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차의 계절풍
Writter. 얌 CM | Design. 열 CM
인터뷰어 오랜만에 작품 활동이에요. 심사숙고했다고 하던데.
여보운 네. 꼭 영화로 찾아뵙고 싶었어요.
인터뷰어 다른 매체가 아니라?
여보운 다른 매체가 아니라.
인터뷰어 <교차의 계절풍>을 고른 이유가 있다면?
여보운 글쎄요….
아는 팬들은 알고 있겠지만, 보운은 말을 아끼는 타입이 아니다.
인터뷰어 Y는 신선함에 보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보운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마치 꿈을 꾸는 아이처럼 눈동자를 빛냈다.
이거다.
한쪽에서 셔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보운을 담은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스태프들의 입에서 연신 나이스, 하는 소리가 터졌다.
보운은 익숙하다는 듯 흐트러지지 않은 채 자신이 펼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Y는 느긋하게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새까만 머리칼, 핏기 없는 뺨, 반짝이는 밝은 눈동자. 아, 이 남자가 보운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런데도 도저히 그가 아닌 장면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천생 배우.
여보운 어떤 작품들은 대본부터 저를 사로잡아요.
인터뷰어 사로잡는다?
여보운 어려운 개념이기는 한데, 대본이 배우를 당기는 것 같아요. 여기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 이 안으로 건너와, 그리고 들어줘, 표현해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죠. <교차의 계절풍>도 그런 작품이었어요. 일단 플롯이 흥미로웠고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장르기도 해서 마음이 갔죠. 지평을 넓히는 거니까요. 그리고 <교차의 계절풍>은 장면의 거의 전부를 두 사람이 끌고 가요. 정면으로 연기를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역할에 관한 설명을 짧게 들었고, 그땐 그다지 어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인터뷰어 생각과는 조금 달랐군요.
여보운 맞아요.
인터뷰어 어떤 면에서 다르다고 느껴졌나요?
여보운 감독님께서 많은 걸 제게 맞춰주셨어요. 그런데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점이 있었죠. 알 것 같은 면도, 도저히 모르겠는 면도 많았어요. 굉장히 복합적인 캐릭터더라고요. 전 그런 인물에게 끌려요. 널 연기 해주겠어. 네 안에 뭐가 있든 나는 읽을 수 있어. 그런 생각을 끝없이 하면서 대본을 읽고 준비하죠. 그런데 여보운이라는 인물은… 읽어도, 읽어도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인터뷰어 보운 씨도 그런 감정을 느끼나요?
여보운 저도 사람이니까요. 이럴 땐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진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불투명함과 불안정함이 촬영 전까지 저를 쫓아왔어요.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해보네요.
인터뷰어 그래도 보운 씨라면 촬영을 끝내주게 했을 것 같아요.
보운이 소년처럼 웃음을 터뜨리자, 촬영장의 모두가 달콤한 탄식을 내뱉었다.
보운은 확실히 공간을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Y는 좀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의 마성에 관해 칼럼을 쓰리라고 다짐했다.
여보운 끝내주게, 네. 그렇게 했죠.
인터뷰어 우리가 <교차의 계절풍>을 보러 가기 전에 무슨 마음으로 임하면 좋을까요?
여보운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굳이 바라자면 어떤 기대도, 어떤 편견도 없이 찾아주셨으면 좋 겠어요.
깨끗하고 서투른 이야기예요.
인터뷰어 멋진 표현인데요.
여보운 그런가요?
정훈의 합류는 갑작스러웠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임에도 상대역 캐스팅 소식이 들리지 않자, 불유쾌함을 은은하게 드러내던 보운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이번 복귀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보운이 그렇게나 심사숙고하여 작품을 고른 이유는 전부 그 때문이었다. 배우로서 커리어에 더할 나위 없는, 그리고 빛나는 점 하나를 찍기 위해. 이미 대한민국에서는 보운의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건만 보운은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보운의 나이 정도 되면 배우는 선택을 해야 한다. 지금껏 밟아 왔던 길을 등지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될 수 있는 한 오래 이미지를 연장할 것인가. 보운이 택한 건 당연히 전자였다. 그와 같은 나이일 적 그의 아버지는 이미 배우로서는 더 따라올 자가 없다는 평을 받은 바 있었다. 입에 단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평론가의 찬사였다. 그 평론가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보운에게 같은 찬사가 오는 일은 없었다. 새해 무렵부터 보운은 이를 갈았다. 다양한 작품을 고려하며 봄이 오기까지 시간을 끌었다. “여름부터 리딩이며 뭐며 천천히 들어갈 거예요.” 감독은 입봉작을 흐지부지하게 넘긴 신인이었다. 연차로 따지자면 입봉으로부터 오 년 정도였고, 그럭저럭 손해를 크게 입지 않은 입봉작 이후로 작품이 변변찮았다. 그래도 보운은 그를 택했다. 그의 작품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이번 복귀는 보운이 아역 시절에 보내는 작별 인사이자 헌사였다. 교차의 계절풍을 계기로 보운은 전혀 새로운 활로에 발을 들일 것이었다. 어디로 날아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런가요.” 보운이 의식적으로 웃자 감독의 표정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보운은 전혀 고민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가장했다. 무구하고 사람 좋은 배우의 얼굴이었다. “해보고 싶어요, 이 역할.” 보운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이 다디단 꿀이라도 된다는 듯, 감독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합류가 성사된 이후 각종 인터뷰며, 기사가 쏟아졌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상대역이 긴 시간 공석이었다. 보운은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짜증스러움에 잠겨 두어 달을 보냈다. 입봉작부터 그저 그런 감독이었으니 보운과 급이 맞는 배우들의 염려가 이해는 됐다. 거기다 보운과 동등한 주연이라기보다는 보운의 상대역, 보운을 더 뚜렷하게 보이도록 하는 존재 정도로 치부되는 것을 꺼리는 게 당연했다. 요즈음 젊은 배우들이 가진 단독이라는 단어에 대한 열망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래도 보운은 기다렸다. 어찌 되었든 그가 선택한 작품이었다. 그 선택이 그를 배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작품 고르는 눈을 떴다. 부모님이 지시하지 않아도 그는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없었던 적이 더 잦았지만, 어쨌건, <교차의 계절풍>은 성공할 것이었다.
