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연정 프렐류드
Writter. 얌 CM | Design. 열 CM
연애란 두 사람이 합을 맞추어 달려 나가는 2인 3각 경기와 같다.
…… 고 보운은 정의했다. 물론 보운이 그런 경기에 참여한 경험일랑 전혀 없었다. 누군가와 짝을 맞추는 게 싫어 체육대회가 있는 기간이면 이런저런 변명을 들었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콩쿠르, 연습, 실습, 신체의 이상……. 보운은 자신의 지위를 정확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날 때부터 남다른 눈치와 기민한 감성으로 무장한 채 또래와는 조금 다르게 굴어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보운이 눈을 최대한 순하게 뜨면 어른들은 대개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겼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보운은 따지자면 동급생 중 그 누구보다 특혜를 누리는 쪽이었다.
인생은 불공평한 출발선에서 시작한다고들 하던가. 보운은 그에 한 치의 의심도 부당함도 느낀 적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고 싶지 않은 걸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면… 그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보운은 그때 해두지 않은 일들에, 과거의 판단력에 회의를 느꼈다. 그때 남과 맞춰보는 연습을 했더라면 조금은 달랐을까? 사실 연애는 살아오며 쌓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행하는 행위가 아닐까? 마음이 어지러웠다.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려니 사주의 신인지 뭔지가 비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도대체가.” 보운이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꾹 쥔 채였다. 화면에는 생전 들어가 보지도 않던 SNS 화면이 떠 있었다. 비행기 모드를 나타내는 아이콘이 상태바 위에서 깜빡거렸다. 인터넷도 켜질 않고, 한 화면을 벌써 몇 시간째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웬 해시태그니 이모지니 하는 것들이 잔뜩 달린 댓글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으며, 보운은 턱에 힘을 주었다. 보운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프로필도 다 채우지 않은 깡통 계정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정훈이 함께 뭔갈 맞춰보자며 두드려 만들어준 것이었다. “뭘 이런 걸 다 해.” 보운은 그때 그렇게 말한 것을 조금은 후회했다. 사용법이라든지 좀 더 알아 두었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요컨대, 정훈의 포트폴리오 계정에 하트 이모지를 무한대로 달아 두는 이 계정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 …….” 보운이 고개를 홱홱 저었다. “됐다.”
그래, 정말 됐다. 그런 게 아니어도 문제없었다. 보운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열두 시간가량을 꼬박 날아야 했다. 앞으로 열두 시간을 이 생각에 속 썩이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눈을 붙이는 게 상책일 테다. 기내식이 올라간 카트를 끌고 온 승무원을 물리며, 보운은 휴대전화 화면을 꺼버렸다. 보고 있는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었다. 인터넷이 갑자기 연결된다면 모를까. 고개를 틀면 푹신한 좌석 시트가 옆머리에 느껴졌다. 넓은 창으로 보이는 새까만 하늘은 앞과 뒤, 양옆의 방향이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참 신기해. 이런 걸 어떻게 알아내 기어코 날아가는 걸까. 보운은 어떻게든 생각의 활로를 틀어보려 애썼다. 정훈의 생각은 꾹꾹 누르고 또 눌러 가면서, 악착같이 하늘의 길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문제라면 보운 그 자신의 마음이 꼭 밤하늘 같다는 것이었다. 길이 길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맞는지……. 하나도 정확한 게 없었다. “아, 존나, 뭔… 자꾸 그쪽으로만 이어져, 생각이.” 보운이 괜히 제 옆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 그게 항상 문제였다. 정훈에게 곧장 물어봐도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별다른 대답이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지만. 항상 아는 선배니, 동기니, 동아리원이니, 협력자니…….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아.” 보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비행기는 사방이 분간되지 않는 어둠 속을 날고 있었다. 보운은 시트를 뒤로 젖히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요령이 없어서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 대처하지. 보운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연애라고는 정훈을 만나기 이전까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영역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심지어는 음악 속에서 말하는 사랑은 전부 거짓임을 알았다. 자신이 가진 생각을 가장 예쁜 방식으로 다듬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런 데에서는 보운 같은 상황을 다루지도 않았다. 모차르트가 애인이 많기를 했어 뭘 했어…. 보운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씨근덕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기체의 불규칙한 진동과 소음이 그의 마음 위를 약간은 거칠게 가로질렀다.
한국을 떠나온 지 고작 일주일이었다. 손 상태를 좀 더 지켜보자는 말로 이번 진료도 마무리되었고, 뼈에 잘 듣는다는 주사를 맞았으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는 재활에 전념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가 아닌 다른 방법도 있다는 조언 또한 얻었다. 지휘. 마스터 클래스는 유익했다. 네 성향에는 음악 전체를 이끄는 힘이 잘 맞을지도 몰라. 세계적인 지휘자의 입에서 나와서인지, 아니면 보운이 정말로 그런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운은 확실히 이끌렸다. 그러는 사이 정훈과 연락이 뜸해진 게 불안의 원인일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이런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몇 달이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정훈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조바심을 내는 걸지도 모르지. 보운은 그런 생각으로 자꾸만 벌어지려는 마음을 닫았다. 바람이 들고 상처를 입기 쉬운 때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초봄의 푸릇함이 코끝을 스치는 시기였으나, 보운은 그게 뭐든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했음엔 변함이 없었다. 나도 할 만큼 했어. 수화물을 기다리며 보운은 생각했다.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작은 캐리어 하나가 컨베이어 벨트 끝에서부터 보운이 선 자리를 향해 다가왔다. “에이씨.” 보운은 코앞까지 다가온 캐리어를 낚아채듯 들었다. 그다음 바로 이어 한 행동은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거였다. 휴대전화는 오랜만에 신호를 잡느라 약간 버벅거렸다. 캐리어 손잡이를 길게 빼고 끌며 보운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정훈에게서 온 메시지는 딱 하나였다. 어디쯤 왔어?
