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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겨울의 뉘앙스 上
겨울은 갈수록 힘을 잃었다. 2월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높아진 기온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보운은 자퇴하지 않았다. 출석 인정이 되는 병결을 끌어모은 결과였다. 졸업식에 참석하는 건 보운의 생각이었다. 부모님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기뻐하며 차를 대기시켰다. 오랜만에 보운을 태우게 된 기사도 밝은 표정이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 말을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보운은 점점 겨울의 기운이 가시기 시작하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오른손이 둔했다. 졸업식은 생각한 만큼 소란스러웠다. 역시 온 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을 찰나 정훈이 저쪽에서 불쑥 일어나 다가왔다. 보운에게 한마디라도 걸고자 웅성거리던 이들을 쳐내는 손길에는 여전히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다. “야, 환자셨어 환자, 귀찮으시대. 나중에 물어봐.” 정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보운과 마찰했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보운은 정훈의 팔 아래 기대어 걸으면서, 제 몫으로 마련된 자리에 앉으면서도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두근거림, 차가운 바람, 소란을 으깨어 몰아내고 열기를 식히는 두 가지. 졸업식은 어떤 자극도 되지 못했다. 작은 감흥조차도 보운에게는 없었다. 그는 그저 이것이 마지막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사건이라고만 여겼다. 보운을 배려한 것인지, 매년 있었다던 졸업 축하 연주가 생략되었다. 관현악부의 반발은 없었으려나. 무심코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보운은 이제 자신이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흠칫 놀랐다. 옆에 앉아 단상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정훈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왜.” 한껏 소리를 낮추기 위해 낮아진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보운은 어쩐지 맥이 빠진 웃음을 내보낼 수밖에는 없었다. 소란스럽고 어영부영 끝을 맺은 행사를, 보운은 돌아보지 않았다. “짐 좀 들어줘.” 하고 정훈을 향해 말했을 뿐이었다. 아직 그 몸이 다 아물지 않았을 것이리라 짐작한 정훈은 잠자코 보운을 따랐다. 이미 아이들은 방학 전에 짐을 전부 뺀 지 오래였기에, 졸업식이 끝난 시점 건물에는 두 사람이 전부였다.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기분 이상하네.” 먼저 운을 뗀 건 정훈이었다. 그는 보운을 부축하며 보폭을 맞추어 느리게 걸었다. “다시 안 올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가슴이 울렁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보운에게 지난 이 년은 빼곡하게 정훈이었다. 1학년의 기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게.” 짧게 대꾸한 보운이 정훈의 팔 아래를 벗어나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줄지은 책상이며 사물함이 텅 비어 있었다. 칠판에는 즐거웠던 기억만을 남겨두고 싶어 하는 이들이 휘갈긴 메시지가 몇 문장인가 적힌 채였다. 보운은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천천히.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커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한 번도 이걸……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보운이 중얼거렸다. 그는 굳게 닫힌 사물함을 한 번 바라보다가, 창가와 가까운 책상에 걸터앉았다. 정훈이 괜히 보운을 따라 교실 곳곳을 둘러보다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기분이 좀 남다르다?” 정훈은 보운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장난스럽게 웃음을 그리는 낯과, 추위에 약간 붉어진 귓바퀴가 도드라졌다. 보운은 입을 다문 채 정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 왜 그렇게 봐.” 정훈의 시선 또한 보운을 떠나지 않았다. “모르겠어?” 보운의 손이 뻗어졌다. 가볍게, 흉터가 그어진 손끝이 정훈의 가슴에 닿았다. 부들거리는 검지를 구부려 누르면, 맑은 도, 깨끗하고 청아한 꿈의 첫 음이……. “어?” 정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울렸다. 분명하게. “내가 왜 왔는지 정말 모르겠냐고.” 보운이 눈을 감았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르르 경련하는 손가락이 정훈의 가슴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정훈이 일순 낯을 찡그렸다. 