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의 분기점
Writter. 얌 CM | Design. 열 CM
분기는 시간을 덩어리로 만든다. 뭉뚱그리고 허무하게 만든다. 이전과 이후를 가로지르는 선의 역할이면서, 동시에 서랍 속에 장면을 넣고 닫아버리는 행위와 같다. 터닝 포인트라는 말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나 주어지는 특혜일는지도. 대개는 분기가 닥쳤을 때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준비된 자에게는 그만큼의 결실이 따른다고 하던가. 하지만 인생을 살며 곧 닥칠 일에 대한 예감과 긴밀히 소통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인류의 대부분은 닥치고서야 그것이 분기라는 것을 안다. 이 순간을 지나면 인생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완전히 틀어지리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게다가 이 분기라는 단어는 완전히 중립적이다. 오른쪽이 가시밭길이면서 행복할 수도, 왼쪽이 비단길이면서 불행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까보기 전까지 모른다는 말을 가장 우아하고 대중적으로 표현한 말은 아마도 “인생이란 하기 나름”이 아닐까? 이 법칙은 돈이 아주 많은 사람부터 태생이 박복한 사람까지 차등 없이 적용된다. 하루 아침에 도산한 세계 최대 기업에 대한 소식을 침대에 누워서도 볼 수 있는 이 시대에도……. 보운은 전혀 낯선 천장을 사납게 노려보다 고개를 틀었다.
티브이에서는 한 직원의 실수로 심각한 피해를 본 기업의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한때 세계 최고의 선박 회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그 회사는 정말로 어이없게 휘청거리다 그대로 폐업의 말로를 걸었다고 했다. 저것도 어떠한 분기였을 것이다. 직원은 자신의 선택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앞으로의 인생이 채무와 형기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짐작도 없었겠지. 그런가 하면 사측은 어떤가. 시스템 사이의 교묘한 틈으로부터 발생한 그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회사의 몰락까지 끌고 가리란 생각을 하기는 했을까? 아마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아 대비하지 못했으리라. 하나의 분기로 거대한 운명이 작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것에 비하면 보운이 느끼는 지금의 분기는 어찌나 하잘 없는가. 보운은 좋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는 그날 도로의 순간으로부터 지금까지를 하나의 분기로 정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하루를 고역으로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을 다소 큰 그림으로 구상해야만 한다. “세밀한 것에 집중하지 마세요.” 보운의 주치의는 단순함을 늘 강조했다. “보운, 당신은 병들지 않았습니다. 기능의 장애는 질병과는 다릅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걸러 들어오는 문장은 섬뜩하게 단정했고, 적확했다. 만약 의사가 한국어로 말했더라면 보운은 귀담아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보운, 수영에서는 팔을 넓게 뻗으면 유리합니다. 육상에서는 보폭을 넓게 하면 유리하고요.” 과연 그런가? 보운은 그런 종목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보운도 항상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쨌건 보운보다 훨씬 오래 공부한 사람이니 신빙성이 아주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보운이 생각한 방법이 이것이었다. 그는 팔을 쭉 뻗는 것도 다리를 넓게 찢는 것도 자신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시간을 그런 방식으로 넘는 일이었다. 다음 분기가 올 때까지 웅크린다. 그리고 무언가 다가오는 것 같으면 어떻게든 잡아채 더 나은 방향으로 꺾으리라. 그러지 못했던 순간을 후회한다. 보운은 이전 분기에서의 실패를 쓰게 곱씹었다. 과연 그 상황에서 자신이 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그랬다. 그래서 그는 새벽, 본능에 가깝게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감는 순간까지 곤두서 있었다.
분기점이 오기 전까지는 괜한 소란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보운은 멍하니 앞으로 닥쳐올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티브이 화면을 응시했다.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표면적으로 다가오는 정보들은 너무 큰 덩어리였다. 보운은 그것과 자신이 아주 긴밀하다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느꼈다. 문득 시선을 돌리면 벽에 걸린 시계는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훈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간 게 오전 열한 시였으니 꼬박 열두 시간째 귀가하지 않은 것이다. “이럴 거면 같이 안 살았어.” 보운은 이를 갈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개새끼가….” 곧 신경질적으로 티브이 전원을 끈 보운이 기계로부터 돌아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정훈이 돌아오기까지 달리 속을 식힐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 시간에 연습실로 향하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다. 그만큼 궁상맞은 예술가는 없을 테니…….
그냥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다.
부디 이 개자식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은 일이 또 다른 분기점이 아니기를.
보운은 동거에 회의적이었다. 애초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보운에게 관계란 구태여 노력을 해 가면서까지 구축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힘들게 이어질 거라면 처음부터 안 될 사이 아니냐고.” 보운이 매섭게 말하자 정훈이 입을 떡 벌리며 손을 휘적거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정훈의 목소리는 어딘가 들떠 있었다. 내내 무반응이던 보운이 그나마 관심을 가지는 것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운은 차가운 녹차를, 그걸 담은 유리잔에 맺히는 물방울을 노려보다시피 했다. 날이 더워 에어컨을 강하게 튼 실내에서도 얼음이 빠르게 녹았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카디건을 고쳐 입은 보운이 눈에 힘을 주었다.
“틀린 말도 아니고, 태클이야, 씨….” 보운은 일순 뜨겁게 달아오르는 속을 느끼며 녹차를 두어 모금 급히 삼켰다. 식도를 차게 식히며 내려간 것이 무색하게도 몇 초 후면 돌아올 것이 뻔했지만. “하자, 하자, 하자, 응?” 정훈은 보운이 씨근덕거리거나 말거나 제 의견을 피력하기 바빴다. 보운으로선 웬 이름도 다 읊기 힘든 요상한 파르페인지, 셰이크인지를 시켜놓고 한 입도 먹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이미 안 된다고 잘라 말한 걸 내내 조르는 통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내가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하고, 또….” 정훈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낯짝에 웃음이 훤했다.