“어디쯤 왔어?” 보운이 눈을 홉떴다. “어디쯤 왔어어?”
비행기에서는 보지도 못할 연락이란 걸 뻔히 알면서! 게다가 저번 비행에서는 분명 서른두 개의 메시지를 보내놨던 정훈이었다. 언제 오냐, 보고 싶다, 내 생각은 좀 했냐…… 수도 없이 절절하고 간지러운 메시지들을 보냈으면서! 지금은 기껏해야 그때로부터 두 달이나 지났을 뿐이었는데……. 대학 생활이 즐겁다 이거지. 하트 이모지 찍어주는 애들 많다 이거지? 보운의 걸음이 더욱 사나워졌다. 게이트를 빠르게 가로지른다. 당장 택시 정류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만일 뒤에서 보운을 부르는 목소리가 없었더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었다.
“여보!” 청량하고 쾌활한 목소리가 공항을 쩌렁쩌렁 울렸다. “여기!”
정말이지 끔찍하게 생각해 마지않는 그 별명. “아, 씨발.” 그걸 부를 사람은 이제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잔뜩 씩씩거리며 걸어가던 보운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새벽이지만, 그래도 적잖은 인파 속 또렷하게 보이는 그…… 정훈이었다.
정훈은 펜스를 손으로 짚은 채, 다른 한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양 뺨이 약간 붉었다.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그 특유의 반짝거리는 기운은 조금도 바래지 않아서……. 보운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뭐해, 안 오고?” 정훈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결석 세 번까지는 괜찮다더라고.” 정훈은 꽤 자랑스럽게 말하며 보운의 캐리어를 제 손으로 끌어왔다. 얼떨결에 손잡이를 건넨 보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훈을 연신 힐끗거렸다. 고작 메시지 하나에 씩씩대던 것이 몇 분 전이었는데, 아득한 옛일인 양 낯설게 느껴졌다. 정훈이 보운의 허리로 은근슬쩍 팔을 둘렀다. 힘있게 안는 것보다는 그야말로 두른다는 표현이 잘 맞는 수준이었다. “어제까지 좀 바쁘기도 했고….” 정훈이 고개를 돌려 보운과 눈을 마주쳤다. “당장 안 보면 미칠 것 같아서?”
정훈은 정말이지 빛이 났다.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 특유의, 무엇으로도 흐리게 할 수 없는 광채였다. 갈비뼈 사이사이마다 꽉 채워진 광원이 있어서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
그리고 사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다정함. 보운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몇 번 까닥거렸다. 정훈의 진솔함은 항상 마음을 직선적으로 열고 들어오는 구석이 있었다. 연가를 연주할 때 아주 어렴풋하게만 가닿을 수 있었던 그러한 영역에 정훈은 언제나 항상 먼저 가 있었다. 보운의 역할은 그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 사랑의 악곡에서 항상 선행하는 마디인 정훈을……. 보운은 괜히 귓가가 뜨거워지는 기분에 헛기침을 터뜨렸다. “학교 좋다더니, 무슨….”
공항을 나서자 그들을 맞이하는 새벽바람은 신선하고 차가웠다. 이른 봄의 약간 비릿하고 청초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정훈은 서 있는 택시 뒷문을 열어 보운을 태우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너 집에 안 가?” 보운이 넌지시 묻자 어깨를 으쓱한 정훈이 히죽 웃었다. 곧 그가 익숙하게 보운의 집 주소를 기사에게 대는 사이 보운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제멋대로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싫지 않았다.
새벽 도로를 질주한 택시는 빠르게 보운의 본가에 도달했다. 정훈은 짐을 내리면서도 연신 아쉽다, 아쉬워, 하는 말을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택시가 떠나고서도 멀뚱히 보운을 바라보았다. “뭐, 왜?” 보운이 캐리어를 이리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뒤로 그것을 슬쩍 감춘 정훈이 미소 지었다. “자고 갈까?” 정훈의 목소리는 끔찍하게 달짝지근했다. 저쪽부터 밝아오는 흰 하늘이랑 제대로 어우러지는 음성이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보운이 본가를 돌아보았다. 고풍스러운 건물은 무심하게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문에 보이는 인영이 없으니 내심 다행이었다.
“…… 지랄. 집에 일하는 분 계셔.” 보운이 어쩐지 변명조로 대답했다.
“어? 뭐야 여보운.” 정훈이 팔꿈치를 세워 보운의 팔을 툭 건드렸다. “엉큼한데, 진짜. 뭐지? 난 그냥 자고 간다는 말이었는데? 너 기다리느라 나도 밤을…….”
“아, 좀.” 보운이 눈에 힘을 주었다. 속이 부글거리며 열을 내뿜었다. 정훈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보운을 곤란함에 빠뜨리는 걸 즐기곤 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게 있지, 양심 없냐?” 보운이 먼저 몸을 돌렸다. “꺼져.” 퍽 날카롭게 튀어나온 음성이 바닥에 패대기쳐진다.
그래, 대개는 이런 식으로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매듭이 지어지고는 했다. 그냥 그렇게 끝. 더도 덜도 없는 맺음 다음에는 또 다음의 만남이 있었다. 연인끼리의 싸움이야말로 칼로 물 베기라든가… 하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보운은 없는 연애 지식을 끌어모아 제 상태를 정의하려 노력했다.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거지 따위의 결론으로 향하면서도 꼬박꼬박 그런 짓을 해댔다. 그러는 사이 봄이 깊어졌다.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도 정훈은 연락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한텐 네가 제일 중요한데?” 좋아하는 걸 양팔 아래에 잔뜩 거느리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가끔 경이롭게 느껴지곤 했다.
