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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여름의 눈 下
보운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이불을 스스로 정리해야만 했다. 누군가에게 들켰다간 그 자리에서 기절해 영영 깨어나지 못했으리라. 세탁실로 이불을 옮기면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을 땐…… 정말이지 까무러치고 싶었다. 비릿한 냄새는 익숙하지 않았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데 속이 답답했다. 세제를 더 넣을 것을 그랬나. 늦은 후회가 뒤따랐다. 분명 정훈의 일이 도화선이 된 것이리라. 맹세하건대 보운은 한 번도, 절대로, 이런 일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늘 정훈이 시작이었다. “도대체 그 새낀 뭐가 문제인 거야.” 이를 악물고 중얼거려도 해소되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저급한 꿈을 꾼 것이 분했다. 학을 떼며 싫어하던 장면을 제 손으로 배반한 것이나 다름없잖은가. 내일 얼굴은 또 어떻게 보지. 제일 문제인 건 불쾌감보다 꿈자리에서 얻었던 쾌감이 자꾸만 등허리를 슬금슬금 핥아온다는 것이었다. 수음은 몇 번 경험이 있었지만, 분명 그것보다 기분이 몇 배는 좋았다. 보운은 그냥 생각을 이어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가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어차피 벌어진 일, 그렇게 기분 좋았던 게 절대로 정훈의 얼굴 때문은 아니었으면 했다. 하지만 마음이 내놓은 길을 따라서만 움직인다면 이 세계가 이런 식으로 엉망이진 않았으리라. 보운은 필사적으로 무던한 체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정훈이 생각보다 인간의 행동에 정통한 것이 문제였다. 그는 작은 실마리를 잡고 놓아주는 법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끈덕지게 몸을 붙여 오거나 하는 통에 보운은 도무지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꺼지라고, 좀!” 보운이 아무리 빽 소리를 질러도 정훈은 들은 체 만 체했다. “응응, 우리 개새끼, 또 성격이 안 좋았어.”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얄미운지. 보운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은 이제 이 여름 한가운데의 일상이 되었다. 안 그래도 더운 날에 체온까지 오르니 난감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신경 줄에 활을 대고 긁어대는 꼴이다. 내내 억지로 버티던 몸이 무너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보운이 보이지 않았다. 등굣길에도 마찬가지였고, 2교시가 끝날 때까지 보운의 자리는 줄곧 비어 있었다. 늘 반듯한 자세로 앉아 음악을 듣거나 하던 뒷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자 안달이 난 건 정훈 쪽이었다. 말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고, 괘씸함이 느껴졌다. “여보운 어딨냐?” 1반 앞문에 기대어 선 정훈이 물었을 때, 아이들이 가리킨 곳은 하나였다. 보건실. 정훈으로선 지난 학교에서 마구잡이로 드나들던 공간이었다. “땡큐!” 잽싸게 감사 인사를 건넨 정훈이 몸을 틀었다. 요즘 아슬아슬하게 이상행동을 내보인다 싶더니. 머리꼭지까지 상기되어 펄쩍거리던 보운을 떠올린 정훈이 고개를 설설 저었다. 1층까지 내려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는 인사도 노크도 없이 보건실 문을 열어젖혔다. 마침 담당하는 선생도 자리를 비운 듯했다. “좋네.” 정훈이 중얼거렸다. 가장 구석에 놓인 침대에만 커튼이 쳐져 있었다. 여름 햇빛이 비스듬하게 보건실로 들어와 스테인리스로 된 집기들을 빛냈다. 다른 곳보다야 조용하지만, 1층인지라 운동장에서 터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정훈은 숨을 크게 한 번 삼킨 뒤 커튼이 쳐진 침대로 휘적휘적 다가갔다. 커튼을 걷으면 예상과 다르지 않게 보운이 있었다. 그는 죽은 것처럼 고요했고, 숨을 아주 얕게 쉬고 있었다. 땀에 살짝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답답해 보였다. “…….” 정훈은 침대에 걸터 앉아 눈 감은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보운의 얼굴은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의 정적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그 밑에 잠재력이 일렁거렸다. “야.” 정훈이 낮게 읊조렸다. 소리에 워낙에 예민한 이였으니 금방 눈을 뜨리라. 정훈은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보운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드러난 이마와 뺨이 장밋빛으로 약간 붉었다. 학교의 어디나 그랬지만, 양호실은 특히 냉방이 충분하질 못했다. 더울 만도 하지.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되어 혀를 차는 순간…… 보운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금빛 눈동자가 열기와 잠기운을 머금고 드러난다. 정훈은 순간 뒷머리를 강타하는 기억에 눈을 크게 떴다. “…… 뭐야……. 존나, 깜짝아.” 보운이 칼칼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눈을 뜨기 무섭게 정훈의 얼굴을 보는 일은 달갑지 않았다. 최근이라면 더더욱. “비켜, 새끼야.” 