참을 수 없이 울컥 치미는 마음이 있었다. 심장이 무척 크게 뛰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보운의 손가락이 닿아 있었기에……. “내가 널.” 정훈이 다급히 보운의 턱과 뺨을 아울러 쥐었다. 보운의 입술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 좋아해서, 너 다 알아서, 온 거지.” 거친 중얼거림이 보운의 입술 안으로 쏟아졌다. 보운은 메마른 입술이 바스락거리며 맞물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았다. 정말 바보 같은 남자애가 아닐 수 없었다. 보통은, 평소 같았더라면 반대로 말했을 텐데. 고장이라도 난 건지……. 보운의 손이 이제는 정훈의 가슴에서 떨어져 그의 목에 걸렸다. “바보.” 혀끝이 입안을 어지럽히는 와중 웅얼거린다. “바보 같아…….” 다리를 벌리고 들어와 바짝 몸을 붙이는 정훈에게서 예의 그 향기가 풍겼다. 차갑고 깨끗한 정훈만의 향기가. 창문을 통해 바람이 들어왔다. 정훈이 더듬더듬 손만 뻗어 창을 닫으려 들었다. 보운이 이를 세워 정훈의 혀끝을 살짝 물었다가 떨어졌다. “자꾸 바보래, 이게.” 정훈의 뺨이 붉었다. 보운은 폐 깊은 곳까지 공기를 삼켰다. 가슴이 부풀고 맞닿은 면적으로부터 고동이 거셌다. “바보 아니면 뭔데?” 보운이 젖어 반짝이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몸을 뒤로 물리려던 정훈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 …….” 대답을 잃은 것처럼, 정훈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 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을 감추지 못한 보운이 물었으나…… 정훈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부드럽고 차가운 보운의 귓바퀴에 입술을 그대로 묻을 뿐이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감각에 보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손을 빠르게 내린 정훈이 보운의 마찬가지로 차가운 오른손을 잡아 쥐고 주물렀다. “으, 윽…….” 아프지 않았다. 다만 지나친 긴장이 심장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보운이 숨을 삼키고 허리를 비트는 사이 그의 다리를 조금 더 넓게 벌린 정훈이 눈을 느슨하게 떴다. “…… ……. 좋아해.” 정결하고 투명한 목소리는 심장의 고동에 미묘한 떨림을 품고 있었다. 정훈의 차가운 숨이 보운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두근거림, 차가운 바람, 소란을 으깨어 몰아내고 열기를 식히는 두 가지. 파괴의 한가운데 내던져진 여보운에게 필요했던 것, 연정훈의 뉘앙스. 연정훈만이 가질 수 있는 뉘앙스. 보운은 제 목덜미로 입술을 옮기는 정훈을 밀어내지 못했다. 정훈의 손아귀 안에 잡힌 오른손이 무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또 믿고 싶었다. “교실이야, 미친 새끼야….” 마지막 남은 양심을 끌어올려 웅얼거리지만, 정훈은 그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혀를 내어 섬세히 목덜미를 핥고 벌어진 보운의 다리 사이에 제 아랫도리를 비빌 뿐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안 와.” 정훈이 낮게 뇌까렸다. 글쎄, 과연 그런가? 보운이 반박하려 했지만 시도는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날아갔다. 정훈이 다시금 보운의 입술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오른손을 은근하게 주무르며, 그 손등에 새겨진 흉을 다정히 쓸며 입을 맞춘다. 뜨거운 혓바닥으로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간지럽힌다. “으응…….” 보운이 허리를 뒤척거렸다. 정훈은 노는 손을 이용해 보운의 몸을 주무르고 쓰는 것에 열심이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들어가 반쯤 일어나기 시작한 것 위를 문지른다. 천과 살갗이 스치며 눅눅함이 묻어났다. “눈 온다.” 정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운의 뺨을 깨물었다. 퍼뜩 몸을 떨던 보운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닫힌 창문을 두드리는 눈송이가 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움직임이 보운에게 더없는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 너만 만나면 눈이 와.” 보운이 웅얼거렸다. 그건 어떤 예고였을까. 직감이었을까. 흥분으로 널을 뛰는 심장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쭉 이어지기를. 머릿속이 더없이 깨끗했다. 보운을 미친 것처럼 추격하던 소음도 없었다. “고마워…… 연정훈.” 보운은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정훈의 기척이 들렸다. 곧 바지 버클이 내려가는 소리도…. 고마워. 보운의 차가운 오른손이 정훈의 손바닥 안에서 가볍게 말려들었다. 도, 가슴을 누른 첫 음을 잡아 쥐듯이. 이 음은 봄이 와도 녹지 않으리라. 좋아해, 대신 고마워. 보운은 바지 안으로 들어오는 손에 허리를 떨었다. 정훈은 고마워, 라는 말에 좋아해, 좋아해, 하고 화답했다. 흰 고백, 깨끗한 겨울만의 뉘앙스가 그들 사이에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