“아니, 존나, 그건 당연한 거고. 그럼 나보고 시키려고 했단 거야 뭐야?” 보운이 정훈의 말허리를 끊고 들어갔다.
거기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어야 하는데. 정훈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시원한 웃음을 머금었다.
“당연한 거? 야…… 여보운, 너 그렇게 신경 안 쓰는 것처럼 굴더니. 사실 마음에 두고 있었단 말이지?” 기도 안 차는 소리를 한껏 신이 나 재잘거리던 정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운은 그때까지도 그 황당한 발언을 따라가지 못해 입을 살짝 벌린 채였다. 유리잔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서도 정훈은 멈추지 않았다.
너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아니다, 그 당연한 일 내가 해주겠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당연히 나무를 말하는 대목에서 보운은 불같이 화를 냈고 정훈은 웃으며 무마하려 들었다. 그냥 넘어가자니 석연찮았고 나서서 해명하자니 뱉은 말을 구차하게 번복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굴레의 연속이었다. 얼결에 정훈에게 휘말린 꼴이기도 했다. 정훈은 능수능란하게 보운을 잡고 흔들었다. 말 하나로 이렇게 저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계약서에 지장을 찍기 직전이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보운은 화들짝 놀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방, 저런 방, 또 이렇고 저런 방까지 하루에도 몇십 개씩 집 사진을 가져다 보여주는 정훈의 기강을 한 번은 잡아야 했다. 어쩌다 보니 그와 동거하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만 이대로 주도권을 모두 넘길 수는 없었다. 적어도 생활 공간은 철저히 보운의 취향에 맞춰져야 한다. 그게 아니면 안 된다. 이쯤 사고가 흘러가자 보운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연정훈 페이스에 말렸구나 내가.
사랑이 아니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 보운은 처음 어떤 길가의 담벼락에서 그 글귀를 보았었다. 아마 청년 예술 사업의 일환으로 개방했다고 했던가 그런 기억이었다. “미추를 떠나 일관성도 없고 지저분해.” 정훈과 함께 걷던 여름 보운은 딱 잘라 말했고, “하긴…. 좀 구리긴 하다. 뭐 이런 걸 하냐.” 정훈이 거들며 킥킥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팔꿈치만 살짝 스쳐도 불쾌한 땡볕 아래였으므로 보운은 필요 이상으로 짜증을 내비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사랑이 충동질을 부추기기라도 한대?”
그때 분명 정훈이 뭐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글쎄, 이제 와 보운은 그런 사소한 것까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 변하지 않는 생각은 지금도 그때도 변함없이 그 목록이 전부가 멍청한데다 구리기까지 하단 점이었다. 사랑해서 꼬박 잠을 설치고, 전전긍긍하고, 질투에 소리를 지르고, 폭우 속에서 세 시간을 서 있는다고? 보운의 기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당장 자신이 아니라 정훈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진절머리를 낼 텐데.
그렇게 조소했건만……. 보운은 이제 제가 나서서 집 사진을 찾아 보고 있는 순간을 깨닫고는 이마를 짚었다. 정훈과 관련한 일이라면 늘 이런 식이었다. 진짜 싫어, 싫다고. 그런 마음을 잔뜩 머금고 엄지로 스크롤을 내리는 모습은 어찌나 우스운가……. 보운은 자꾸만 불쑥불쑥 치미는 짜증을 다스리며 사진을 요모조모 꼼꼼히 뜯어보았다.
의외로 허락은 복병이 아니었다. 게다가 정훈과 함께 독립한다고 하니 집안에서는 말리기는커녕 더 좋은 곳, 더 보탤 것에 대해서만 떠들기까지 했다. “내가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인 건지, 세상이 상식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지…….” 보운이 중얼거리는 걸 들었으면서도 정훈은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새로 사야 하는 물건 목록’을 작성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차피 마지막엔 보운의 검토를 거치고 허락까지 떨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쓸데없는 집기를 적어 넣느라 야단이었다. 보운은 그게 뭐든 정훈이 건의한 것이라면 생필품이 아니고서야 절대적으로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보운, 심플하게. 간단하게. 짧고 명료하게. 주치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는 한국어로 진행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이런 상황에선 제대로 된 조언을 남길 수도 없을 텐데. 보운은 그냥 제멋대로 했다. 정훈의 결정 사사건건에 태클을 걸고 받아치는 깜냥을 보는 식으로. 정훈이 그걸 슬슬 스포츠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짜증스러웠지만 그뿐이었다 한 번 마음이 정해지자 모든 게 속전속결이었다. “우리 집.” 보운은 정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아, 제발. 이게 분기가 아니기를. 그렇게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더 벌어지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란스럽고 열받는 요소들로 가득할 것이기에. 또, 안 그래도 번잡하고 머리 아픈 일상에 분노를 가중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제발 이 선택이 분기점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막상 몇 집으로 후보가 좁혀지자 보운은 여러 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주치의가 본다면 경악할 만큼 세심한 부분까지 손이 닿았으면 하고 바랐다. 보운이 처음 선언한 안은 이랬다. 본가에서 가져온 음악 관련 잡지며 온갖 CD, 전자 피아노까지 가득 채운 방이 하나 있었고, 보운과 정훈의 방을 각각 나누었다. “난 그냥 방에서 작업하면 되는데?” 정훈은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제 기준으로는 얼토당토않은 말이었기에 보운은 심드렁했다. “뭔 소리야?” 보운은 팔짱을 끼곤 건성으로 정훈의 말을 넘기려 들었다. “일하는 곳이랑 자는 곳은 분리해야 하는 거 몰라?”
“헐…….” 정훈이 탄식했다. “그리고 각자 방은 또 뭐야? 난 당연히 너랑…….”