그거야 상대역이 배우 같을 때의 이야기지. 보운은 감독을 응시했다. “누구라고요?” 갑작스러운 합류 소식이 제대로 보운의 심기를 건드린 참이었다. 보운은 이제 감독이 누구보다 편한 상대처럼 느껴졌고, 하나하나 제 비위를 맞추고 틀어진 부분을 교정하려 하는 마당에 얕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은 비딱한 자세로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 감독이 한숨을 내뱉자 보운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이전보다 확실히 언성이 높아진 상태였다.
감독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곤 회의실의 문을 닫았다. 며칠 뒤면 대본 리딩이 잡혀 있건만, 보운의 자세가 너무 완고했다. 이런 잡음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가장 피해를 받는 건 보운 자신일 터였다. 감독은 아직 보운에게 진 빚을 잊지 않고 있었다. “턴 에이의…….” 감독이 이리저리 손짓했다. “그렇게 읽는 거라고요?” 보운이 한쪽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경멸과 조소가 아무렇게나 뒤섞인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라는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는 말인가. “아, 응. 알파벳 A가 뒤집힌 모양이라고 해서 턴 에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뜻은 포 올이라고, ‘모든 것에 대하여’라나…….” 감독이 문득 생각이나 났다는 듯이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영화 같지 않냐는 목소리가 꿈에 빠져 있는 것처럼 몽롱했다. 보운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턴 에이고, 뭐고…… 아이돌이 말이 되는 거예요?” 보운이 감독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냥 뒀다간 그 아이돌, 그러니까 정훈에 대한 서사시라도 쓸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보운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게다가 연기 경력도 없다?” 보운은 이 정도의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빛날 자격이 있었다. 주인공의 자질을 타고 난 천재였다. 학습된 부분도, 그저 쥐고 태어난 부분도 모두 그의 것이었다. 휘황찬란한 필모그래피에 아이돌 캐스팅으로 엉망이 된, 그것도 초짜 감독의 어중간한 영화를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나 그만둬요?” 보운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보통 이렇게 하면 어지간한 신임은 지레 당황하여 물러나기 마련이었다. 보운은 이 업계 사람들을 잘 알았다. “나 캐스팅하려고 꽤 힘들었다면서요.” 보운이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섰다.
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흐름으로 상황이 흘러갔다. 감독은 눈썹을 살짝 올리는가 싶더니 완고하고도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 판단을 믿어, 나는 감독이야, 정훈 씨가 정말 잘 맞아……. 보운은 정말이지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내뱉더니 일방적으로 대화를 종료하기까지 했다. 감독이 돌아 나가는 것을 보고 씩씩거리던 보운이 애꿎은 플라스틱 의자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벌써 일 년의 공백기가 생긴 참이었다. 이번 작품을 고사하고 새로 찾는 기회비용을 생각하자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돼?” 마지막으로 거의 고함을 내지른 보운이 회의실의 문을 차듯이 열고 나오는 순간, 복도에 있던 남자가 우뚝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운을 바라보았다.
옅은 색감, 훌쩍 큰 키와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척 보기에도 눈에 띄는 외모…….
보운의 미간이 단박에 좁아졌다. “뭐야. 구경났어?” 보운이 거칠게 말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열이 올라 몸이 더웠지만, 흐트러진 차림으로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게 저 아이돌인지 뭔지, 턴 에인지, 니은인지 하는 그룹의 근본도 없는 놈이라면 더더욱. 보운을 제대로 인식한 정훈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찌푸리듯 미소를 지었다. “구경할 게 있나 싶긴 했죠.” 얼굴만큼이나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리길래, 리딩을 벌써 시작했나? 하고 기웃거린 거였거든요. 그런데 웬걸, 감독님이 나오시지 뭐예요.” 정훈이 넉살 좋게 말을 마치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돌 판은 원래 선배한테 그런 식으로 눈 하나 깜짝 않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문화가 있나 봐?” 보운이 빈정거렸다. 표정을 지어내는 건 쉬웠다. 속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금방이라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을지언정, 뻔뻔하게 눈가와 입가의 주름을 펴고 상대를 볼 수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정훈은 어떤가. 정훈은……. 보운은 그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면서, 짓궂은 듯도 했다. 웃음기가 걸려 있었는데 억지스럽다기보다는 상황 자체에 호기심 어린 것처럼 보였다. 아주 복합적인 표정이었다. 게다가……. “그만 쳐다보지?” 보운은 생각을 끊어냈다. 지금 정훈에게까지 쏟을 관심이라곤 없었다. 당장 이 건물을 빠져나가 속이라도 풀어야 했다. 이쪽에서 애매한 소란이 벌어졌다는 걸 아는 모양으로, 복도는 오가는 이 없이 삭막했다. 보운이 제 어깨 너머를 살피듯 바라보자 정훈이 으쓱거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네, 선배님.” 정훈의 발음이 어찌나 또박또박하던지!