둘은 연락만큼 자주 만났다. 정훈 덕이었다. 천재의 웅크림이라든지, 재기의 가능성이라든지…… 세간에서 보운을 두고 떠드는 소리로부터 달아날 구실이 필요했다. 언젠가는 그 주목도가 인생을 좌우하리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대중의 인정을 받아 높이 떠오르는 나……. 이제 그게 몇 년은 늦어진 것이었다. 음악은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존재 가치 또한 없다. 대중이 다시 나를 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재활과 치료에 전념해야 하는 때가 맞았다. 누가 뭐라고 한들…. 보운은 여전히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 아니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 하든, 이란 마음가짐만은 무리였다.
어쩔 수 없는 스물의 한계. 보운은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정의했고,
그렇기에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는 때. 정훈은 둘의 상태를 한데 묶어 속삭였다.
봄이었다. 보운은 대로 양옆을 따라 죽 늘어진 커다란 벚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번에 연분홍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꽃잎이 한창이었다. 따뜻한 공기에 향긋한 단내가 은밀하게 섞여 있어서, 걷기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진다. 보운은 제 옆에서 손을 꼭 붙든 채 이런저런 말을 해대는 정훈을 힐끗거렸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훈이 꼭 보고 싶다던 영화를 단둘이서만 보러 가는 길이었다. 정훈은 전날 통화에서부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감독이 얼마나 좋은 눈을 가졌는지,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보운은 그럴 때 그가 좋았다.
천진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줄 아는 그가… 정훈이. 보운이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움찔 놀란 정훈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손 안 아파?” 대수롭지 않은 일을 다루듯, 가볍게 물으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보운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초에 손은 전부 아물었다. 관건은 어떻게 잘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정훈과 손을 좀 잡는 정도로는 통증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정훈은 조심스러웠고, 보운에 마음을 지나치게 기울였다.
“좋긴 좋은데 약간 성가셔.” 길을 절반쯤 갔을 즈음 보운이 툭 던지듯 말했다.
“뭣.” 정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설마 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다. 언제나 여유롭고 느긋하게 굴던 잘생긴 얼굴이 약간 구깃해진다. 보운이 코로 길게 숨을 내뱉었다. “뭐, 내 옆에 누구 다른 사람이 있나.” 좋아하고 오래 같이 다니면 이런 것도 닮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걸음을 재촉하면 입을 허 벌린 정훈 또한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머리칼과 이마로 스치듯 흘러가는 꽃잎이 간지러웠다. “그냥 하는 말이지?” 정훈이 뒤늦게 되물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보운이 그답지 않은 짓궂음을 내보였다. 어쩌면 심술이었다.
그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계절이었다. 살랑이는 꽃잎, 바람, 물결 하나에 마음이 손쓸 수 없이 들떴다. 저 멀리 작은 영화관이 보였다. 보운은 정훈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곳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동인천의 목가적인 풍경에 잘 어울리는 건물이었다. 단층이었고, 상영관은 단 하나라고 했다. 적어도 오십 년은 더 된 곳이라 알음알음 찾아오는 그런 영화관. 한국에 몇 남지 않은, 오로지 개인이 영화를 좋아해서 적자를 감수하고도 운영하는 곳. “언젠가 꼭 가 보고 싶었어.” 영화관의 으슥한 입구를 지나며 정훈이 말했다. “음…… 의미 있는 사람이랑.”
의미 있는 사람. 보운은 발권하는 정훈을 힐끗거렸다. 그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며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영화관에 오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들은 함께였다. 그때그때 유행하거나 가장 화제가 되는 영화, 주로 정훈이 고른 영화를 같이 봤다. 때로는 영화관이 아니라 보운의 방이기도 했고, 정훈의 방이기도 했다. 그날 본 영화에 대해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발권 때문에 보운의 손을 잠깐 놓았던 정훈이 다시금 손을 뻗어왔다. 보운은 저도 모르게 그 손바닥 안으로 제 손을 끼우며 숨을 삼켰다.
간지러워. 어느새 먹구름 같던 심술은 걷히고 그런 표현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영화관 안이었는데도. 팝콘도 없이 자리에 앉으면서, 다리를 잔뜩 구겨야 하는 좁은 좌석에 대한 불편을 삼키면서, 팔걸이에 올려둔 손을 자연스럽게 감싸 덮는 정훈을 느끼면서…… 보운은 간지러워했다. 이상했다.
정훈도 유난히 말이 없었다. 어둠에 반쯤 잠긴 눈동자는 고집스럽게 아직 아무런 영상도 뜨지 않은 스크린을 주시했다. 손으로는 보운의 손등을 문지르고 쓰다듬으면서도. 보운은 그에게 어떤 말이라도 붙여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왜인지 실수라도 저지를 것 같았다. 그러기 좋은 때였다. 장소였고. …… 상영관에는 둘뿐이었다.
“시작한다.” 정훈이 중얼거렸다.
보운은 응, 하는 애매한 소리로 목을 울리며 앉은 몸을 뒤척거렸다. 좌석이 좁아서가 아니라 무한정 넓어지는 마음이 어느 곳에도 맞지 않아 불편했다. 눅눅한 밀폐 공간 특유의 냄새가 나는 데에도 하나도 성가시지 않았다. 보운이 손가락 틈을 살며시 벌리자 정훈이 기다렸다는 듯 그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웠다. 손등 위를 덮고 손끼리 꼭 맞물린 모양이 되도록 잡는다. 보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훈의 손바닥에서 슬며시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땀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찝찝함에 치를 떨었을 텐데, 싫지 않았다.