보운이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후텁지근했다. 정훈의 체취가 전에 없이 더욱 짙었다. 보운은 의식적으로 숨을 천천히, 그리고 얕게 쉬면서 고개를 정훈의 반대쪽으로 틀었다. 손끝부터 간지러운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훈은 왜 저런 눈을 하는 건지…… ……. 알 수 없었다. 몽롱함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으므로 판단을 내리기엔 모든 것이 미흡했다. 그때, 정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보운의 뺨과 입꼬리에 차례로 내려앉았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너무도 약한 힘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정훈은 보운이 자신을 매도하고 밀어내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어떤 믿음이었다. 그러나……. “…… …….” 보운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열기가 투명하게 올라오는 뺨의 색이 더욱 짙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꿈일까?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각이 퍼뜩 튀었다. 그날 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밝은데. 이렇게 생생한데. ……. 보운이 멍하니 눈을 굴리자, 정훈이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저 입술 위로 버석한 입술을 누르는 것뿐이었다. 모든 소리가 죽는다.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외침도, 털털털 돌아가는 선풍기의 진동도, 숨 하나마저도……. 하나, 둘, 셋……. 정훈은 속으로 수를 충분히 센 뒤에야 떨어져 나왔다. 여전히 멍한 감각 사이를 부유하던 보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뭐야, 씨발.” 보운의 목소리는 꿈을 꾸는 듯이 몽롱했다. “뭐긴.” 정훈이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뽀뽀 중.” 부실한 구색이었다. 짝이 맞아도 힘이 없었다. 그러나 정훈은 이것이 반드시 통하리라 믿었다. 맑은 눈동자가 보운을 꿰뚫었다. 그래서 보운은 분했다. 정훈의 믿음이 너무 적나라했다. 저 자신감, 이 씨발. 객관적으로는 정훈을 밀어내야 맞았다. 그날 꿈에서 하지 못한 저항을 해냈어야만 했다. 하지만, 정말로, 보운이 어떤 행동을 더 이어가기도 전에, 이번에도 정훈이 빨랐다. 보운이 열과 혼란에 멍해진 사이 그는 잽싸게 보운과 몸을 밀착시켰다. 한 사람이 누우면 딱 알맞은 침대의 두 몸이 엉켜 있자니 불편할 텐데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다시금 입술을 맞물렸다. 두 번의 입맞춤으로 충분히 젖은 살갗을 핥으며 파고드는 것까지 부드럽게 이어졌다. 다시금 귀가 먹먹해지며 적막으로 가라앉는다. 정훈은 눈을 감았다. 움찔거리며 제 아래에서 몸을 떠는 보운이…… 좋았다. 조금 더 느끼고 싶었다. 눈을 감아야만 뜰 수 있고, 입을 맞추어야만 떼어낼 수 있고,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있어야만 깨달음이 온다. 젖은 살갗이 엉켰다. 섬세하고 다정하게 입안을 훑으며 몸을 바짝 맞대면, 보운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정훈은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절절하게 빨고 물어대는 것으로 제가 얼마나 보운을 원하는지를 드러냈다. 보운은 무력하게 입안을 내어준 채 할딱거렸다. 평생을 따라다니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무엇이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지,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지……. 보운의 팔이 정훈의 등에 천천히 감겼다. 덩굴처럼. 불룩 솟은 견갑골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헤매거나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살짝 떼어낸 정훈이 눈을 떴다. 내내 웅크리고 있던 보운도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다시, 세계의 소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멈추고 싶어. 보운이 갈망하며 입안 가득한 타액을 삼켰다. 일렁거리는 목덜미를 따라 땀방울이 구르고 있었다. 애달픈 눈빛을 삼키듯 마주한 정훈이 보운과 이마를 맞대었다. “한 번 더 할래?” 정훈은 젖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의 그늘을 흠뻑 받아 젖은 보운이 대답 대신 솟은 견갑골 위로 손가락을 가볍게 놀렸다. 한 번, 두 번 연달아 누르면 정훈이 다시금 눈을 감았다. 입술 위를 입술로 덮으면 고요가 찾아온다. 몇 번이고 도약할 고요가. 보운은 제 허리춤을 파고드는 손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러면 입술이 더 깊게 맞물리며 입천장과 뺨 안쪽으로 더운 기운이 물씬 파고들었다. 보운은 정훈의 손이 제 가슴팍 위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규칙하게 뛰는, 음악과 소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소리를 온전히 쥐려는 듯이 정훈이 그 위를 쓰다듬었다. 온갖 것이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그들은 분명히 풍랑 없는 한가운데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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