발음 교정 정도는 받는 모양이지. 보운은 정훈을 지나치며 가볍게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대본 리딩날이 다가오는 때까지 그에 관한 염려는 조금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감독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찍혔으나 구태여 다시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캔슬은 없었다. 그거면 되는 거 아닌가? 보운은 철저히 에이전시를 통해서만 모든 의사를 전달했다. 심술이자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였다. 갑작스러운 합류, 그것도 아이돌 출신을 데려다 놓은 것에 대한 응징. 어쨌든 날이 갈수록 감독의 연락은 뜸해졌다. 이대로 흘러만 간다면 좋았겠지만.
보운의 분노가 애매하게 흐려질 무렵이 되자 리딩 날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검게 선팅된 창문으로도 바깥의 여름이 정확히 느껴지는 낮이었다. 보운은 이마를 창에 가깝게 대고 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맡은 역할에 대한 모든 게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대사는 벌써 다 외운 수준이었고, 교차의 계절풍이 말해주는 모든 감각들을 어서 표현하고 싶었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그는 할 수 있었다. 그 어렵고 예민한 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후반부의 감정선 또한 오늘로 정리의 가닥을 잡을 수 있으리라. 매니저는 이동하는 내내 보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작품에 들어가기 직전에야 말로 가장 예민해지는 보운을 익히 아는 터였다. 그와는 벌써 십 년을 함께한 이였으니, 보운은 매니저의 사소한 배려가 익숙했다.
부지런히 달려온 덕에 모이기로 한 건물이 벌써 가까웠다. 보운은 미약한 기대와 거대한 자신감을 안고 벤에서 내렸다. 무성한 더위가 단박에 몸을 감쌌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기온이었지만, 보운은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를 유지했다. 리딩 현장은 대외비였으나 언제 어디에서 카메라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돌이 끼었으니 더욱 위험했다. 제 연예인이 어디에 있든 찾아내곤 하는 위인들이었으니. 매니저의 인사를 뒤로하고 보운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옆으로 맨 가방 안에 든 대본의 무게가 그를 설레게 했다. 삽시간에 목덜미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은 거슬리지도 않을 만큼 그랬다.
보운은 역시 배우였다. 어떤 식으로든 내재화한 이 역할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 결정된다. 준비한 두어 가지 버전의 첫 대사를 입속말로 되뇌며, 보운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안녕하세요.” 그를 알아보고 몇몇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보운도 철저해서 딱딱하게까지 보이는 상냥함을 두른 채로 그들에게 마주 인사했다. “날이 참 덥네요.”
회의실은 한산했다. 바깥의 더운 공기가 조금도 들어오지 못하는 그 공간은 깔끔했고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다과 없이 황량한 테이블을 바라보던 보운이 작게 혀를 찼다. 애초에 영화가 두 사람을, 그중에서도 보운을 위주로 진행되는 터라,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잘만 한다면 최저 예산으로 대박을 노리는 한 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연정훈이라고? 보운은 아니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전면에 날카로움을 두른 채 중앙의 의자에 착석했다. 감히 인사를 건넬 수도 없도록 냉기를 흘려댔다. 그의 눈치를 보며 스태프들이 속속들이 채워지는 사이, 보운보다 다소 늦은 정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정훈은 쾌활했다. 그날 보운과의 첫 만남에서 보인 모습보다 훨씬 붕 떠 있었고, 다채로운 색들로 채워진 수정 같았다. “밖이 엄청 덥네요.” 헤실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이곳저곳에 인사해대는 통에 정신이 사나워진 보운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아, 선배님.” 정훈이 즉각 그에 반응했다. 몸을 재빠르게 보운 쪽으로 돌린 정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턴 에이의 정훈, 그리고 배우로서는 연정훈입니다.”
처음은 개뿔. 번뜩 고개를 든 건 그런 생각이었지만, 보운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정훈이 판을 짜는 방식의 신선함이 우습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적어도 이 바닥의 생리를 아주 모르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날 감독이랑도 마주쳤을 텐데. 생각을 정리한 보운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당황한 시선이 이곳저곳에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응, 아이돌 후배는 처음이네.” 보운이 아주 천천히 얼굴에 스미듯이 웃음을 띠었다. 그러자 맥없이 풀어지는 분위기가 우스웠다. 감독은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요 인물 두 사람이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꾸리니 긴장이 풀린 듯 사람들이 분주히 준비 단계로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 정훈의 눈동자가 그의 낯 곳곳을 훑었다. 다 보인다, 머리 굴리긴. 보운은 속으로 힐난하며, 검지로는 대본을 두드렸다. “앉아.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보운이 상현달 모양으로 눈을 접어 웃었다. “시작해야지.”