그 뒤로는 듣지도 않아서 기억이 불명확했으나 알 만했다. 같이 잘 생각이었다느니, 같은 방을 쓸 생각이었다느니 하는 말이었겠지. 보운은 그런 데선 더욱이 칼 같았다. 자신만의 공간은 무조건 필요했다. 보운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던 날들을 알았다. 그 시간은 절대로 흐려지지 않은 채, 다만 응축되어 검은 육면체의 모습으로 보운의 간 아래쪽에 잠들어 있었다. 깊게 쓴맛이 나는 그것은 이미 보운의 일부였다. 보운은 그것 때문에 절대로 외롭지 않았다. 어떤 강렬한 감정도 모두 무력화하는 과거는 힘이 셌다. 이따금 견디기 어려워질 때면 그걸 꺼내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도 방은 필요했다. 그리고 보운은 정훈의 안쪽에도 그런 검정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퉁명스럽게 툴툴거리지만 언젠가는 보운의 선택에 감읍하는 날이 오리라. 그때에서야 정말로 탁월했노라고 손뼉을 치겠지. 보운은 방을 나눈 것에 어떤 미련도 없었다.
그렇게나 깊은 생각을 한 것도 모르고 같은 방을 쓰자느니, 그러면 좋은 일도 자주 있을 것 아니냐느니…… 말해대는 정훈 때문에 보운은 영 언짢았다. 같은 방을 쓰는 건 분명 엿 같을 것이다. 구태여 상상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가정도, 연습도 불필요했다. 그냥 아닌 건 아니었다. “난 무조건 내 방 있어야 해. 웃기지 좀 마, 뒤지고 싶어?” 보운이 단단히 으름장을 놓자 정훈도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는 말았다. 개인 공간이 아니더라도 문제야 차고 넘쳤다. 방을 합치면 빈방이 생긴다. 연습실도 재활 장소도 집 밖에 있는 탓에 연습실을 또 만들기도 애매했으나 방이 놀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빈방을 두었다간 밖에서 아는 사람 만들기 대장인 정훈이 사람을 데려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정훈과 보운 사이에도 함께 아는 사람이 몇 있었으니 더더욱. 가능성조차 뿌리 뽑는 게 옳았다.
결국 정훈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큰 규모의, 보운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작은 규모의 집이 그들의 터가 되었다. “이렇게 좁은 집에 처음 살아봐.” 보운이 말하자 정훈이 왜 아니겠냐며 혀를 내두르는, 그런 규모의 집이었다. 신축 오피스텔답게 현관에서부터 보이는 고급스러움이 있었고 손볼 데가 적었다. 하루 이틀은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는데…… 따위의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정훈도 점차 익숙해졌다. 제 작업실에 크게 욕심이 없는 듯하더니 생기자마자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는 데 여념 없었다. 보운은 그걸 보며 “그러면 그렇지….”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 관심을 꺼버렸다. 자기만의 공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게다가 예술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정훈과 보운은 거실에서 짧게 시간을 보내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하루를 보냈다. 정훈이 학생 신분이었기에, 또 과 특성상 정훈이 워낙 대중없이 바빴으므로 실상 동거의 이점이라곤 보고 싶을 때 얼굴을 보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걸 깨달은 직후 보운은 “내가 이 새끼 얼굴을 보는 걸 이점으로 생각하다니.”하는 중얼거림으로 정훈을 기쁘게 했다. 그뿐인가? 둘은 살아온 궤가 너무도 달랐다. 생활 습관도, 그 습관을 수행하는 방식과 시간 단위마저도 달랐다. 동거 첫 주의 보운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본가에서 쓰던 침대를 가져오는 게 나았을는지도 몰랐다. 상등품의 매트리스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보운의 몸을 받쳐주고 있었으나, 보운은 자꾸만 뒤척거렸다. 새집 냄새도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많은 게 달라졌다. 게다가 선잠에라도 들기 무섭게 들려오는 물소리며 생활 소음…….
“괜히 너랑 살기로 했어.” 보운이 마른세수했다. “개같이 짜증 나. 얼굴 들이대면 단가? 로봇청소기는 멍청하고, 식기세척기는 못 믿겠고, 그리고….”
정훈은 입을 크게 벌려 햄버거를 먹으려다 말고 멀뚱히 보운을 바라보았다. 보운의 투덜거림을 일상적인 현상쯤으로 치부하는 게 분명하게도,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과 시름이 한 점도 없었다. “엥?” 고작 한 음절을 내뱉은 정훈이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얼굴 계속 볼 수 있는 거. 그게 좋은 거지. 그걸 위해서 하는 거라니까? 너도 이미 인정했잖아.” 정훈은 보운이 사이사이 가진 회의감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면 힘주어 상기했다. “난 그거로도 만족한다고.” 그리고 내가 널 좋아하잖아. 정훈은 그 말을 꼭 덧붙였다. 햄버거를 씹고 있든 아니든 그렇게 했다. 보운이 잊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는 듯이. 보운으로 말하자면… 정훈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고, 사랑하지 않는 건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든가. 보운은 늘 짤막하게 정리하고는 한숨을 푹 내뱉었다.
좋은데 싫어, 좋은데 짜증 나. 보운이 정훈에게 느끼는 감정을 정리하자면 그런 문장이 될 것이다. 내가 얘랑 왜 사귀고 있지? 싶은 기분이 들 때면 심장을 철렁하게 하는 얼굴을 들이대는 남자애. 기껏 다 참아줬더니 끝 간 데 없이 더 많은 걸 요구하는 욕심쟁이. 보운은 고집스럽게 소파 등받이를 노려보다가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대강 빗어 정리해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이제는 열한 시 삼십 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보운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까 생각하다 그만두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통유리창을 열어젖히면 제법 서늘해진 공기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제는 습기가 거의 없었다. 건조한 바람이 눈과 코, 입을 바싹 말린다.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층이었으므로 보운은 조심히 움직였다. 사고 이후 그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곤두세우고, 더 예민하게 굴고, 모든 가능성을 헤아려 하나씩 죽인다. 보운은 느릿느릿하고 조심스럽게 걸어 베란다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단단하고 세련된 조형의 난간에 팔을 걸치곤 아래를 바라보면 오피스텔로 들어오는 입구가 보였고…… 한산했다.