어떤 걸 죄 좋게 만드는 존재라는 게 있어도 되는 건가. 보운은 약간 두려웠다. 상영관이 너무 어두워서인지, 영화의 화질이 그저그런 편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영화는 기대했던 만큼이었다. 아니, 사실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보운은 마지막으로 아름다웠던 장면 몇 개, 이를테면 색색의 풍선이 하늘을 뒤덮던 때, 울면서 웃던 주인공의 얼굴 따위를 떠올렸다. 상영관을 나서며 얼핏 힐끔거린 정훈의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그 또한 비슷한 감상인 듯했다. 두 사람은 어쩐지 뺨이 붉게 익어 말 한마디도 없이 영화관을 나섰다. 평소였더라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을 정훈이 유난히 조용했다. 출구에 서서 잘 보았냐고 묻는 나이 지긋한 주인의 얼굴에 대고도 네에, 네, 하는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린 게 전부였다.
의미 있는 사람이랑.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며 보운은 그 문장을 환기했다.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뇌리에 선명했다. 얼굴이 붉어진 채 묵묵히 걷던 정훈이 돌아보며 걸음을 멈추었을 때도 보운은 그런 과거에 잠겨 있었다. 의미 있는 사람. 물론 정훈에게 의미를 따지자면 보운은 자신이 제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그와 시간을 보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투명한 눈동자가, 두 시간여를 지나온 하늘이 저쪽부터 붉게 물드는 빛에 영향을 깊이 받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보운은 모든 문장을 잊고 말았다.
“재밌었어?” 정훈이 물었다. “영화…….”
정훈의 뒤로 벚나무가 찬란했다. 사지를 쭉 뻗고 닿는 데까지 연분홍 생기를 떨치고 있었다.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은 티도 나지 않을 만큼 풍성해서, 보운은, 그게 너무나…….
“예뻤어.” 쥐어 짜내듯 대꾸한 보운이 정훈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보운이 있었고, 보운의 뒤로 선 벚나무들이 있었다. 반짝이는 생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작은 풍경도 한들거렸다. “데려와 줘서…… 아니지, 같이 와 줘서 고맙네.” 정적에 불편함을 느낀 보운이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정훈의 낯이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졌다. 두 뺨이 무척 붉었고, 가까이 선 몸에서 훈기가 느껴졌다. 봄의 것만이 아니었다. 정훈이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마음을 내도록 표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어코 두 팔을 뻗어 보운을 품에 안은 정훈이 나직하게 숨을 내뱉었다. 맞닿은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는 것이 느껴졌다. 보운은 한숨을 뱉지 않도록, 몸을 떨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한 채였다.
“아, 진짜 좋다.” 정훈이 중얼거렸다. “진짜 좋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음성의 울림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틈이 없었다. 보운은 고개를 주억이며 정훈의 등허리를 느리게 토닥거렸다.
“그냥 같이 살면 안 돼?” 그런 말을 하며 천천히 보운을 놓아주는 때, 정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 요즘엔 수신 알림음을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현장에 있으면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정훈이 고집스레 설정한 곡이었다. 보운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솔직히 싫지 않았다. 여전히 심장이 뛰기도 했고, 꽤 로맨틱하잖은가. 그런 생각이었다. 정훈이 전화를 받고 ‘그’ 이름을 내뱉기 전까지는.
“여보세요, 네, 유정 누나?”
“…… 뭐.” 보운이 눈썹을 들었다. 고개를 뒤로 살짝 빼고 휴대전화 너머 상대의 말을 듣는 듯하던 정훈이 눈동자를 굴려 보운을 바라보았다. 입 모양으로 잠시만, 하고 말하는 꼴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방금까지 제 몸을 안고 달래고 좋다, 좋다, 말하던 남자가 할 짓이라는 말인가? 거기다…… 유정이라니! 분명히 그 사람이다. 보운은 불현듯 떠올렸다.
시작은 정훈의 포트폴리오용 계정이었다. 영화 하는 사람들은 다 만든다나. 전학을 오면서부터는 계정을 비활성화했단 이야기를 하더니, 새로이 만들면서 그런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보운의 계정까지 만들어준 것이었다. 정훈의 얼굴일랑 올라오지도 않는 그 계정에 팔로워가 얼마나 빠르게 늘어나는지……. 보운은 믿을 수 없었다. 자주 확인하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들어갈 때마다 몇백 명씩 늘어나는 숫자에 보운의 기분은 고꾸러지기 십상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DM이니 뭐니 하는 게 잔뜩 올 게 빤했다. 댓글이 달리는 추세만 봐도 그랬다. 흑백으로 찍은 나무를 올려도 멋져요, 영화 포스터를 올려도 감성이 잘 맞는 것 같아요, 대단해요, 잘생겼어요…… 아니 얼굴도 올라오지 않는 계정에 웬 잘 생김? 보운이 손을 말아 쥐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꾹 누르며 파고들었다.
정훈은 여전히 통화에 한창이었다. 애매한 웃음기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거나, 낮게 대답하기도 했다. 유정 누나. 보운은 알았다. 그 하트 이모지를 미친 것처럼 다는 계정이었다. 정작 정훈은 반응 한 번 보이지 않는데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모든 게시글에 그렇게 달아 두던 계정! dbwjd0802? 알만 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지? 보운은 속으로 유정, 하는 이름을 몇 번 곱씹었다. 분이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그 유정 누나가 누군데?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정훈이 그 이름을 발음하는 기억은 이게 처음이었다.
“…… 어어, 여보운?” 어느새 통화를 마친 정훈이 보운의 눈앞에 손을 휘적거렸다. “뭐야? 치워.” 보운이 날카롭게 말했다.