리딩은 처음 보운과 정훈이 잡은 분위기를 타고 그대로 흘러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만 속이 뻔히 보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뺨이 팽팽해지고 종래에는 경련이 올 것 같은데도 멈추질 않았다. 그 속을 모두가 알았다면 기겁을 했겠지만, 불운하게도, 보운의 신적인 연기력 탓에 알아줄 사람은 없는 듯햇다. “두 사람 케미가 진짜 좋지 않아요?” 보조 감독이 감탄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정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운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보운의 기질을 일찍이 알아본 나머지 어쩐지 꺼려 하는 기색이 있었다. 보운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그래요?” 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임 감독님이 그냥 저를 찾으신 게 아닌가 봐요. 선배님이랑 잘 어울린다니, 기분 진짜 좋은데요?” 능글거리는 말에 보조 감독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임 감독님이 감이 좋을 때가 있어요, 따위의 말을 하는 동안 보운은 불편한 심기를 다스리기에 열심이었다.
“뭐, 배우의 자질이 있으니까 데려온 거겠지? 내 파트너로서…… 라기보단.” 보운이 문득 말을 시작하고, 한 박자 느리게 생글거렸다. “남 반사판 역할에 만족할 얼굴이 아니잖아, 정훈 씨.”
순간 회의실의 모두가 보운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움직임을 멈추었다.
“더 나아갈 배우의 재목이지. 안 그래?” 보운이 솜씨 좋게 덧붙였다. 그때에서야 고개를 끄덕거린 보조 감독과 스태프들이 저마다 안도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정훈이 입술을 양옆으로 길게 늘였다. “그럼요. 이런 긴 연기는 처음이지만, 카메라 앞이라면 경험도 좀 있으니까….” 정훈이 보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더 이어지려는 말을 끊은 건 당연히 보운이었다. “뮤직비디오 촬영 말하는 거야?” 보운의 목소리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신경을 타고 있었다. 언제 끊겨 바닥으로 고꾸라질지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목소리에 가득했다. “아.” 정훈이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뮤직비디오에 대해 좀 아시나 봐요?”
……. 가증스럽기는! 보운이 대본 귀퉁이를 꽉 쥐었다. 종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여태껏 지어 온 웃음을 흘려보내지 않고 있었다. “찍어본 적 없으실 텐데. 역시 선배님이네요.” 정훈이 싱글거리며 손뼉을 두어 번 쳤다. “진짜 많이 배우게 될 것 같아요. 기대된다.”
정훈의 태도는 매사 그런 식이었다.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는 듯하다가, 날카롭게 의표를 찌르며 보운을 건드렸다. 그날의 리딩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운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으나, 처음 하는 것치고는 괜찮았다는 평이 정훈에게 매달렸다. “난 처음 치곤 잘한다는 말 질색해요.” 보운은 감독을 볼 때마다 말했다. “내가 원하는 상대는 여보운에게 지지 않는 동급생이라고요.” 그러면서도 정훈이 제 대사를 맞받아칠 때면 선뜩선뜩하게 차가워지는 가슴께를 느끼곤 했다. 대본을 받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런 식의 대화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부분이 많았다. 보운이 격정적인 다툼으로 해석한 부분을 정훈은 달램과 화해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대사를 입에 올렸다. 오히려 그런 해석이 조금은 나을 때도 있어서, 보운이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트는 경우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작품에 도움이 되는 길이 배우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니까. 보운은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분하지만 이제 와 물릴 수 없었으니까. 본 촬영이 시작되자 두 사람의 대본은 처음 받았던 때보다 두 배는 넘게 부풀어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들춰 보고 밑줄과 피드백을 적어 두었는지, 촬영이 끝날 때쯤이면 넝마가 되어 있을 게 뻔했다. 메이크업을 받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정훈의 얼굴은 확실히 앳되어 보였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기는 해도, 얼마 전까지 현역이어서인가……. 보운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어정어정 걸어오는 정훈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벌써 와 계셨네요.” 정훈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보운은 고개만 까닥거렸다. 단둘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표정을 굳히기도 어려웠다. 여전히 보운은 정훈이 껄끄러웠다. 몇 번의 리딩이 이어지는 동안 정훈이 아예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정훈이 사방에 뿌려대는 웃음과 사람 좋은 말들이 보운에게는 거의 애교스럽게 느껴진단 게 문제였다. 보운에겐 그런 동료가 없었다. 친구는 더더욱 없었고, 정훈 같은 다가옴이 낯섦을 넘어 거북하게까지 느껴졌다. 거기다 리딩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딱딱함은 마무리가 되는 날까지 나아질 줄을 몰랐다. “그런 식으로 할 거야?” 보운이 넌지시 운을 떼면, 정훈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웃음을 두르고 상체를 숙였다. “배우면 되지 않을까요? 배우니까? 하하하….” 좀 봐 달라는 듯 두 손을 모으기까지 하는 모습은 기가 찼다.
그대로 촬영에 들어가 영화를 완전히 망치는 짓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보운은 나름대로 선의를 갖고자 노력했다. 이건 저 망할 아이돌 출신을 위하는 게 아니다. 오로지 내 필모그래피, 내 작품을 위한 길이다. 몇 번이고 속으로 그렇게 되뇌자 차츰 정말로 그런 것처럼 생각되었고, 정훈을 대하는 것도 나름대로 편해졌다. 정훈이 커피며 차를 사다 바치는 것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카메라 테스트 날에는 촬영 감독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뷰파인더를 보기도 했다. “나쁘진 않네요.” 보운이 중얼거리자, 촬영 감독은 고개를 주억였다. “잘 어울려. 이 작품 잡으려고 태어난 놈처럼.”