“이 씨발놈.” 보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가을이 오고 있건만 속의 더위는 좀처럼 가실 줄을 모른다.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해본다. 낮에는 두 개의 리프를 짰고 여러 번 고쳤다. 세부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사의 목소리를 기백 번은 떠올렸다가 지웠다. 강아지는 언제 보러 올 거냐는 어머니의 연락에는 대강대강 짜인 듯한 대답을 내놓았고, 아침으로 먹었던 샐러드드레싱이 질려 점심엔 빵을 데웠었지. 그리고 저녁 전에 올 정훈을 생각해 더 먹은 것이 없었다. 연습실에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집에 있기로 결정한 다음 정훈에게 연락했을 때까진 별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었다. 정훈의 목소리 주변으로 왁자한 웃음이 몇 번 들끓기는 했어도……. 아니지, 그때부터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정훈아, 이다음엔 어디로 갈래? 연정훈! 네 누나. 네 형 잠시만요. 어어 여보운. 연정훈 누구랑 통화하냐? 예쁜 애요.
예쁜 애라니. 씨발 이 새끼가 미쳤나. 통화 내용을 복기하던 보운이 눈을 부릅떴다. 정훈의 요새 행보는 정말이지 눈을 뜨고 봐 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통화라고 보운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행동거지 하며, 금방 들어오겠다고 해놓고 감히 열한 시, 열두 시가 다 되도록 연락 한번 없는 것 하며…… ……. 보운이 난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째 동거를 제안하고 졸라댄 건 정훈인데도 그를 기다리는 꼬락서니를 보이는 게 분했다. “돌아오면 뒤졌어.” 보운이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바람이 위로하듯 보운의 앞머리를 건드리고 춤을 추며 날아갔다.
정훈은 그로부터도 삼사십 분이 훌쩍 넘은 시간, 자정을 넘겨 돌아왔다. 취하진 않았으나 술 냄새가 엷게 풍겼다. 그 특유의 체취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는 되어서 보운은 2차로 불쾌했다. “야, 너 이럴 거면 나가.” 보운이 말하자 정훈이 풀어진 얼굴로 히죽 웃었다. 신발을 툭툭 벗고 들어오더니 두 팔을 뻗는 모습에 기가 찼다. 보운은 정훈이 자신을 안기 전에 뒤로 물러났다. “지금 내 말이 우습냐? 이 씨발……. 너 내가 우습게 보여서 그래?” 보운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발음이 아주 또렷했다. 정훈은 머릿속에 탁탁 박히는 문장에 잠시 당황한 듯싶었다.
“야아, 여보운, 삐쳤냐…?” 그때에서야 상황 파악이 완료된 듯한 정훈이 손등으로 입을 한 번 닦았다. “왜 그래.”
왜?
보운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손을 휘둘렀다. 어깨와 팔뚝에 각 한 대씩, 등짝에는 두 대의 엄벌이 내렸다. 찰싹거리는 마찰음마다 악악… 하고 힘없는 소리를 내지르던 정훈이 돌연 울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진짜 존나 아파….” 무어라 혼자 꿍얼거리더니 보운의 어깨에 고개를 비벼왔다. 여전히 술 냄새가 났고, 그런 행동으로는 보운의 짜증을 다스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랄하지 말고 씻으러 꺼져.” 보운이 차갑게 말하자 정훈은 입술을 비죽거리면서도 욕실을 향해 털레털레 걸어갔다. 멍청한 뒷모습을 잔뜩 째려보던 보운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더 많을 텐데. 보운은 정훈의 그 택도 없는 사람 좋음이 싫었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도 엿 같았고. 제 방 침대에 앉아 씨근덕거림을 멈추지 못하는 건 전부 정훈 때문이었다. “아 이 개새끼…….” 보운이 애꿎은 베개를 둔탁한 소리가 나도록 두들겼다.
“어어, 개새끼 왔다.”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잔뜩 웃음을 머금은 정훈이 허락도 없이 방으로 발을 들였다. “야.” 보운이 눈을 치떴지만 정훈은 멈추지 않았다. 침대 위까지 침범하는 게 금방이었다.
처음 며칠은 각자의 방에서 잘 자는가 싶더니, 중간에 그 불문율을 깨고 나온 건…… 당연하게도 정훈이었다. “네 냄새 난다.”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둘러대며 침대에 눕더니 잠들기까지 눌러앉는 기세가 아주 뻔뻔했다. “안 꺼져?” 보운이 암만 짜증을 낸다고 한들 물러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운을 미치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까 싶을 정도로 들이대질 않나…….
“왜, 나도 나름의 갈증이 있다 이 말이야.” 정훈의 말은 늘 그런 톤이었다. “네가 그립고, 뭐냐, 어? 아무튼 그래.” 영화를 만들더니 영화 주인공처럼 굴고자 다짐이라도 했는지. 보운은 정훈을 더 밀어내는 일에 쓰는 힘을 절약하자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대신 정훈이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짓을 하면 발로 차 침대 밑으로 떨어트릴 의사가 가득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 함께 잠들다 보니 확실히……. 알 것도 같았다. 정훈이 그렇게 말해대는 동거의 이점이. 불면으로 잔뜩 예민해져 있던 몸이 나른하게 가라앉는다. 정훈의 열기와 정훈의 체취, 정훈이 보여주는 뉘앙스가 보운을 휘감는다. 보운은 눈을 감기 무섭게 찾아오는 아침을 느꼈다. 정훈이 살그마니 침대를 빠져나가는 순간의 기척도, 다시 돌아올 땐 물과 바디워시 냄새를 물씬 풍긴다는 것도…….
그래, 이런 건 좋을지도 모르지. 보운은 잠결에 생각했고 눈을 뜨면 다시 한번 복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랄 마라.” 지금은 아니었다. 보운이 발로 정훈의 등을 밀었다. 술기운으로 발바닥에 닿는 등이 뜨끈뜨끈했다. 저 원수 같은 놈. 보운은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뿌득 소리가 나서 다 망한 것 같았지만.
