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겹몽
Writter. 얌 CM | Design. 열 CM
이것은 기억의 재구성이다. 전생과 후생의 재구성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혹은 살아본 적 없는, 살아볼 수 없는 우주의 재구성. 이것은 절대로 이을 수 없는 운석의 무덤들을 꿰어 그려둔 지도이며, 무결점의 하늘을 찾아 영원한 태양의 광휘를 띄우려는 숭배의 시도이다. 이것은, 이것의 이름은.
문득 정훈은 자신이 촘촘히 쌓아 올린 단어들이 혀를 떠나가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단어 하나의 뜻까지를 제대로 안다고, 그리하여 이건 분명히 나의 감정이라고 자신했건만. 불현듯 목덜미가 뜨거워지고 길을 잃은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발표 도중이 아니었더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강의실을 뛰쳐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정훈이 발제를 멈추자 학우들이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정훈은 안으로 말려 들어오기 시작하는 아랫입술을 혀로 밀어냈다.
“사랑.” 수빈이 말했다. “…… 인 것도 같아서요.”
아마 그녀는 정훈의 침묵이 질문이리라 여긴 듯했다. 정훈이 어설프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구나 호감이 들게 만든다는 그 얼굴. “너는 연기엔 관심 없어?” 따위의 말을 수도 없이 듣게 만들었던 바로 그 얼굴을 들고서. 그러나 정훈은 그마저도 어쩐지 탐탁잖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심장이 거의 터질 것처럼 아팠다. 어디에서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의견을 피력하는 일이 지금만큼 힘들었던 적 없다. 정훈은 언제나 정확한 자리에 자신이 원한 장면을 넣을 수 있었다. 영화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맥락을 놓쳤는지 헤아리기조차 난감했다. 정훈은 손에 쥔 발제문을 쥐락펴락하며 끝부터 구겼다. 고개를 더 바짝 들었으나 자신을 멀뚱히 보고 있는 학우들의 눈과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정훈이 선 자세에서 오랫동안 진전을 보이지 않자, 뒤쪽에 앉아 있던 교수가 몸을 대신 일으켰다. 입봉만 하더라도 다 죽은 젊은 영화계에 파란을 일으켰다고 평가 받는 이였으나 돌연 교육계로 방향을 틀어버린 그 교수는 정훈을 특히 예뻐라했다. 지금만 해도 정훈의 실수 따위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지 않은가.
“물론 영화를 두고 하는 이야기겠지.” 교수가 수빈을 향해 고개를 살짝 까닥거리자, 수빈이 멋쩍게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또한 그것이 사랑이고.”
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그게 맞는 답처럼 두고 싶었다. 제 작업물에 대한 비겁한 도피였고, 처음이었으므로 속이 쓰렸다. 이후로는 정훈이 가편집을 마친 짧은 영상 몇 개를 보이는 식으로 나머지 시간이 채워졌다. 정훈은 벚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부두, 어두운 빈 교실, 가까이서 찍은 방음벽이 나오는 영상들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멍하니 응시했다.
“저, 좋았어요.” 수빈을 다시 만난 건 복도에서였다. 정훈은 일부러 느지막이 짐을 정리했다. 강의실에 남은 학생이 한 명도 없을 때쯤 해서야 천천히 빠져나왔는데, 수빈은 그런 정훈을 기다렸단 티를 숨기지도 않았다.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수빈이 정훈을 향해 반색했고 정훈은 입을 살짝 벌렸다. 웃는 것도 단순한 감탄의 표현도 아닌 모호한 표정이었다. “그 영상들.” 수빈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영화에 대한 정훈 학우님의 의견도 좋았고요.”