정말로 그런가? 보운은 제 코앞까지 다가와 오늘 촬영에 대한 기대감을 줄줄이 늘어놓는 정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 좀 이상해요? 메이크업 뭉쳤나?” 아무리 말을 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보운에, 정훈이 머뭇거리며 움직임을 줄였다. “아님 학생처럼 안 보여요?” 이, 하고 입을 길게 벌려 희고 번쩍거리는 치아를 보여준 정훈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팔랑거리는 옅은 색 머리카락이 성가시다고 느낀 보운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빨리 나가 봐. 다들 정훈 씨 기다리는 거 몰라?” 언제나처럼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어졌다.
정훈이 네에, 하는 설렁설렁한 답을 내놓곤 건물 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보운은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만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무더위가 길었다. 이번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의 연속이라는 기사가 끊이질 않았다. 늦여름에 가까운 시기였는데도 밀도 높은 더위가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축축하지만 않으면. 보운은 그늘에 서서 촬영이 한창인 저쪽을 내다보았다. 정훈이 보조 감독에게 무언가를 지시받고,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보운은 정훈이 걸어오는 시점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보운이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보운이 조금 더 늦게 등장하여 관객에게 트릭을 거는 첫 시퀀스. 그리고 인물의 일상을 아주 미묘한 흐름으로 바꾸어 놓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했다. 보운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민하고 콧대 높은 남자아이. 무관심과 인간으로서 가지는 아주 작은 단위의 온정 정도를 몸에 두른 그런 아이. 흥미 없는 것을 보는 눈동자, 어쩌면 딱하다는 듯한 눈빛…… …… 여름.
촬영이 시작되자 모든 것이 흐르듯 움직였다. 몇 번이나 합을 맞춰 보았을 스태프들은 더위에 오래 고생하지 않겠다는 일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정훈도 곧잘 하는 듯싶었다. 두 번의 테이크를 거쳐 교차로로 진입하는 모습을 봤을 때, 보운은 솔직히 내심 놀라웠다. 정훈보다 두 번, 세 번의 더 많은 경험을 거친 연기자들도 단독 신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곤 하지 않던가. 그런 것에 비하자면 정훈은 꽤 잘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 테이크에서는 앞에서 그를 찍는 카메라와 자꾸 눈을 마주치는 바람에 한차례 주의를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인지 교차로로 다가오는 정훈의 시선은 자꾸만 주변을 배회했다. 전봇대, 담벼락, 아무런 의미 없는 바닥의 쓰레기 한 줌, 새, 죽은 새, 쓰레기봉투……. 소품인 것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다.
정훈이 점차 가까워지자 보운은 숨을 들이켰다. 제 차례였다. 카메라는 정훈을 함께 비추지만, 그 장면의 주인공은 오로지 보운이 될 것이었다. 눈을 감고 몇 번이나 그렸던 상황을 정밀하게 복기한다.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는 신호와 함께 보운이 한 걸음을 뗐다.
걸어간다, 준비된 차가 도로를 내달린다, 가장 어려운 장면, 정훈이 그것을 보지 못한 채 걸음을 계속한다. 보운은…… 보운은 뒤에서 정훈의 어깨를 잡아챈다.
“…… …….” 정훈이 고개를 돌린다.
아, 얘…… ……. 보운은 저를 돌아보는 눈빛에서 뭉뚝한 단점을 예리하게 찾아냈다. 햇빛을 잔뜩 머금어 빛으로 자글거리는 정훈의 눈동자가 떨렸다. 금방이라도 어떠한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이 열렸다. 대본에 쓰인 것이었으나, 보운은 알았다. 저건 무방비한 표정이었다. 배우로서는 방종에 가까운 행동이다. 역시 거칠다. 역시…… 다듬어지지 않았다. 일반 관객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이래선 오래갈 수 없을 것이었다. 정훈이 그 상황에 취해 어떤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보운은 그를 지나쳤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보운이 실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정훈의 실수조차도 능숙하게 감추었기에, 카메라에 찍힌 장면은 그럴듯했다. 아름다운 부분도 많았다. 보운은 뷰파인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독과 보조 감독, 그리고 촬영 감독의 말을 경청했다. “진짜 덥네요.” 어느새 그 옆으로 슬쩍 다가온 정훈이 눈치를 살피다 툭 끼어들었다. 컷 신호 이후 아무도 말을 붙이지 않자 지레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아.” 보운이 대강 고개를 까닥거렸다. “잘 나왔어.” 어쩐지 건성인 문장에 정훈이 스태프들과 눈을 마주쳤다. 정훈의 낯에는 아직 여름날 첫 만남의 긴장과 새로움, 그리고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보운은 그것을 포착했다.