그 힘에 밀리지도 않고 몸을 홱 돌린 정훈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아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단 듯이 단번에 보운을 안기까지 했다. “야!” 보운이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정훈의 덜 마른 머리칼이 뺨과 목덜미에 비벼졌다. 짜증이 확 솟구치던 것을 식힐 만큼…… 우습지만, 정말 그럴 만큼 차가운 기운이 끼쳤다. “아 이 씨발, 이 씨발…….” 갑작스러운 충격에 갈피를 잃은 보운이 연신 욕설을 잇새로 씹어댔다. 딱 노곤노곤하게 취한 정훈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하는 듯했다. 정훈의 손이 보운의 허리를 쓰다듬고 더듬다 떨어졌다. 더 나아갔다간 욕에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지난 학습의 결과로 알고 있는 탓이었다.
보운은 섬세했다. 개강부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탓에 전부 신경 써줄 여력일랑 없었지만, 정훈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아마 카카오톡은 보지도 않고 전화가 오지 않으니 신경질을 내는 게 분명했다. 동거를 시작한 지 두 달을 채워가는 때였고,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정훈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가 진정 두려운 건 동거로 인해 연인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이었는데, 보운의 상황을 보아하니 환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듯싶었다. 그럼 내 마음대로 해야지. 정훈은 짓궂은 남자애처럼 굴었다. 여덟이나 열 살쯤 먹은 그런 남자애처럼.
“미안해.” 정훈이 보운의 가슴팍에 고개를 비볐다. “근데 카톡은 좀 보면 안 되냐? 난…….” 그리고 방향을 급작스럽게 틀어 더 불쌍한 부분을 부각하려 들었다. “너한테 메시지 보냈는데 1이 안 사라지면 막, 심장이 벌렁벌렁거려.”
반은 사실이고 반은 조미료였다. 하지만 잘 먹힐 테지. 팔과 다리를 이용해 정훈을 마구 밀어내려던 보운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뭐, 씨발…….” 목소리도 힘이 많이 죽어 있었다. 역시. 정훈은 눈을 내리감으며 보운의 체취를 더 깊이 들어갔다. “뭐긴, 씨발이 아니라 네 남자친구지.” 정훈의 목소리가 기름처럼 물처럼 매끄럽고 찰랑거렸다. 보운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천장을 응시했다. 화를 누그러뜨리려는 게 아니다. 분노가 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훈이 원하던 바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은 한 침대에서 잤다. 정훈의 낙승이었고, 보운의 포기였다.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침대에서 재우고 나니 아침은 느리게 찾아왔다. 보운은 느리게 눈을 뜨는 아침…… 어쩐 일인지 운동도 가질 않고 눈을 감은 정훈의 낯을 곧장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미간이 구물구물 좁아지는가 싶더니 참았던 숨을 내뱉은 정훈이 반짝 눈꺼풀을 들었다. “이제 깼어?” 스스로 잘 해냈다는 둥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제 어깨를 다독거리던 정훈이 보운과의 거리를 좁혔다. “한 번은 너도 나 자는 거 보라고.” 보운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덧붙인 정훈이 보운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손등을 이용해서 아주 살짝.
싫어, 내지는 짜증 나, 죽어버려……. 뭐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쑥 들어가는 상냥함이었다. 섬세함이랄까, 다정함이랄까. 보운은 목구멍을 턱 치는 분노도 잊고 정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훈과의 관계는 늘 이런 식이었다.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감정과, 지나고 나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의문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들의 사이 벌어진 틈을 애정과 한숨이 채우고 들어간다. 정훈은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보운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그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는 보운의 뒤쪽에 난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햇빛과 보운이 맺혀 있었다. 너무 깨끗해서……. 보운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소중하단 듯이 굴 때면 실감이 났다. 정훈과 정말로 함께 살게 되었구나. 그리고 정훈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보운이 얌전해지자 정훈은 몇 번 정도 더 만지작거리던 머리칼을 놓아주곤 몸을 일으켰다. 슬쩍 입술을 붙여 볼까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였다. 보운은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다.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난 다음에는 약간 누그러지는 듯싶었으나 여전히 그랬다. 정훈은 이제야 조금쯤 보운을 다루는 방법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야?” 그러나 몸을 막 일으키려는 순간 보운이 중얼거렸다.
“…….” 정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운을 내려다보았다. 보운은 꽤 새초롬하고 짜증스러운 눈으로 정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뭘 봐?”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평소와 분명히 달랐다. 무언가를 가늠하고 예상하다가 그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적에나 짓는 그런 표정…… 분위기, 기색들. 정훈이 낮게 신음했다. “내가 미치지 그냥….” 정훈은 빠르게 중얼거리더니 보운의 뒷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싸 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푹신한 매트리스를 짚었다. 상체가 기울더니 보운의 입술 위로 짧고 잦은 입맞춤이 내린다. “읍, 좀, 씹…….” 보운이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사이로 짜증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야!” 기어코 입맞춤이 끝나질 않자 소리까지 내지른다.
정훈은 정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솔직하게는,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는 소리고 나발이고 하던 것이나 계속하고 싶었다. 보운은 모르는 눈치였으나 이런 적이 몇 번이나 되었다. 보운은 늘 너무 무방비했다. 아니지, 동거라는 게 대개 그렇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랑 하는 것도 아니고 보운이다! 정훈은 이미 그를 가지고 이렇고 저런, 또 저렇고 이런 생각을 몇 번이나 한 바 있었다. 보운도 말하기로는 그런 눈치였으나……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다. 둘 다 교복을 입고 있을 때, 한창 혈기 왕성할 그 나이. 그러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보운이 원하지 않으면? 솔직히 밖으로만 눈을 돌려도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가 더러 있는 판국에 보운이 더 소중해질 수밖엔 없었다.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동거를 결심한 것만으로도 보운이 어찌나 굽혀줬는지야 자명하잖은가…….