정훈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분명히, 분명히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저 얼빠진 얼굴이란. 보운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다섯 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이제 절반쯤 붉게 물들어 장관이었다. 높은 건물이 없는 지대는 고개만 살짝 돌려도 아주 먼 곳까지 넓게 보였다. 오늘 그들의 마지막 종착지도 저 어딘가에 있었다. 새카만 바닷물이 철썩거리면서 안달을 내는 부둣가. 정훈의 중간고사 대체 과제에 쓸 영감이 필요하다는 말에 선뜻 데이트 코스에 넣은 것이었는데…….
“왜 그래, 왜 또 삐졌지?” 정훈이 고개를 훅 숙여 보운과 눈을 맞추려 들었다. 아직까지 장난기가 잔뜩 묻은 눈동자. 아까는 투명하고 예쁘게만 보였던 그 눈동자가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은지. 보운은 눈을 세모꼴로 뜨며 정훈의 뺨을 밀었다. “뭔 소리야, 또? 삐져? 이 새끼가, 존나… 안 비켜?” 보운이 일부러 크게 소리가 나는 발걸음으로 정훈과 거리를 벌렸다.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얼렁뚱땅 뒤따르는 정훈의 걸음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길의 끝까지를 아주 빠르게 가로질렀다. 정훈도 보운의 이상을 눈치챘는지 더 까불기보다는 눈치를 살피는 쪽을 택했다. 거의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게 문제였다. 보운은 슬며시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정훈과 보운의 벽은 분명히 그 차이가 있었다. 연애는 2인 3각, 연애는 2인 3각……. 아무리 그 생각을 되뇌어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부루퉁히 도로를 내다보는 보운 옆에 선 정훈이 뺨을 긁적거렸다.
“너 두고 통화 오래 안 할게.” 정훈 나름의 생각을 마친 결과가 그거였다. “뭐.” 보운이 묻자, 정훈이 허리를 구부렸다. 미간과 콧잔등에 살짝 주름이 진 채였다. 눈썹이 금방이라도 늘어져 뚝 떨어지기라도 할 듯했다. “미안해.” 정훈은 너무도 손쉽게…… 누군가에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게 쉬운 사내였다. 그를 사랑하는 보운이라면 더욱 속절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다. 보운은 하, 참 나, 무슨…… 하는 단어 몇 개를 간신히 중얼거리다,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말았다. 오늘 같은 날 계속 열을 내는 것도 웃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음부터 또 그랬다간 봐.” 죽여버린다. 덧붙인 보운이 저쪽에서부터 달려오는 버스에 시선을 두었다. 결국 그 유정 누나가 누구인지는 물어보지도 못한 채로.
그들은 부둣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낡고 털털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러니까 수학여행 같은 기분.” 정훈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맨 뒷자리를 냉큼 차지하여 기분이 좋아진 모양으로, 창가 쪽에 보운을 앉히곤 연신 싱글거렸다. 보운도 기분이 꽤 풀려선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정훈이 온전히 집중하는 건 나 하나다. 그런 생각이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하여튼 날파리가 무진 꼬이는 성격이어선……. 곁눈질로 흘겨보면 반질반질하고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저녁 버스의 어스름을 슬며시 얹고도 반짝거리는 그 얼굴이. 분명 저런 게 작용하는 거겠지. 보운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제가 보기에도 확실히 잘생긴 얼굴이기는 했으니 구태여 이견을 달 필요는 없었다.
버스는 요령 좋게 달려 나갔다. 색을 시시각각 달리하는 하늘이 많이 보여 좋았다. 버스가 너무 흔들릴 때면 정훈은 보운의 몸을 제게 기대게 했다.
어깨가…… 조금 단단해졌구나. 보운은 생각했다. 이제 그들은 남자애에서 청년으로 얼마든 변모할 수 있는 길목에 서 있었다. 정훈은 마치 맹아가 싹트는 신록의 가지 마냥 자라났다. 키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쪽의 구조부터가 변하는 듯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자신이 꿈꾸고 뜻하던 바다를 마주 보러 나아가는 일이 그를 자라게 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아주 다른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다는 예감. 보운은 문득 자신이 어딘가에 정체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비단 손의 부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보운의 일과, 집과 병원을 반복하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보운을 가두었다. 이렇게 정훈을 만나 숨통을 트이게 하고 햇볕과 물을 주는 일이 아니라면…… …….
“괜찮아?” 정훈이 보운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사고 이후 보운이 깊은 생각에 잠기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정훈은 알 수 있었다. 금방 돌아와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아득히, 저 먼 곳으로 달아날 것 같은 그 기분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정훈은 얼른 보운을 잡아챘다. 더는 멀리 가 버릴 수 없도록 품에 안고 고개를 비볐다. 이따금 보운이 뜻 모를 불안에 잠겨 흔들릴 때면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정훈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명확했다. 이는 보운의 인생이 어디까지나 보운의 것이라는 데에서 기반한다. 그의 선을 무작정 흐리게 만들고 싶으면서도……. 정훈이 하차 벨을 누르곤 보운의 팔을 잡았다. “곧 내려야 해. 다음이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보이는 일은 쉬웠다.
학교는 만족스럽고, 일생에 더 없을 기쁜 일들만 가득하다. 이대로라면 우수한 성적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지도교수는 정훈에게 ‘반짝이는 기지’가 있다고 평가했다. 고작 한 달을 겨우 봤을 뿐인데! 솔직히 기뻤다. 정훈은 제가 아는 모든 것을 꺼내어 놓고, 인정도 받고 싶었다. 무리하게 동아리며 부 활동, 공모전 등을 준비하게 된 것도 그 탓이었다. 조금은 피곤하면서도 확실하게 즐거웠다. 하나하나 해내고 나면 처음 입학할 때와는 전혀 달라진 누군가가 서 있을 게 분명했다. 이론으로만 알음알음 깨우쳤던 것들이 손에 다가와 잡히는 감각은 정훈을 흥분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그와 더 가까이, 더 오래 볼 수 없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정훈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보운을 잡아 주었다. 보운은 여전히 약간 부루퉁한 기색이었다. 아까보다는 많이 풀어졌음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듯했다. 보운이 마음에 불편한 일을 잔뜩 담아두는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다행이었다. 언젠간 말해주겠지, 혹은, 내키면 말해주겠지. 정훈은 그렇게 넘기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를 뒤따라 보운이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또 손을 잡는 것이다.