정훈은 수빈을 몰랐다. 정확하게는 수빈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정훈과 수빈은 엮일 일이 없었다. 정훈이 과 동기 전체와 두루 잘 지낸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수빈과 개인적으로 말을 튼 기억은 없었다. 술자리에서도 수빈은 얼굴을 잘 보이지 않았다. 강의 시간에 의견을 낸 것도 거의 처음이지 않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정훈의 기억 속 수빈은 흐릿하기만 했다. “사실.” 그래서였을까? 정훈은 다시 한번, 말을 듣지 않는 혀끝을 감각했다. “오래전에 써둔 문장들이에요.” 정훈은 처음 그 문장을 보았을 때를 상기했다. 입술 뒤쪽을 부지런히 문지르는 혀에서 솜사탕 맛이 났다.
수빈은 그러시구나, 아주 오래전부터 정훈 학우님은 그런 생각이 다 있으셨구나, 대단하다, 같은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그 영상들이요.” 아무래도 진짜 궁금했던 건 이쪽이었던 듯싶었다. 정훈이 네, 하고 가방을 고쳐 맸다. 슬슬 수빈이 불편해지려는 때였다. “원래 누굴 찍었던 걸 편집한 건가요?”
정훈은 의아하게 수빈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있던 구도에서 잘라낸 것 같아서요.” 수빈은 자신이 사실 편집 전공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정훈과 눈을 마주쳤다. “글쎄요.” 정훈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웃음이 뜻대로 나오질 않았다. 당장 그린 듯한 미소로 수빈을 치워버리고 싶었음에도. “그것도 사실, 좀 된 영상들이어서요. 편집한 기억은 없는데?” 정훈이 일말의 예의나마 갖춘 투로 말하자 수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꽤 빠른 종종걸음으로 정훈에게서 멀어졌다. 정훈은 멀어지는 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왜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을까?
수빈은.
발표 주제는 영화론이었다. 나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는 게 강의의 목적이었다. 다소 고루하지만, 학생을 알고 싶어 하는 교수라면 떠올렸을 만한 과정이었다. 사랑 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여지는 많지 않았다. 기실 정훈이 아니었더라도 그 자리에 앉은 누구나 영화를 사랑했다. 영화에 열렬했다. 묵묵하고 반응 없는 필름을 감으며 쾌락을 느끼는 답도 없는 부류들의 집합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수빈이 별스럽지도 않았으나, 정훈은 수빈의 뉘앙스를 포착했다. 수빈은 묘한 쑥스러움이 깃든 오묘한 눈초리로 정훈을 바라보았다.
그건 로맨스를 엿보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응답 없는 장르에 열띠게 반응하는 마니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이 있는 연애의 장을 들치고 그것을 읽어내리는 자의 표정. 그렇게 생각하자 찝찝해졌다. “……. 나 뭔 도착증 환자로 보이는 거 아님?” 정훈이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수빈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정훈도 몸을 돌려 걸음을 떼는 수밖에는 없었다.
수빈의 질문은 정훈을 그 뒤로도 오래 괴롭혔다. 그건 정훈이 작업물에 점점 확신을 잃어가는 시기와 맞물려 정훈의 마음을 병들게 했다.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던 학교 앞 호프집도, 강의가 없어도 드러누워 있던 영화과 휴게실도 영 마음에 차질 않았다. 그건 정훈이 적은 문장과 정훈 사이의 괴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 정훈은 회청색으로 물든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깨에 멘 카메라 스트랩이 유난히 세게 조이는 듯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좋아하던가?”
정훈은 분명 영화가 아니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영화의 신의 발을 쥐고 입을 맞추고 달과 별과 해가 담긴 눈으로 그를 경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에 끌려다니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대답 없는 입에 대고 입맞춤을 퍼부으려는 마음이었다면 영화과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훈은 영화를 다루고 싶었고, 영화와 친해지고 싶었다. 영화가 주는 만큼을 되돌려줄 것이지 영화에게 빚지고 살 생각일랑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이미 너무 많이 봤다. 예술이라는 가치에 압도당한 사람들. 정훈은 제 담당 교수를 잠깐 떠올렸다가,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렇다면 그 문장들은 도대체 누구를 향한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정훈은 그 문장을 침대와 벽 틈에서 구조했다. 우연이었다. 선잠에 빠져 몸을 뒤척이던 때였고, 한 팔을 크게 휘두르듯 들었다. 공기를 유연하고 부드럽게 가른 손이 무엇도 짚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쑥 빨려들어 갔다. 눈이 번쩍 떠지는 대신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정훈에게는 무언가를 끌어안고 자는 버릇이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침대로 들이는 일도 몸에 익을 만큼 자주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무의식중에 벌어진 그 일이 정훈을 암실과 같은 미스터리로 이끌었다. 정훈은 잠에서 완전하게 깨어나지 않은 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틈은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로 약간 차갑고 건조했다. 정훈은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얇은 종이였다. 마침내 정훈이 눈을 완전하게 떴을 때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창문으로 밝아오기 시작하는 창백한 빛을 맞으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쓰여 있었다, 문장들이.