영화 촬영의 최대 단점이 덫처럼 정훈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정훈은 미숙했다. 특히 한 장소에서 최대한 많은 장면을 찍어내야 하는 것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첫 만남과 방학식의 한 장면을 같은 날에 촬영해야 한다는 사실은 정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컷 소리가 들려도 좀처럼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어떨 땐 보운의 눈을 너무 오래 보기도 했다. 빨간 불이 들어오는 카메라 렌즈와 그대로 눈을 마주치는 습관은 고질적이었다. 이래서는……. “안 돼.” 보운이 중얼거렸다. “이래서는 안 돼.”
그냥 잘하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건 보운의 철칙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이끄는 항해사였다. 주연으로서, 탑급 배우로서, 그리고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영역의 전문가로서. 촬영에 들어간 이상 그의 역할은 감독보다도 중요해질 때가 잦았다. 그 순간 반짝이던 눈동자에서 찾은 게 단점뿐만은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보운은 그 어떤 때보다 정훈을 깊이 파악하고 있었다. 보운에게는 정훈을 올바른 방향으로 교정하여 이 영화를 적정한 궤도에 올려두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그런 연기를 계속할 건 아니지?” 라거나, “진짜 못 봐주겠다. 정훈 씨도 알아?” 하는 날카로운 말로 정훈을 멈추세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정훈은 “처음이라서 그래요.” 따위의 대답으로 보운의 속을 뒤집었지만.
가을에는 대부분 실내 촬영이 주를 이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무대에서 활동하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인지, 정훈은 실내에서 더 자연스러운 연기를 했다. 정훈과 합을 맞추는 날이 지속되면서 보운은 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됐노라 자부할 수 있었다. 정훈이 끊이질 않고 들이대는 통에 매번 짜증스러운 반응을 내보이기가 어렵기도 했다.
“넌 참 속이 없는 것 같아.” 보운은 바람이 쌀쌀해지는 무렵부터 정훈을 편하게 불렀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땐 꼬박꼬박 정훈 씨, 하는 다소 딱딱한 호칭을 유지했지만.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정훈은 느긋한 웃음을 걸친 채 보운의 옷깃을 만져주고 있었다. 정훈이 보운보다 조금 나은 게 있다면, 카메라에 예쁘게 잡히는 방법을 안다는 점이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보운이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마무리는 늘 정훈이 담당하게 되었다. 저마다의 일로 바쁜 세트장에서 두 사람은 어쩐지 동떨어진 것처럼 서서 소곤거렸다. “나였으면 너처럼 안 했을 테니까.” 보운이 숨길 수 없는 질책을 내뱉었다. 정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음…….” 그러다 돌연 보운에게 시선을 맞춘 정훈이 어깨를 연극적으로 으쓱거렸다. “형은.” 이 호칭을 사용했을 땐, 보운이 눈을 홉뜨긴 했지만, 정훈은 넉살 좋게 넘어갔다. “속이 너무 있고요.” 정훈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메이크업이 지워지지 않도록 앞머리를 고정해 두어서 반듯한 이마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보운이 눈을 옆으로 굴렸다. 시선을 피하는 게 재빨랐다. “뭔 소리야?” 보운이 뒤로 반 뼘쯤 거리를 벌렸다. “층층이 둘린 방 같아서. 형이 꼭 그래요. 영화 같기도 하고. 그 안에 들어간 게 뭐가 있긴 한가? 열어도 열어도…….” 말을 잇던 정훈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쭉 뺐다. 보운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겨울이고, 그 다음 방으로 가면, 또 겨울이고, 그리고 가면 또…….”
보운은 재잘거리는 정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쭉 밀어냈다. “시끄러워.” 그는 문득 한낮의 교차로에서 무언가를 알아낸 것이 저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존경하는 선배, 존경하는 연기자, 첫 멘토. 그건 정훈이 전부 보운을 향해 붙인 수식어였다. 거짓은 아닌 듯이 곧잘 보운을 보고 배우는 것들이 있었다. 그들의 영화는, 인물은 점점 그 구색을 갖추어 갔다. 가장 기록할 만한 성과는 정훈이 실제로 영화 속의 인물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껐다 켜는 게?” 연기와 인물에 관하여 보운이 조언했을 때, 정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안 되는데?” 보운은 역으로 정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뭐 노력이나 해야 하는 거야? 그냥 인물이 돼서, 그 인물이 됐다가, 컷 하면 그냥….” 손짓을 동원해 정훈을 이해시키려던 보운이 맥없이 포기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눈을 굴리던 정훈은 그 뒤로 대본을 붙들고 땀을 뻘뻘 흘려대는 날들을 보냈다.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그리곤 음악실에서 촬영하는 날 대뜸 말을 해오는 것이었다. 정훈은 신이 난 강아지처럼 히죽거리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제 진짜 그 애가 된 것 같아요. 뭐랄까…… 형이 사랑스럽게 보여요. 아, 그러니까.” 제 말에 스스로 놀란 정훈이 대본 든 손을 내저었다. “형이 연기하는 여보운이. 방을 나간 것 같달까. 나한테도 형처럼 칸칸이 문이 있던 거죠. 한 칸씩 나가고 있어요. 이걸 왜 전엔 몰랐지?” 그리고는 돌연 생각에 잠겨 쌔근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배우의 얼굴이었다. 정훈은 점점 필요한 걸 갖추어 가고 있었다. 보운은 알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역시 카메라가 그들을 담아내는 아주 짧은 순간만 감정을 다스리는 일만큼은 미숙해서, 정훈은 언제나 애를 먹었다. 장면이 끝나도 예의 그 열렬하고 순수한 애틋함이 담긴 눈동자로 보운을 바라보았다. 보운은 그럴 때마다 미끄러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어디로인지는 관계없었다. 그냥 한없이 미끄러질 때의 아슬아슬함과 아랫배의 찌릿한 통증이 잇따랐다. 정훈 씨, 그만. 그런 말로 그를 자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훈의 연정훈으로서 보운의 여보운이 완성됐다. 종래에는 순수하게 보일 정도로 짙은 풋내가 오히려 정훈이 연기하는 연정훈의 장점처럼 여겨졌다. 그건 때로는 치기로, 때로는 담을 허무는 치근거림으로 찍혔다. 보운은 어느 사이엔가 정훈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정훈과 눈을 마주치고, 이어폰을 나누어 끼거나 한담을 주고받을 때면 영원할 것 같은 몰입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정훈의 눈동자를 통해 극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어쩌면 배운 것은 그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얼굴 하나만은 번드르르하게 잡히는 정훈의 영상을 여러 번 돌려 보던 보운이 짜증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제 하늘은 쾌청할 때보다 흐릿하고 어두울 때가 더 많았고, 눈이 내리는 날이 이어졌으며, 바람은 한 번 부는 것만으로도 몸을 바짝 굳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유연해졌다. 퉁명스럽고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속절없이 연정훈에게 이끌리는 여보운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건…….