바다 냄새가 났다. 찝찔하고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안쪽보다 확실히 바람이 심했다. 옅은 녹색과 색색의 꽃들로 알록달록하던 풍경과도 전혀 달랐다. 무채색에 가까운 검은 물결과 채도 낮은 색의 컨테이너들이 보였다. 정훈이 입을 살짝 벌렸다. 이런 곳이 필요했다. 동인천에서 제대로 논 기억이라고 해 봐야 차이나타운에 들린 정도였으니 감회가 남다른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늦게까지 일하는 것 같아. 저쪽부터 불이 켜지기 시작하네.” 그의 옆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피던 보운이 말했다.
보운에게도 부두가 익숙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다라곤 자연 있는 그대로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뭐랄까, 지나치게 계산적이었다.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어두운 면이 가득했다. 인간의 손이 지나치게 많이 닿아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바다였다. 배를 받아내고 뱉어내는 행위를 반복하는 부분과, 무엇이 들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컨테이너들. 보운은 자꾸만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정리하길 포기했다. 바람이 거셌다. 정훈이 보운의 등으로 팔을 둘러 안았다. 그의 눈동자는 하나둘 들어오는 불빛으로 향했다. 배가 어둠에 길을 잃어선 안 되기 때문이리라.
하늘과 바다가 이렇게나 다르다. 보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다의 밤은 이르게 찾아온다고 하던가. 이제 붉은 기운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옅은 푸른색부터 검푸른 빛까지 다채롭게 깔린 바탕에 마찬가지로 어두운 구름이 빠르게 흘러갔다. 찝찌름한 소금기 섞인 바람은 내륙보다 약간 차가웠다.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듯했던 막막함이 가깝게 느껴졌다.
“뭐가 좀 떠올라?” 보운이 정훈의 품에 옆머리를 기댔다. 그들은 너른 부두에 거의 점처럼 작은 존재였다. 어떤 바람도 그들을 해칠 수 있을 듯했다. 보운의 어깨 위에서 손을 움직이던 정훈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알겠다. 조금은 감을 잡은 듯했다. 아주 조금은….
교수가 내건 조건은 아주 짧은 영상이지만, 이것이 영화가 되는 조건을 충족한다면 뭐든 좋다…… 였으므로, 그는 부두를 중심으로 촬영할 생각이었다. “다음 주면 꽃이 다 지려나?” 정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꽃피는 낮의 도로에서부터 차갑고 어두운 밤의 부두까지를 담을 것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 재단된 아름다움부터 야성까지를 전부 아우를 것이다. 자연을 철저히 위하는 시각에서 자연이 어떻게 갇히는지를….
정훈은 문득 낮의 영화를 떠올렸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영감에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결국 남은 것이라곤 보운의 꼼질거림 뿐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또 자연히 미소가 지어진다. 이제 여기가 마지막이라니. 정훈이 몸을 틀어 보운을 자신의 품으로 거의 가두다시피 했다.
“…….” 보운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왜?” 눈에 힘을 주어도 밉게 생기기보다는 새침을 떠는 것만 같아서, 정훈은 그냥 미소를 유지했다. 고개를 조금만 숙여도 이마끼리가 맞닿았다. 가까이서 어둠을 품은 눈동자를 살핀다. 보운은 피하기보다는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그 시선을 견뎠다. “아…… 진짜 좋은데.” 정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정말로, 진짜 좋은데.” 몇 번을 말해도 해갈되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여보운, 진짜로 같이 살면 안 돼?”
무거운 말이 가볍고 산뜻하게 툭 떨어진다. 보운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안 돼.” 그러면서도 말은 꽤 단호하게 조합된다. “너랑 무슨 수로 같이 살아, 내가.”
“왜 수가 없어.” 정훈이 진득하게 매달렸다. 이제 두 팔로 보운을 품에 붙들어 놓곤 고집스럽게 입을 맞추기도 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마다 보운이 눈을 깜빡거렸다. 정훈은 점점 구겨지는 미간을 모르는 체했다. “응, 응? 내가 다 할게. 청소도 다 하고, 뭐냐, 설거지도 다 하고….”
“씨발, 취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정훈이 마침내 뺨까지 붙여오자, 보운이 티 나게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밀어내려 정훈의 가슴 위에 얹었던 손에는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너 이렇게 들러붙는데, 밖에서도.” 보운이 고개를 저었다. 말랑하고 매끈한 뺨이 문질러지는 감각이 싫지 않다. 정훈에게 은근하게 풍기는 체취와 바다 냄새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같이 살면 뭔 꼴을 보려고?”
“왜 그런 걱정부터 해. 진짜 엉큼하다니까.” 정훈이 킥킥거리며 보운의 허리를 간질였다. 손가락을 세워 옆구리를 따라 긁으면 보운의 몸이 움찔 튀었다. “야!” 채 단어가 되지 못한, 욕설 이전의 어떤 덩어리가 입밖으로 꺼내어진다. 어어, 하고 우스꽝스럽게 귀 막는 시늉을 하던 정훈이 다시금 보운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견고하게, 틈도 없이, 부두의 어둠이 둘을 완전히 가려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힘을 다한 포옹이었다.