문장들은 부정할 수 없는 정훈의 필체였다. 전공서에 편집 요청서에 때로는 사랑하는 감독들에게 보내던 주소 없는 편지에 적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기억에는 없었다. “내가 이런 말을 썼다고?” 정훈은 영화에 갇힌 영화 애호가처럼 흥분했으나 곧 사그라들었다. 추론은 길지 않았다. 아마 열렬한 갈망에서 나온 치기 어린 문장이었으리라. 열여덟이나 열아홉쯤에 썼으려나. 휘갈긴 다음에는 너무 중요하지 않아서 잊었고, 미래에 그 문장들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꿈에도 몰랐겠지. 정훈은 타당함으로 결론을 묶어버리고 그 문장들을 그대로 발제에 썼다.
요즈음 과제가 잘 풀리지 않는 탓도 있었다. 머리는 무거웠고 그 아래 몸은 자주 피로감을 호소했다. 옛날의 작업물을 돌려 보아도 응어리진 의구심이 목젖을 아프게 짓눌렀다. 그런 마음은 점점 커지더니 끝내는 영화에 대한 흥미까지 바닥으로 끌어내 버렸는데, 정훈은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몰랐다. 겪어본 적 없는 무력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두통은 자주 정훈의 의지를 꺾었다. 정훈은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은 지 사흘이 되었을 무렵에도 의식적 도주로에서의 체류를 멈추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쌓인 수백 통의 연락이 정훈의 필요를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에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훈은 그냥 존재했다. 방 안의 공기는 흐르지 않고 정훈의 정지 상태에 맞추어 균형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빛을 발하지 않는 모니터와, 냉기가 풀풀 올라오는 바닥이 검거나 푸른색이었다. 이틀 전에도 집주인이 문을 두드렸던 적이 있었다. 아니, 집배원이었나. 그게 아니라면 택배 기사님이었던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전부 수확 없이 돌아갔고 그들이 남긴 흔적이 문밖에 쌓여 있을 것이었다. 이번 두드림의 주인공도 그렇게 물러나게 되리라. 정훈이 알기로 오래간 집 밖을 확인한 흔적이 없는 현관은 방문자의 의지를 꺾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정훈의 예상과는 다르게 두드림은 계속해서 커졌다. “야, 이 씨발새끼야!” 정훈으로선 들을 일이 적은 욕설이 뒤따르는 것도 금방이었다. 정훈은 방에서 반쯤 나와 몸을 걸쳤다. 현관의 불투명한 유리 부분으로 인영이 어렴풋이 비쳤다. “뒤질래? 이 개새끼가, 야, 안 나와? 너 거기 있는 거… 씨발, 다 보이거든? 야!” 그림자는 광분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다. 정훈은 공포를 느끼기보다 먼저 당혹스러웠다. 저건 나를 찾는 게 아닐 것이다. 내가 좀 가볍게 다니기는 했지만, 그랬지만, 저렇게까지 원한을 살 일은…….
“연정훈 이 씨발놈아!”
…… …….
있던가?