“보운 씨!” 보조 감독이 소리 높여 보운을 불렀다. 보운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교실 세트장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손을 흔들어 보운의 주의를 돌린 보조 감독은 털실 모자에, 목도리에, 두툼한 점퍼까지 입은 차림이었다. 사물함 쪽에서 정훈이 두 손을 모으고 그 안으로 입김을 불어 넣고 있었다. “아, 네.” 보운은 책상에 걸터앉은 제 허벅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은데…… 준비됐어요.” 떨떠름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입김과 함께 뱉어졌다.
촬영의 막바지였다. 긴 영화가 아니었기에 모든 게 빠르게 이루어졌다. 거기다 인물은 거의 둘이 전부였고, 보운은 뭘 하든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았다. 신호와 함께 보운이 고개를 들었다. 주뼛거리며 다가온 정훈은 기쁨과 두려움, 그리고 앞으로에 대한 희망을 품은 표정이었다. 이제 막 제게 날아든 첫사랑의 날개를 조심스럽게 만지는 소년의 얼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날것인지라 보운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바로 그……. 대사가 많지 않은 장면인지라 보운은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됐다. 그냥 정훈을 보고 기다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딱딱하게 언 신발 안에서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한 번도 이걸……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보운이 말했다. 붉어진 코끝이 발씬거렸다.
“그래서, 기분이 좀 남다르다?” 장난스럽게 맞받아친 정훈이 보운과 가까이 붙어 섰다. 시선이 뒤엉켰다. 정훈은 숨을 조절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을 땐 놀라울 정도로 흰 입김이 보이지 않았다. 노력하네. 보운은 짧은 감상을 남기곤 다음 대사를 뱉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 …….” 그리고, 정훈이 기습적으로 움직였다. 사랑에 맥을 잃은 소년이 상체를 숙였다. 짧게 보운의 입술 위로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부딪치더니 비틀거리며 떨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고백이라도 내지른 얼굴로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진심 전력의 사랑에 보운은 숨이 멎을 듯했다. 저런 연기로 다가오는 남자란 반칙이지 않은가…….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이게 저 애가 말한 문이고, 방인가? 바깥으로 오라는 손짓인가? 문득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훈기가 있어서는 안 되는 차가운 겨울 교실의 풍경에 끼어들고자 하는 열이 느껴졌다. 하지만, 하지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보운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입을 꼭 다물고 새치름한 고등학생, 이제 막 그 신분을 벗어던진 이상한 시기의 사내애를 연기했다.
그렇게 무마할 수 있었다. 보운이 각별한 천재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씬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감독은 그 장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며 극찬을 멈추지 않았다. 촬영이 마무리되고 나서도 보운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정훈은 보운이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담배 피우는 줄 몰랐어요, 형.”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말하던 정훈의 얼굴을 떠올리면 화가 난 게 맞는 것도 같았다.
