거리가 짧았지만, 정훈의 손이 떨어지기에는 충분했다. “반성 덜한 것 같은데.” 베개에 파묻힌 보운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뭐라고?” 정훈은 도톰하게 머리카락이 뒤덮인 뒤통수와 마른 등을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거리곤, 그 옆으로 몸을 눕혔다. 이제 물러나지 않아도 된다. 확신이 있었다. 보운과 벽 사이의 좁은 틈이었으나 만족스러웠다. 오히려 그런 틈이어서 좋았다. 몸을 구기고 투덜거릴 수 있어서, 그런 투덜거림이 정당해서, 또 보운의 등에 고개를 묻을 수 있어서……. “좁아.” 정훈이 중얼거리자 보운이 왼손을 뒤로 뻗어 정훈의 몸을 밀어내려 했다. 등이 벽에 닿을 지경이라 꼼짝도 않았지마는. 보운의 등에서는 포근하고 깨끗한 냄새가 났다. 처음 절망에 빠져 피비린내 나는 외침을 내지르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산뜻했다. 마른 등에 고개를 비비며 숨을 내뱉고 있으면 보운의 몸이 조금씩 흠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옛날 꾸었던 꿈이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벌였던 일들이 감각으로써 되살아나고 있었다. 안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정훈의 팔이 보운의 허리를 감았다. “윽…….” 보운이 나직하게 신음했다. 허리에 얹히는 팔의 무게는 꼭 상상한 것만큼이었다. 눈에 힘을 주면, 어렴풋한 어둠 속 호로비츠의 얼굴이 보였다. 트로이메라이……. 선율을 자아내듯이 허리춤에서 꼼지락거리는 정훈의 손이 간지러웠다. 끼치는 겨울의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그 밑에는 기름 냄새가 약간, 그리고 달짝지근한 과일 향, 정훈을 떠올리면 곧장 따라붙는 향이 느껴졌다. 정훈이 돌아가고 난 뒤로 보운은 평정을 빠르게 되찾았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그런 생각에 무릎이 꺾였다. 물건을 망가뜨리는 일이 적어졌다. 귀찮을 정도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읽진 않았지만…… ……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궁금증이 일기는 했다. 객관적으로 보운은 정훈에게 상처를 준 이였다. 정훈 또한 기질을 억누르지 못해 충동적으로 화를 발산했지만, 보운은 알았다. 동정일 리가 없다고……. 올래, 한 마디에 숨도 못 쉬고 달려온 사내애가 그런 비열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을 리 없다는 사실을…… ……. 그러니 내려가, 라는 말 대신 고개를 돌린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등 뒤가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어쩐지 가슴이 떨렸다. 이상하게 손끝이 빳빳해졌다. 통증은 없었지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너, 자…?” 보운이 읊조리며 정훈의 얼굴을 살폈다. 달빛을 흠뻑 머금은 얼굴이 아주 가까웠다. 등에 고개를 파묻고 있으면서 내내 이런 표정이었나. 이마가 맞닿고 앞머리끼리가 얽힌다. 보운은 저도 모르게 허리에 힘을 주었다. 맞물린 몸 사이로, 팔 아래로, 속부터…… 기분 좋은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발산해야만 했던 분노의 화염과는 달랐다. 질적으로 상이한 지점이 많았다. 이건……. “여보운.” 정훈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었다. 반쯤 뜨인 눈이 달빛을 흠뻑 머금었다. “나 진짜… 안 보고 싶었냐.” 취기에 내몰린 사람이 으레 할 법한 선문답일 테다. 보운은 그렇게 믿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도로 눈을 감은 정훈의 얼굴이 너무도 애틋해서, 황금의 빛이 흐르는 뺨과 우뚝한 콧대, 뿜어지는 숨이 달아서……. “미쳤나 봐. 졸라…… 미친 거 아니야?” 보운이 헐떡거렸다. 제 가슴을 짚어 보면 흔들리는 박자가 느껴졌다. 음악으로 치자면 아주 형편없는 엇나감이었다. 이런 박자에 맞추어 할 수 있는 연주란 없을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보운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훈의 눈 감은 얼굴은 내내 고요했다. 어떤 문제도 더는 이 사이를 갈라 괴롭힐 수 없을 듯하다. 여전히 오른손이 아팠지만, 피아노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다는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미경의 연락이 오는 것을 전부 무시했지만…… 그래도 뭔가 나아지는 게 있는 듯했다. 고통과 분노로 시꺼멓게 뭉쳐 단단했던 외피를 부수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두 번이나……. 오늘 실패했더라고 하더라도 정훈은 몇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했으리라. 그런 예감이 들었다. 보운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틀었다. 이마를 넘어 이제는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가까워진다. 사이에서 숨이 섞였다. 정훈의 숨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 겨울, 거리의 깨끗한 뉘앙스가 잔뜩 묻은 기운이 보운의 열기를 해소했다. 보운은 눈을 감았다. 관계에 큰 변화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보운은 눈을 감고도 오래간 잠들지 못했다. 그간 그를 괴롭히던 복잡한 소음이 아닌, 두 심장이 호응하여 둥둥거리는 소리가 단조롭게 울리는 밤을 맨정신으로 견디었다. 다음날 집을 나서는 정훈의 등에 대고 보운은 어떤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정훈은 또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보운은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물러가고서야 좀 더 명료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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