정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현관 너머의 인영은 욕설을 쏟아 내고 있었다. 세상에, 어찌나 많이도 말하는지. “잠깐만요.” 정훈이 떨떠름하게 말하며 차림새를 정돈했다. 몇 대 맞을 걸 감안하더라도 멀끔한 게 나았다. 그리고, 저 정도 키라면 제압하는 게 어렵진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두 손으로 현관을 두드려 대고 있으니 흉기는 없을 테고. 나름 논리적으로 추론을 마친 정훈이 현관으로 다가가 단번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서 있던 인영이 휘청거리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 어 이 씹…….” 남자가 손을 쭉 뻗어 정훈을 짚었다. “어?” 정훈이 당황하며 남자의 양 어깨를 잡아 쥐었다. 퍼뜩 고개를 든 남자가 정훈을 노려보았다. “안 놔?” 날카로운 목소리만큼이나 날카로운 눈매였다. 겨울의 납빛이 묵직하게 고인 노란 눈동자가 시야를 향해 폭력적으로 뛰어들었다. 정훈이 두 손을 떼며 손바닥을 내보이는 사이, 남자가 정훈의 정강이를 발로 밀어 치웠다. “야,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남자가 거의 주먹을 꽂을 기색으로 손을 흔들었다. 문을 어찌나 두드렸는지 손등이 거의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정훈은 이 모든 게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처음 보는 남자가 이렇게까지 적대적으로 나올 일은 뭐란 말인가.
“그게, 도대체 왜…?” 정훈은 머릿속을 바쁘게 뒤졌다. 최근에는 남이 좋아하던 여자랑 잘된 적도 없었고, 또…… 밖으로 나가지 않은 기간 동안 분명히 조별 과제도 없는 것도 확인했고, 연락을 다 안 보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왜?” 남자가 정훈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밀듯이 쳤다. “네 동기가 나한테까지 연락이 오게 만들어?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씹, 졸라 미쳤냐?”
“뭐라고?” 정훈이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 동기가 당신한테, 왜…….”
그리고 써늘한 정적이 둘 사이에 자리 잡았다. 뺨을 할퀴고 들어오는 찬바람의 존재감도 그때에서야 느껴졌다. 정훈이 미친 듯이 가능성 있는 루트를 떠올리고 추측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남자는 누구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이, 입을 살짝 벌리고 굳어 있었다. 실제로 몇 대 맞다시피 한 건 정훈임에도 불구하고. “너…….” 남자의 표정이 구 겨졌다. 분노로 가득했던 낯에 묽은 수심이 일렁거렸다. 정훈은 갈비뼈와 갈비뼈 틈을 날카롭게 가르고 들어오는 차가움에 움찔 놀랐다. 처음 보는 남자를 앞에 두고 느낄 만한 기분은 아닌 탓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검은 머리칼을 탈탈 털었다. 열을 식히려는 듯했다. 이 추위에 김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구는 남자. 정훈은 얼떨떨함을 도저히 숨기질 못했다. “이게 도대체…….” 정훈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내 동기 누가……?”
사실 정훈도 한계에 가까웠다. 이제 놀람을 넘어 불쾌해지려는 참이었다. 남의 집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설명도 없이 탓만 해대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게다가 동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너 씨발, 나 몰라?” 한참 씩씩거리며 분을 누그러뜨리려 시도하던 남자가 물었다. 말꼬리가 축 늘어져 담긴 욕설을 상쇄한, 무기력한 문장이었다. 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자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반짝, 거리는 빛의 파편이 톡 튀어 올랐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정훈은 무심코 남자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겨울날답게 날이 흐렸고, 추 웠다. “모르겠는데. 이제… 그만 나가 주라.” 정훈이 난처함을 과장해서 드러내며 남자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놔.” 남자가 눈을 홉떴다. “씹, 나는… 난, 야, 여보운이야. 대가리 맞은 건 알겠는데 똑똑히 기억해. 알겠어?”