“…….” 정훈이 슬쩍 상체를 뒤로 물렸다.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터졌다. “…… 로.” 그러더니 별안간 집 지키는 개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훈이 방 문을 돌아보았고, 짜증과 두근거림의 경계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던 보운도 덩달아 그렇게 했다. “로봇청소기 돌려야겠다.” 삐걱거리며 말한 정훈이 침대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로봇은 청소기가 아니라 꼭 자신이라도 된다는 양 어색한 몸짓으로 방을 나서는 정훈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운이 숨을 푹 내뱉었다. “하는 줄 알았네….” 멀쩡한 척을 했지만 몸에 땀이 흥건했다. 긴장을 잔뜩 품고 있던 몸 구석구석이 저렸다. “미친 새끼.” 심장은 꼭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어댔다. 보운은 곧 로봇청소기를 가동하는 소리와 욕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물소리를 차례로 들으며 침대에 무너지듯 몸을 눕혔다.
정훈은 한 박자 밀린 생체 시계에도 곤란한 기색 없이 운동하고, 먹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어디 가냐?” 점심이 다 되어서야 방 밖으로 나온 보운이 묻자 정훈이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늘 토요일인데?” 정훈이 거실 구석으로 오도도 뛰어가더니 협탁에 놓인 캘린더를 가리켰다. “완전 토요일인데?”
토요일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늘 정훈과 보운이 함께 집을 나서는 날이기도 했다. 어제가 금요일이라 술이나 퍼마신 모양이군. 보운은 생각하며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정신 사나워, 자꾸 얼쩡거리면 안 나갈 줄 알아.” 보운을 닦달하던 정훈은 기어코 그 말까지 듣고서야 부루퉁하게 소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뭔가 목적이 있는 외출은 아니었다. 간단히 외출 준비를 마친 보운에게 정훈은 강아지 산책이라는 구실을 들었고, 마침 전일 어머니의 연락이 왔던 일을 떠올린 보운이 승낙했다. 보운의 본가에 들리고, 그러면서 겸사겸사 간식이라거나 하는 것을 사고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간단한 일을 하는 와중에도 둘은 여러 번 다투고 붙었다가 또 다투기를 반복했다. 다툰다니 말이 이상했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대개는 보운의 툭툭 던지는 말들에 정훈이 반응하는 식이었고, 가끔은 정훈의 역공에 보운이 역정을 내기도 했다. 두 마리의 강아지는 주인과 그의 애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가며 꼬리를 흔들었고.
그래도 좋은 날이었다. 가을 하늘은 넓고 맑았다. 아득하게 높은 하늘의 저쪽부터 작은 비행기가 이동하는 모습도 예뻤다. 눈 닿는 데마다 붉고 노란 나뭇잎들이 보여 마음이 괜히 들떴다. “가을을 제대로 표현하는 감독이 있다면 그건 진짜 대박일 텐데.” 정훈이 중얼거렸고, “음악은 있는데?” 보운이 받아치는 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다 산책길의 끝에서는 또 한 음악가를 두고 별로네, 아주 천재적이네 하는 다툼이 일어났지만. “너랑은 뭔 말을 못 하겠다.” 보운이 사납게 말하자 정훈은 “너랑 말하는 건 내가 유일하지 않고?” 하는 말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집 앞 편의점에서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는 극에까지 상황이 치달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거의 최악인 점이 뭔 줄 알아?” 오피스텔 입구에서 보운이 툭 뱉었다. 더 입을 다물고 있기엔 지나치게 열이 오른 탓에 음성은 정제되지 않은 채였다. “바로 이거야.” 그리곤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싫다 그치?” 정훈이 느긋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어쩌나, 난 그래서 좋은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보운의 까탈에 같이 성을 냈으면 냈지, 지금처럼 유연하게 반응하지는 못했을 이였다. 보운은 신발을 벗다 말고 정훈을 노려보았다. 정훈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휘파람이나 불며 보운을 지나쳐 걸어 들어갔다.
정훈이 간단히 상을 차리고 씻고 나오는 동안 보운은 산책에서 얻은 영감을 오선지 위에 옮겨 두었다. “나 다 씻었어.” 물기를 그득 머금은 정훈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앉은 자리에서 곡 하나를 뚝딱 써낼 수도 있을 것처럼 감정이 극에 치달은 참이었다. 그래도 가을의 정취가 옮겨붙은 몸이 찝찝했으므로 엉덩일 붙이고 앉아있는 건 몹쓸 일 같았다. 결국 보운은 욕실을 향했다.
샤워기 아래에서 보운은 불쑥 두려움을 느꼈다. 물줄기는 미지근했고, 샤워 부스 바깥의 욕실은 아주 정돈되어 있었다. 몸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대로 평생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은 안정감이 들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이 생활에,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졌음을 깨닫자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죽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지지 않도록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선 보운이 샤워부스 벽에 이마를 기댔다. 물줄기가 양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달라졌는데, 익숙하다. 이건…….
좋지 않았다. 혹시 내가 분기를 넘어왔나. 나도 모르게 또다시?
그럼 내가 서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좋은 길, 나쁜 길?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길? 혹은… 좋으면서 나쁜 길인가, 나쁘면서 좋은 길인가? 보운은 여전히 두려웠고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깨끗한 타일 벽이 그를 반겼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아마 차가울 것이었다. 보운이 시야를 닦아내듯 눈을 몇 번 깜빡거렸으나 타버린 시야의 가장자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몇 분을 더 그러고 서 있자 정훈이 문을 두드렸다. “여보운, 죽었어?” 평소보다 샤워 시간이 길어진 것을 염려하는 것이리라. 그 또한 보운을 두렵게 했다. 저 남자애…….