분하고, 창피했으며, 한편으로는……. 보운은 회식 장소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차 맨 뒷자리에 타 상념에 잠겼다. 마지막 촬영을 기념하는 목적이었다. 편집이니 후처리니 하는 것들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보운과 정훈이 추가로 뭔가를 하는 일은 없을 거였다. 정훈과는 차가 나뉘어 다행이었다.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 보운은 시끌벅적한 소란 사이에서 묵묵히 입을 다문 채였다. 이따금 정말로 수고했다는 말에 희미하고 의식적인 웃음을 보이는 게 전부였다. 예약을 마쳐 일행을 반기는 식당으로 들어서면서도 보운은 머리 한쪽이 몽롱함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회식은 딱 예상한 만큼 요란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시원섭섭함에 사람들은 더 많이 웃었다. 그러다 촬영팀 막내가 술에 취해 훌쩍거렸고, 그것을 기점으로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리 대배우가 되실, 아니 이미 대배우인 보운 씨께서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지 않았더라면, 하는 말로 시작되는 감사 인사에 보운은 두 손을 내저어야만 했다. 저예산에 제작 확정마저 불투명한 작품이었으니 그들의 마음고생을 모를 일은 아니었다. 보운은 눈을 굴렸다. 우는 쪽이 따로 있다면, 정훈이 앉은 쪽은 웃음이 가득했다. 그들은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나 몸을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속이 답답했다. 훌쩍거리는 사람들을 만류하고 비틀거리며 자리를 나선 보운이 식당의 두꺼운 유리문을 밀었다. 차가운 공기가 삽시간에 그의 만면을 때렸다. “쓰…….” 찌푸린 채 적당한 장소를 찾는다. 보운은 식당 옆쪽으로 난 야트막한 골목을 찾아냈다. 곧 그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골목은 어떤 용도도 없이 그저 건물과 건물 사이를 구분하는 틈에 불과했다. 그래도 한 사람이 설 정도로 넉넉했으며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보운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절반 정도가 비워진 담배갑을 들여다 보다 한 개비를 능숙히 꺼내 물었다.
“피우는지 몰랐다… 라….” 정훈의 말에 발끈할 건 없었다.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는 사이 뺨과 이마로 차가움이 느껴졌다. “…….” 보운이 하늘을 살폈다. 손톱만 한 크기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하늘에는 구름이 두껍게 끼어 있었다.
그때, 입술이 닿았던 때. 그게 도대체 뭐였을까. 보운은 생각에 골몰하며 쭈그려 앉아 연기를 뱉었다. 겉은 차가웠고 속은 식당에서 얻어온 것인지, 아니면 그 교실에서 있었던 일의 불씨인지 모를 은근한 열로 달구어져 있었다. “…… …….” 처음으로 보운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앞에서 의식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연기자의 가면이 벗겨질 뻔한 것이다. 연기도, 현실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 “형.” 생각의 흐름을 끊고 들어온 목소리가 불쑥 내질러졌다. 보운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담배의 필터를 씹었다.
“형, 눈 오는데….” 정훈이 골목 안으로 불쑥 몸을 들였다. “여기서 뭐 해요.”
보운은 주춤거리며 한 걸음을 물러났다. 달칵, 달칵, 하는 소리가 속에서부터 울렸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정훈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보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정훈이 슬쩍 무릎을 구부렸다. “…… 역시 화났어요?” 정훈이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툭툭 떨어진 눈이 그들 발 사이로 쌓이고 있었다. 보운은 그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입김과 담배 연기가 뒤섞여 뿜어졌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이제 형이 연기하는 건 다 알아요.” 중얼거린 정훈이 손을 뻗었다.
정훈의 손은 차가웠다. 그리고 약간 거칠었다. 보운은 뺨에 닿은 손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고, 메이크업이 살짝 날아간 정훈의 얼굴이 보였다. 카메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야릇함이 그의 엷은 색 눈동자에 일렁거렸다. “이건 연기 아닌데. 넌 왜 그래?” 보운이 물었지만, 그건 더는 질문이 아니었다. 정훈은 대답 대신 버릇처럼 어깨를 으쓱거렸고, 고개를 숙였다. “더 배우고 싶은 게 있는데…….” 정훈의 말끝이 흐려졌다. 담배 연기가 주는 매캐함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의 거리는 이제 아주 가까웠다.
보운은 다시 그 이상하고 뜬금없는 훈기를 느꼈다. 이 골목에 만연한 겨울의 뉘앙스 한가운데 무언가가 콕 찍혔다. 그에 골몰하느라, 보운은 제 두 뺨을 감싼 손을 떨치지도 못했다. 손에 걸린 담배가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졌다. “나와요, 이제. 열렸잖아.” 정훈이 중얼거렸다.
“뭐…….” 보운이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렸다. 골목의 출구를 등진 정훈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어두웠다. 이곳에 해가 잘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데, 그럼에도…… 빛나고 있었다. 여러 빛으로 만발하며 보운을 잡아끌었다. 보운은 문득 후끈해지는 속에 입을 벌렸다. 그에 호응하듯 정훈이 고개를 더 깊이 기울였다. 입술이 맞물린다. 큼직한 눈송이가 그들의 머리에, 어깨에 얹혔다. 보운이 어깨를 떨었다.
정훈의 엄지가 보운의 눈 밑을 쓸었다. 정훈이 먼저 눈을 감고, 보운이 그 뒤를 따랐다. 정훈이 그를 달래듯 아랫입술을 빨며 부드럽게 진입했다. 입술은 차갑고 혓바닥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담배 냄새가 숨에 잔뜩 섞여 있었음에도 두 사람 모두 주춤거리는 법이 없었다. 차갑고, 뜨겁고, 차갑고, 또 뜨겁고…. 보운은 제 안에 심긴 여름의 씨앗을, 그 찬란히 빛나는 눈동자 같은 뜨거움을 느끼며 바닥으로 한 손을 짚었다. 교차하는 두 계절의 바람이 느껴졌다. 또, 한 계절이 저 바깥의 계절을 마주치는 순간이 골목에 휘몰아쳤다. 바짝 타들어 간 담배가 보운의 손끝을 뜨겁게 핥을 때까지, 두 사람은 입맞춤에 매몰되었다. 이제 곧 누군가가 그들을 찾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