보운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정훈이 무어라 웅얼거렸지만, 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큰 소리와 함께 현관이 닫혔다. 웬 소란인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던 주민들이 재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보운은 상체를 숙이고 턱턱 차오르는 숨을 토했다. 입김과 함께 쏟아진 구역질이 있었다. 한계 이상으로 회복했던 두 손이 지끈거리며 아팠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씨발, 씨발, 씨발…….” 보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해도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현대 사회의 문제라 함은 한 다리도 채 건너지 않고 지구촌 사람들을 죄 손바닥 안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보운에게 온 낯선 연락도 그런 방식으로 알아낸 길이었을 테다. 정훈의 SNS 계정을 타고 왔다는 사실을 정중히 밝혔으니까. 보운은 영화과라고 쓰인 프로필을 보자마자 이를 득득 갈았지만, 그 프로필이 던진 문장을 보자 분노보다는…… 기고만장해졌다. 안녕하세요. 정훈이 동기입니다. 정훈이가 요즘 학교에 나오질 않는데…… 혹시……. 보운은 남몰래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그 연정훈이 실연의 아픔 에 끙끙거리며 앓고 있다는 것 같은데?
물론, 정훈의 동기라고 소개한 상대는 보운을 단순히 정훈의 친구로 여기는 듯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밀한 사정일랑 남들이 알아서도 안 되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보운은 단지 정훈을 죽도록… 그 좋아하는 학교도 나가지 않도록 몰아넣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처음 이틀은 그랬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지 그랬어?
잠깐 얼굴 보는 정도면 허락해줄게.
야, 이 씨발 나 씹냐?
너 미쳤냐?
죽었냐?
연정훈?
…….
놀랍게도, 실연의 아픔에 벌벌 떨며 짜고 있을 ‘그 연정훈’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심지어는 보운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걸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읽음 표시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동기는 보운에게 희망을 놓은 것인지 오프라인 상태를 유지했고, 보운의 속만 타들어갔다.
그렇게 사흘째가 되자 보운은 더는 견딜 수 없어졌다. 속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 헤어진 뒤에도 얼굴을 슬쩍슬쩍 내비치며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던 연정훈이 맞기는 한 건가? 그 짜증과 분노,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보운의 등을 떠밀었다. 보운은 정훈의 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런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손의 귀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남의 집 현관을 미친 듯이 두드린 그 이야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미친 새끼…….” 보운이 이를 악물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거의 흐느낌이나 웃음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기억을 지워…… ……?” 머리를 터뜨릴 듯한 분노로 몸이 덜덜 떨렸다. 절대로, 절대로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감히. 보운이 이를 갈았다. 근래 예술계에서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가 세워졌단 게 바로 그것이었다. 예술과 망각은 예로부터 오랜 영혼의 단짝 아니던가. 망각을 두려워하거나, 친근해하거나는 오로지 예술가의 몫이었다. 어떤 예술가는 퇴색되어가는 정신마저 예술 작품으로 남겼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보운에게는 멍청한 짓에 불과했다. “하나도 아름답지 않아. 예술에 형식이 우선한다고 믿는 얼간이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야.” 보운이 혹평을 내놓자, 정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었다. “뜻깊잖아. 우리가 겪을 수 없는 걸 겪게 해주기도 하고?” 정훈은 매사 가벼운 주제에 꼭 예술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진중해지는 것이, 보운이 보기엔 아주 얄밉기 그지없었다.
“진정 예술을 사랑한다면 난…….” 보운이 미간을 좁히자, 정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넌?” 어떻게 할 건데?
그 눈동자에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잊게 된다면 지휘하지 않을 거야. 멍청한 춤이나 추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보운이 혀를 찼다. “그리고 잊고 싶은 것도 없거든? 그런 게 있는 애들 다 졸라, 등신 같애. 나약해 빠져가지곤.”