보운이 정훈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2인 3각, 그런 감각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부두 한쪽을 바라보며 아몬드 꼴로 가늘어지던 정훈의 눈을 떠올린다. 지금 몸을 감싼 정훈의 힘과 온기는 온전히 애정에 기인한 것이다. 보운이 주춤거리며 한쪽 팔을 정훈의 허리에 감았다.
“너, 진짜 나랑 살고 싶어?” 거리에서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바람이 더 차가워서인가, 봄밤의 으르렁거림이 느껴져서인가. 보운은 정훈의 가슴에 묻은 입과 코를 떼지 않고 웅얼거렸다. “엇, 간지러운데…… 응? 응.” 정훈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어찌나 결연한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한 보운이 뜸을 들였다.
정훈의 뜻이 있고 꿈이 있다. 의지가…….
나만큼이나 선명히 선 기둥이 있다. 보운은 그것을 이해했다. 영화를 보던 진중한 눈빛, 물론 내용은 피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었지만, 그리고…… 안아오는 팔, 그러면서도 잡아낸 걸 절대로 놓치지 않는 조리개의 목적성. 얄팍한 질투가 끼어들지언정 그의 중심은 흰 대리석 기둥이어서 흠집도 균열도 가질 않았다. 오늘로 그것이 확실해졌다. 그래도 서운한 것은 변함없었지만. 보운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가만히 보운의 반응만을 기다리던 정훈의 표정이 슬며시 밝아졌다.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기쁨이 드러난다.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보운은 그 박동을 느끼며 그와 사는 삶을 그려 보았다. 아마 좋을 것이다. 매일이 영화 같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보다 순간을 길게 늘여 주겠지. 그건 정훈의 특기였다.
“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좁은 집은 안 되겠다. 웬 화장실만 할 것 같아, 존나….” 보운이 고개를 슬쩍 떼어내며 말했다. 정훈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야, 야….” 어버버거리며 말을 더듬는 꼴이 제법 우습기는 해서, 보운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내 말이 틀려?”
정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한차례 뒤집으며 지나갔다.
“…… …….” 그리고 입술이 내밀어진다. “어쭈.” 보운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사납게 표정을 굳힌 채였다. “대답 안 하네.”
전적으로 맞다. 정훈은 아직까진, 언젠간 대성할 것이 분명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집에 손을 벌리는 신세였다. 아마 보운이 지금 사는 집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세방을 고르게 되리라. 꼴에 사내라고 “야 내가 다 낼게.” 같은 말은 해야겠으니……. 데리고 나온 주제에 월세도 반반, 보증금도 반반, 그런 일만큼은 끔찍하게 피하고 싶었다. 절대로!
“아무튼…… 살아보지도 않고 그러냐?” 정훈이 투덜거렸다. 눈을 샐쭉하게 뜨더니 보운의 손을 꼭 잡아 쥐곤 당긴다. “더 생각해 봐. 그렇게 말하지만 말고…. 내가 다 한다니까? 진짜? 맨날 예뻐해 주고, 너 병원 가는 것도 데려다주고, 로자벨라랑 알렉산더가 나 얼마나 좋아하는지 네가 더 잘 알지? 응?” 바람이 너무 차갑다. 이제 들어가자. 그런 말을 하면서도 사이사이 투덜거림을 알뜰하게 끼워 넣는 정훈이 조금 우스웠다. 자라서 나아가는가 싶으면 금세 옛날의 모습을 드러내며 변하지 않는 부분 또한 있다고 소리친다. 그런 정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운은 일부러 입을 다문 채 그를 따랐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으면서도 정훈은 연신 그 얘기였다. 왜 안 되는데, 왜 안 되는데…. 이제는 거의 칭얼거림으로 변모한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보운이 도착 안내 정보를 살폈다. “배차가 뭐 이래. 촌동네, 진짜.” 부두는 동인천에서도 가장자리였다. 종착역이자 시발점인 정류장은 두 사람이 앉으면 가득 찰 정도로 작았고, 그들이 타야 하는 버스는 32분이라는 극악무도한 시간을 띄워두고 있었다. 보운이 질린다는 듯 으으, 하는 소리를 내자 정훈이 히죽거렸다.
“난 좋기만 한데.” 덥썩 보운의 허벅지 위로 손을 올린 정훈이 말했다. “집에 늦게 들어가면 늦게 들어갈수록 좋다고, 여보운. 너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어서.”
정말 끊임없이 꼬시는구나. 보운은 어쩐지 맥이 탁 풀려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솔직히 흔들린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사지를 흔들며 떼를 쓰는 모양새에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보운이 허벅지 위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간지러워.” 보운이 말하자,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정훈이 그를 놓치지 않고 말꼬리를 잡았다.
“…… …….” 보운이 정훈을 쏘아보았다.
“응?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그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에 정훈이 웃었다.
봄밤의 하늘이 그의 뒤로 드리워 있었다.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땐 보지 못했던 벚나무 한 그루가 정류장 옆으로 우뚝 서 있어서, 바람에 꽃잎이 팔랑거리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뭐…….” 보운이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2인 3각, 2인 3각! 이건 혼자 달려 나가는 짝에게 보폭을 맞추는 일이다. 분명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보다 먼저 솔직하게 굴어. 유정인가 뭔가, 누군데.” 보운은 제 목소리가 아주 명확하고 또랑또랑하게 내뱉어짐에 내심 놀랐다.
정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애초에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던 인물이 보운의 입에 올라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정훈은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앉으며, 주변을 마구 둘러보았다. “여기서? 그 사람이 나온다고?”
정훈의 반응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의외였다. 보운은 찌르자마자 사과나 변명이 튀어나올 줄 알았던 것과는 다르게 얼이 빠진 듯한 정훈을 노려보았다. 등으로는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 짚은 기분이 드는 게……. “여보운 너 설마…….” 정훈의 동그랬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질투하냐?”