날 너무 잘 알아. 나에게 너무 신경을 쓰고 있어. 내 인생을, 삶의 경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곤 뻔뻔스럽게 예쁜 얼굴로 웃기나 하고. 보운은 축축한 손으로 얼굴을 거푸 씻었다. “곧 나가. 시끄러워.”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면서도 거푸.
그래서인지 저녁이 그저 그랬다. 보운이 영 깨작거리자 한참 눈치를 보던 정훈은 이번에도 침대 위로 몸을 올렸다. “여보운.” 끝이 죽죽 늘어나는 말투를 쓰는 걸 보아하니 보운에게서 심상찮음을 감지한 것이리라. 보운은 그것 또한 멋쩍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향해 등이 보이도록 돌아 누웠다. “하루는 그냥 좀 처 자면 안 되고?” 일부러 날카롭게 벼려진 말투를 꺼내 들었음에도, 정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운의 등에 대고 몸을 붙여오기까지 했다.
그냥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정훈은 슬쩍 몸을 눌러붙이며 보운의 뒷덜미에 입과 코끝을 묻었다. 슬슬 스치는 살갗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런 걸 보면 영 반응 안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럴 기분 아니거든?” 보운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묘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 정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피곤함을 어필하려는 건지 뭔지는 몰라도…. 역효과일지도. 정훈이 슬쩍 쪽,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습기가 조금 남아 있는 덜미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럼?” 정훈의 목소리에 노골적인 기색이 섞였다. “그럼 무슨 기분인데?”
글쎄. 모르겠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뭐라고 하면 좋은 기분인지. 보운은 뒤로 엉겨붙는 체온과 무게에 입을 살짝 벌리곤 숨을 삼켰다. 속이 더웠다. 좋은데 싫고, 짜증나는데 좋고. 그런 기분이 지금까지 유효했다. 잠시도 심각할 틈을 주지 않는 남자가 밉기도 하고… 그냥 모르는 척 어울려 주고 싶기도 했다. 복잡했다. “가을이 되면 원래 그래.” 정훈이 보운의 배로 손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마음 뜨고, 뒤숭숭하고, 복잡하다고 원래. 바람 불면 소스라치고… 좋은 볕에도 울컥하고.” 아마 영화에 쓰려던 대사일 것이다. 보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콧잔등이 맵고 사큰사큰하게 아파왔다. 눈을 찌푸리듯 감으면 정훈이 아랫도리를 바짝 붙였다.
“…… 키스해도 돼?” 고개 돌려 줘. 정훈의 목소리가 낮고 갈라져 있었다.
싫어, 좆 까, 죽어! 질척한 입맞춤을 당한 뒤로 보운은 그 세 단어를 쉬지도 않고 돌려 지껄였다. 팔로 정훈을 밀거나 손톱을 세우기도 했다. “아아. 아퍼. 고양이야?” 정훈은 그러거나 말거나 보운의 몸 위로 올라 자리를 잡곤 옷을 벗기 시작했다. 흐늘흐늘하고 얇은 천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며 간지러운 소리를 냈다. “나 얼마나 더 참아?” 정훈이 앙탈을 부리며 보운의 뺨을 살짝 핥았다. “넌 왜 그렇게 생각이 많냐고.”
“네가 이상할 정도로…… …….” 없는 거야.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정훈의 입술이 보운의 것을 덮었다. 목구멍 안에서 끙얼거리는 짜증을 삼키도록 혀를 뒤섞는다. 보운의 가슴이 살짝 부푸는가 싶더니 꺼지며 점차 힘이 풀렸다. 좆 같아……. 좆 같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정훈은 늘 그런 식이었다. 보운이 속에서부터 생각을 시끄럽게 볶고 있으면 모든 걸 간단하게 만들었다. 건드리고, 때때로는 내리누르는 식으로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더 넓은 것과 긴 것을 알았다. “간단하게…….” 보운은 목덜미를 핥는 정훈의 몸에서 달아나기 위해 뒤척거리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뭐라고?” 정훈이 물었으나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그의 손은 무척 뜨거웠고 보운의 몸 구석구석을 만지는 것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간지럽고 성가셔. 보운은 자꾸만 생각을 방해하는 손길에 미간을 좁혔다. 곧 그 위로도 입맞춤이 내렸다. 정훈은 굉장히 두서없고 거칠게 움직였다. 동시에 그 기쁨과 떨림이 다 느껴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꿈에도 모르게 발기한 성기를 허벅지 안쪽에 툭 기댈 때는 허리가 주뼛거리며 소름이 끼쳤다. “야……!” 보운이 악에 받쳐 목을 긁는 소리를 내자 정훈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네가 야한 걸 어쩌라고…… 어떻게 안 서냐?” 목소리가 전에 없이 시무룩했다.
정훈은 자꾸 중간에 길을 잃거나 헤매기는 했으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가을이라 그래.” 같은 말을 자꾸만 뒤섞으면서 보운의 혼을 쏙 빼놓고, 손바닥에 어느 사이엔가 보운의 성기를 가두어 문지르기까지 했다. 허리를 움찔거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문 보운의 흰자가 붉었다. 참고 있는 게 너무 많았다. 터질 것만 같아……. 귀두를 세심하게 문지르는 손가락이 밉고 싫었다. 동시에…… 좋았다. 어쨌거나 몸은 착실하게 반응했다. 더 발기할 수 없을 지경으로 단단해진 정훈의 것이 자꾸만 허벅지 안쪽과 사타구니를 쿡쿡 쑤시는 것도 한몫했다. “하아….” 정훈이 찌푸리며 신음했다. 낯이 붉은 것을 넘어 어깨까지 불긋하게 상기된 것이 보였다.
“일단 한 번 싸봐.” 정훈이 보운의 귀에 입술을 붙이며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보운은 속절없이 움찔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냥 이렇게 휩쓸리는 게 맞는 걸까. 동거도, 사는 방식도, 싫은 점도, 이제는…… 관계까지. 확신 없는 질문이 뱅뱅 돌았다. 곧 찌릿거리는 감각과 함께 허리가 살짝 들렸다. 색이 짙은 흰빛인 정액을 정훈의 손바닥 가득 쏟아내고 난 뒤로는 탈력감이 휘몰아쳤다. “아 씨발…… 진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거의 애원에 가까운 말이 흘러나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그랬다.