정훈은 그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지옥에서 돌아온 보운이 지옥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 것으로 모든 것은 증명되었다. 보운은 그 기억마저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다. “난…….” 정훈은 그때,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몸을 돌렸는데, 야속하게도 보운은 그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를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게 회피의 말일 줄이야. 보운은 빠르게 움직였다. 정훈의 반응은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었다. 아무리 대판 싸우고 헤어졌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초면인 것처럼 구는 게 말이나 되는가? 처음 보는 것, 헤어진 연인이 아니라 흔들리는 갈대나 내리는 눈송이를 보는 듯이 무심하고 곤란해 보이던 그 눈동자.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달아날 새끼인 걸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어.” 보운이 이를 악물고 그 사이로 발음을 짜내듯 중얼거렸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다. 보운은 반나절이 채 되기도 전에 라쿠나를 찾아냈다.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주는 이 회사는 남루한 건물에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이 영업 중이었다. 보운에게 이곳을 알려주는 대가를 톡톡하게 챙긴 브로커는 신이 나서 물어보지 않은 정보까지 줄줄 말했다. 특히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요. 정말 비극적이죠.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답니다……. 보운은 브로커의 연락처를 미련 없이 지워버렸다.
라쿠나 내부는 가정집과 닮아 있었다. 물론 보운은 돈을 자루로 주고 살아달라고 애원해도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보운이 멀뚱히 현관에 서 있던 때, 안쪽에서 중후한 초로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머.” 언뜻 음악 교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보운을 빤히 바라보더니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님인가요?”
아니면 뭐겠나요. 보운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계약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약관조차 몇 개 없었고, 사인 두어 번과 선금이면 모든 절차가 끝났다. 여자는 도무지 신뢰가 가질 않는 조악한 기계를 내보였는데, 보운은 그게 깨끗한 건 맞는지 여러 번 되물었다. 정말로 깨끗한가요, 닦기는 하나요, 소독약은……? 여자는 그 모든 날카로운 물음에 싹싹하게 대답하면서, 정말이지 걱정은 말라는 말을 사이사이 끼워 넣었다.
그건 보운과 비슷한 이유로 이곳을 찾은 사람이 더러 있다는 증명이었다. 보운은 짜증스러운 마음을 그득 안은 채 기계에 누웠다. 기계, 라기보다는 미용실 의자에 가까운 조잡함이 있었지만 괜찮았다. 보운은 제가 들인 돈을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틀림없을 거야. 연정훈이라는 남자도 여기에 왔었냐는 물음이 입술까지 달려 나왔지만, 간신히 삼켜내고 나면, 차가운 의자 위 몸을 꽁꽁 굳히고 누운 보운의 머리 위로 관 같은 기계가 씌워졌다.
“자, 이제 눈을 감아 볼래요?” 여자가 웃었다.
“…… …….” 보운은 최대한 느리게 눈꺼풀을 닫았다. 온통 마호가니 원목으로 뒤덮인 방이 천천히 저편으로 밀려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와 누군가의 대화가 이어져서 보운은 일어나고 싶었다. 조수나 직원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그러나 기계에서 어떤 전파라도 나오는 것인지 몸이 무력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여자가 여러 번 말했다. 보운은 사지로부터 힘이 쭉 빠져나가도록 그냥 두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게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
“나한테 하는 말이야?”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린다. 얼굴 없는 정훈이 손을 휘젓는다.
메스껍다. 구토가 치밀었으나 입을 벌려도 목구멍이 까맣게 메워진 듯 나오는 건 없다. “아, 씨.”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머리가 아프고, 알고 있는 장면들이 눈앞에서 질주한다. 아니, 질주하는 건.
“야, 괜찮아?” 정훈이 묻는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정훈이. “나 봐봐.”
그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걱정이 물기처럼 어려 있어서, 그리운 냄새가 나서……. “너 진짜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고개를 들자 정훈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약해 빠져서. 아, 걍 내가 계속 데리고 살아야겠다.”
약하지 않아. 말하려고 했으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두 손을 들어 내밀자 정훈의 가슴팍이 만져진다. 정훈은 가볍고, 투명하고, 체온이 잘 느껴진다. 그리고 지워진다. 가장자리부터 가루로 잘게 재단된 정훈이 허공으로 흩날린다. “뭐라고?” 물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증명하듯…… 멀리로 떠밀린다. 정처 없는 걸음이 이어진다. 비행기, 독어로 쓰인 표지판 열다섯 개, 공항, 거리, 거리의 개, 쓰레기, 낄낄거리는 웃음과 입맞춤. 입맞춤?