이번에 몸을 확 일으킨 건 보운이었다. “야, 너는… 씨발, 아니, 좀만 생각해도 알겠다. 질투? 이 미친 새끼가 눈치가 없어도….” 검지까지 확 펼친 채 부들거리는 모습을 올려다보던 정훈이 입을 살짝 벌렸다. “아니, 아니. 들어봐. 나 그 선배 진짜 싫어해.” 정훈이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진짜야, 응? 봐주라 이건 좀.” 덩달아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정훈이 손바닥으로 낯을 몇 번 쓸어 정리했다. 어찌나 웃어댔는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운은 속이 따끔거리며 어쩔 줄을 모르겠는 마음으로 미칠 것 같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 속을 마구 휩쓸었다.
“넌 싫어하는 사람한테 꼬박꼬박 누나, 누나거리냐? 제비야? 제비냐?” 보운이 분노에 차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뱉으면 뱉을수록 무언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꽃이고 밤이고 배경이고. 말을 뱉다 보니 보다 명확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앞에 선 놈이 정말로 제비처럼 보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건 그 선배가 그렇게 안 부르면 대답도 안 해서 그러지, 나도 진짜 별로야.” 웃음을 멈춘 정훈이, 그러나 아직까지도 느물거리는 얼굴로, 보운과의 거리를 훅 좁혔다.
보운의 뺨이 실룩거렸다. 그래, 저 말로써 확실해졌다. 그의 대학 생활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어떻게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들이대는 놈들로 가득하겠지.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 때도 크게 다른 건 아니었고……. “뭔 제비야. 여보운 오바한다.” 정훈이 보운의 이마에 제 이마를 꿍, 기대며 눈에 힘을 주었다. 감히 이런 타이밍에 눈에 힘을 줘? 그런 감상이었다. 보운은 기를 쓰고 눈을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마주친 눈동자는 낮에 보았던 것처럼 투명하고 예뻤다. 보운만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
힘을 준다고 뭐 달라지냐고.
그래서다. 절대로 설득당해서가 아니라, 그냥 분위기가 좋고 눈동자가 예뻐서. 보운은 합리화를 빠르게 마쳤다. 초견으로도 꽤 깔끔하게 연주하던 실력을 발휘해 흔들리는 마음의 박자를 갈무리했다.
“이번 중간 과제 말고, 시험 족보를 그 선배가 알고 있어서.” 정훈이 낮고 빠르게 속삭이곤 보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문질렀다. “삐졌어? 질투했어? 여보오….” 말끝을 은근하게 늘이며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애교를 떨어대기까지 했다. 보운은 그의 무게와 힘에 뒤로 밀려 비틀거렸다. 그러면서도 허리를 감싼 정훈의 팔 덕분에 완전히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씨발! 진지한 꼴을 못 봐.” 결국 참지 못한 보운이 정훈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정훈의 얼굴이 뒤로 빠진다. 붉은 뺨과 눈가가 보였다. 반짝거리면서 웃는 사내애, 연정훈이 그곳에 있었다. 이게 연정훈의 방식이다. 이게 연정훈의 박자이고……. 보운은 그걸 인정해야만 했다. 2인 3각!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그 주제가 머릿속에서 춤을 췄다.
보운은 사랑을 몰랐다. 연애라면 더 문외한이었다. 그러니 이건 그저…… 그래서, 처음이니까, 그렇기에 있을 수 있는 일. 보운은 아랫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물었다. 머리에 열이 오른다 싶더니 뺨이 뜨거웠다. 이게 빡친 건지 뭔지. 봄밤에 어울리지 않는 더위가 몸을 뒤덮었다.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꽃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보운은 턱을 떨며 정훈을 올려다보았다. 그저 시작이기에 벌어졌을 뿐인 간격을 단숨에 뛰어넘는 연인을.
“또다시…….” 보운이 더듬더듬 서두를 찾았다. 혀끝에 매듭을 짓지 못한 문장들이 떠다녔다. 정훈의 눈에 비친 얼굴이 엉망이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붉어지고,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머저리 꼴. 보운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런 걸로 고민하게 했다간 봐.” 이 새끼 안 되겠어. 내가 옆에서 감시라도 해야겠어. 분명 그런 생각이 앞섰는데 뱉어지는 건 죄 순정한 문장뿐이다. 이것도 연애 필터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동거고 뭐고 없어.” 어쩐지 어물거리는 기분으로 말을 마친 보운이 숨을 훅 내뱉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정훈은 씩씩거리는 보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말이 뭔지, 본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영화를 볼 땐 그렇게 쉬웠던 것들이 어긋난다. 그러더니 곧 목구멍을 찌를 듯 튀어 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어, 어…….” 정훈이 허둥지둥 보운의 몸을 끌어안았다. 다급히,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가슴팍이 맞닿는다.
재빠르게 내달리는 두 심장의 박자가 정확하게 맞물렸다. 같은 속도로, 같은 빠르기로 쿵쿵 울린다. “그래, 나도 사랑해.” 정훈이 민첩하게 속삭이고는 도착 정보를 힐끗 확인했다. 전광판은 그들이 기다리는 버스가 10분이면 도착한다는 신호를 뿜어냈다. 하지만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아마 오늘은 보운과 밤새도록, 이 속도를 유지하며, 함께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정훈이 부슬부슬한 보운의 뒷머리에 입술을 묻으며 슬며시 웃었다. 날카로운 팔꿈치가 명치께를 찌르며 밀어내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보운에게선 낮의 장면에서 묻어온 것이 분명한 냄새가 났다. 정훈이 느끼기에는 분명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운 봄의, 사랑의 냄새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