하지만 멈출 수야 없다. 그런 반응을 가장 원한 것이야 말로 정훈이었으니까. 정훈은 빠르게 손가락에 정액을 펴바르고 보운의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꽉 다물려 좁다기보다는 차라리 닫혀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입구가 만져졌다. 주름을 다 헤아릴 것처럼 그 위를 덧그리며 적시다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 보운의 발이 정훈의 어깨를 가격했다. 당연하게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정훈에게는 오로지 보운이 몸으로 먼저 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이 행위를 허락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정훈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보운에 침투했다…….
하나였던 손가락이 둘로, 셋으로 늘어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난한 사투였다. 둘 모두에게 그랬다. 보운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헛구역질을 뱉으면 정훈도 비처럼 식은땀을 쏟아냈다. 발기한 성기가 이젠 아플 지경이었다. 보운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허리를 뒤틀었는데, 정훈은 그를 달래려 몇 번이고 입맞춤을 내려야 했다. 기운이 다 빠진 모양인지 손가락을 빼내고 입구에 성기를 가져다 댈 때는 신음도 욕설도 발길질도 없었다.
정훈에게는 행운이었다. “윽…….” 하아, 하는 숨소리가 곧장 뒤따른다. 정훈은 좁은 안쪽을 가르고 들어감에 전율했다. 손가락으로 충분히 넓혔다고 생각했는데도 빠듯했다. 긴장을 해서일는지도 몰랐다. 탓에 삽입이 길었다. 하마터면 절반 정도 넣었을 때 사정할 뻔한 정훈이 아랫입술을 씹으며 간신히 참아냈다. 이게 어떻게 해낸 일인데……. 망치거나 우습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뜨거운 내벽이 꽉 조여들면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아랫배가 싸해졌다. 두 팔로 눈가를 가린 채 늘어진 보운이 끙끙거렸다.
욕을 내뱉지 못하는 건 단순히 입을 열기만 해도 신음이 샐 것만 같아서였다. 정훈을 보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추저분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벌어진 다리가 뻣뻣하게 아프고 뒤는 거의 녹아내리는 듯했다. 보운은 숨을 갈구했으나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얼마나 더 들어오는 거지? 거의 무서워질 때쯤에서야 정훈이 보운의 몸을 끌어안았다. 정훈의 몸에서 뛰는 맥박이 보운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윽…… 으으, 읍….” 보운은 힘껏 모든 걸 참아냈다.
언젠가 이것도 익숙해지는 날이 올까 봐, 정말로 이전까지는 다른 방향으로 삶이 바뀌는 게 당연해질까 봐…… 보운은 참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떨면서도 턱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정훈은 끈적하고 뜨겁게 조여오는 내벽에 귀두 끝을 깊이 파묻으며 숨을 골랐다. 마구잡이로 움직이고 흔들지 않아도 만족감이 몰아쳤다. 보운은 눈을 가린 것으로 안심하는 듯싶었지만, 그런 건 보지 않아도 알았다. 보운은 흐트러지고 녹아 무너져 있었다. “귀여워.” 정훈이 중얼거리며 보운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으으…!” 그에 성기가 더 깊이 박힌다. 보운은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와드드 떨며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모든 게 과했다. 달아나고 싶었다. 허공에 다리를 휘젓고서야 깨닫는다. 정훈은 보운을 구속하지도 않았다! 보운은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버둥거렸다. “쉬이….” 정훈이 그의 머리를 제 가슴에 대게 하고 팔로 둘러 안고는 허리를 살짝 움직였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주 살짝만 뒤로 빠졌던 기둥이 그대로 안으로 박혔다. 보운의 발끝이 확 움츠러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그렇게 하니 허리가 빠질 것 같았다. 몸이 이상했다. 정훈의 체향이 너무 짙었고, 머리가…… 머리가…….
“생각, 그만하고, …… 좋잖아.” 정훈이 헐떡거리며 눈을 깊게 감았다. 쾌감이 파도처럼 전신을 휩쓸었다. 그냥 이대로 쭉 계속 있고 싶다. 그런 말을 입속에서 으깨며 보운의 귓가에 입술을 비볐다. 보운도 모르는 사이 귓구멍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가을 맘껏 타. 아, 후으….”
보운은 딱 죽을 맛이었다. 슬쩍슬쩍 내벽을 짓누르는 중압감도 그랬고, 어느 사이엔가 질금거리며 말간 액체를 흘리기 시작하는 성기도 미웠다. 정훈의 등에 손을 걸치고 손톱을 세운 건 그 탓이었다. 정훈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래, 가을이었나. 보운은 자꾸만 껌뻑껌뻑 나가는 의식을 더는 다잡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헛수고였다. 어떡하지, 만약 이것조차 너무 당연하게 되면, 내 인생의 노선이 이대로 이 길을 향하면…… ……. “뭐 어때.” 정훈이 말했다. 열기가 목소리 밑바닥에서 일렁거렸다. 무심코 입으로 말했나, 그게 아니라면. 보운이 눈을 떴다. 정훈의 턱 끝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그의 가슴팍 위에 점자를 찍었다.
“진짜 귀여워…… 좋아해.” 정훈이 찌푸리며 말했다. 턱, 하고 숨통을 끊어놓을 것처럼 묵직하게 쳐들어오는 고백이었다. 보운은 대답 대신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사정이 없는 절정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아지는 순간이었다. 머릿속과 눈앞이 동시에 희게 바랬다. 정훈의 등에 감긴 팔에 힘이 왁 들어간다. 간단하게, 단순하게, 뭉뚱그리듯이……. 바로 그렇게 사고하기 시작한 보운의 입에서 울음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분기점을 넘어온 지 한참을 지나서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