좀 전까지 입맞추던 대상이 사라진다. 허공을 휘젓는 손이 당혹감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장면이 바뀐다. “이럴 거면 헤어져, 씨발, 그냥 짜증 나니까 제발 좀!”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앞으로 질주한다. 그 목소리에 꽂힌 정훈은 화난 표정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숨을 몰아쉰다. “야.” 정훈이 경고한다. “그래, 헤어져.” 아니, 지쳤다고 호소한다.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저 손을 잡는다면 이 모든 걸 멈출 수 있다고, 본능이 속삭인다. 그러나 손을 잡기도 전에 정훈이 등을 돌린다. 그대로 사라진다. “헤어지자고.” 목소리만 남기고.
“같이 살자.”고 말하는 목소리는 왼쪽에서 내려온다. “머리가 아파.” 호소하자 정훈이 손을 불쑥 뻗는다. “그러니까 같이 살자니까?” 정훈은 휴대전화를 이용해 봐둔 집을 여럿 보여준다. 정훈이 좋아하는 구식 디자인의 방 몇 개가 빠르고 무의미하게 지나간다. “너 아플 때 내가 뭐든 할 수 있게.” 정훈이 다가온다. 입술이 이마 위로 눌린다. 깃털로 간지럽히는 듯한 감각이 내려앉는다. 잡고 싶다, 고 여기자 정훈이 사라진다. 고개를 흔들면, 머리가 짧고 말쑥한 정훈이 보인다. 멋쩍게 웃으며 바짝 깎은 뒷머리를 자꾸만 만진다. 정훈의 양옆으로 우거진 초목은 냄새가 없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의아함보다도, 정훈이 말을 하지 않는 게 불안하다.
“안 어울려?” 애교를 부리는 정훈. “괜찮지, 봐줄 만하지?” 두려움을 숨기려는 정훈. “아,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아쉬운 티를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비죽거리는 정훈.
“연정훈.” 부름이 뱉어졌다가 도로 입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허용하지 않겠다는 망각의 입김을 수용한다. 뒤로 떠밀리면, 정훈이 놀라 잡아준다. “조심 좀 해…….” 다친 곳은 없는지 세심히 살피는 정훈의 얼굴이 검게 물들기 시작한다. 다시, 사라진다.
이것은 기억의 재구성이다. 전생과 후생의 재구성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혹은 살아본 적 없는, 살아볼 수 없는 우주의 재구성. 이것은 절대로 이을 수 없는 운석의 무덤들을 꿰어 그려둔 지도이며, 무결점의 하늘을 찾아 영원한 태양의 광휘를 띄우려는 숭배의 시도이다. 이것은, 이것의 이름은.
말을 마친 정훈이 눈치를 살핀다.
“여보운.” 고백하고, 목을 가다듬고, 붉어진 귀를 손으로 가리면서…… 사라진다.
벌써 몇백의 정훈을 떠나보냈는지 알 수 없다. 손톱 뿌리까지 무력이 찌들어 불유쾌하다. 숨을 크게 들이키고, 뱉는다.
입김이 훅 내질러진다.
“모르겠어?” 묻는다.
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본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뺨은 붉어졌고, 눈썹 사이가 좁다. 사랑을 아는 소년의 얼굴이다.
“내가 널.” 정훈이 원한다. “…… 좋아해서.” 정훈이 애정을 뿜어낸다. “너 다 알아서, 온 거지.” 중얼거림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신에게 뿌리듯 간절하다. 그것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달짝지근하고, 약간 쓰고, 차갑고, 또……. 정훈의 혀를 씹는다. 정훈이 움직임을 멈춘다. 정훈을 먹을 기세로 턱에 힘을 주고 입을 움직인다. 정훈을 옭아매고 정훈을 잡는다. 사라지지 말라고, 기분이 나쁘다고, 그러고 싶지 않다고, 정훈에 대고 호소한다. 정훈이 정지한다. 뒤로 고개를 물리면 코가 빨개지고 뺨이 붉어지고 금방이라도 울 듯한 정훈이.
“왜 그래?” 묻는다. 정훈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겨울이 전신을 두들긴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 혹독하게 춥다. “달려.” 정훈의 피와 같은 고백이 고인 입으로 선언하면, 정훈은 따른다. 정훈은 사랑에 순진할 정도로 연약하다. 가로지르는 양옆으로 오피스텔이 무너지고 학교가 무너지고 산책로가 무너지고 지하철이 무너지고 부두, 대학교, 극장, 벚나무, 동인천과 부평이 무너진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다. “끝을 찾아줘!”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면 정훈이 묻는다.
빨간불이 형형한 교차로에서.
“이게 사실이란 걸 어떻게 증명해?”
“뭐라고?”
“아, 너무 행복해서… 전부 꿈이면 어떡하지? 막, 씨… 네가, 어?”
“야, 뭐라고?”
“날 좋아한 적도 없다고 말할까 봐.”
“야, 지랄 마. 아니야.”
“꿈이면 어떡하지?”
“깨면 되지, 멍청하냐.”
“깨워줄 거지?”
“혼자 잠도 못 깨?”
“여보오.”
“씹, 그렇게 부르지 마.”
“깨워줄 거지? 나만?”
“그래, 씨발. 너 아니면…….”
“저기요.” 보운이 앓았다. 움찔거리며 눈꺼풀을 들면 여자가 경악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어떻게?” 여자는 기계를 이리저리 만져 보다 비명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고장은 아닌데!” 여자가 초조한 얼굴로 발을 굴렀다. “어쩌다가. 어쩌다 이런 걸까요?” 여자는 아이처럼, 모든 어린 악행이 들통난 아이처럼 창백한 울상으로 물었다. “환불은 됐어요.” 보운은 침을 뱉듯 뇌까리곤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기계가 옥죄던 머리가 욱신거렸다.
너덜너덜한 기억이 불운의 폭풍에 흩날렸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정처도 없이 머릿속의 모든 곳을 파편 떼가 떠돌아다녔다. 보운은 발을 동동거리는 여자를 지나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제 어둠으로 물든 거리가 보운을 기꺼이 껴안았다.
보운은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이 당기고 발끝이 곱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손에도, 몸에도 좋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사라지던 얼굴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씨발, 씨발….” 라쿠나를 기준으로 열일곱 바퀴를 꼬박 돌았을 때, 보운이 기어코 몸을 돌렸다. 별도 뜨지 않은 새까만 새벽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덜 지워진 기억이 보운을 잠식하고 목을 짓눌러 죽일 것이 빤했다. 어느샌가 보운은 조금씩 울고 있었다.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투명하고 무게가 거의 없고 체온과 같은 온도의 눈물이 보운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행히도, 그런 눈물이었기에, 지나가는 누구도 보운이 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길 한가운데서, 보운은 휴대전화도 지갑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온몸이 구부러지도록 추웠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도 보이는 게 몇 불빛 밖에는 없었다. 보운은 다급해져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다시 라쿠나로 돌아갈까? 그러나 돌아보면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검정만이 보였다. 다시 그 길을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운은 혼란스러웠다. 반쪽짜리 기억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거란 사실을 왜 몰랐을까? 다 지우거나, 원래의 마음대로 절대로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는 쓰고 예리해서 목구멍뿐만 아니라 폐까지를 깊게 꿰뚫었다. 보운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정훈이 보고 싶었다. 정훈 때문이었으니까. 전부 정훈이 한 일이었으니까. 헤어지자는 말을 받아친 것도 정훈이었고, 기억을 멋대로 지운 것도 정훈이었다.
그리고 보운은 절대로 그럴 수 없도록 이 모든 걸 남긴 것도 정훈이었다. 보운은 정훈과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정훈 이전과 이후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정훈이 없었기에 그렇게 해야만 했다. 정훈이 해주지 않을 것을 따라가려 발버둥을 쳐야 했다. 보운으로선 살아본 적 없는, 살아볼 수 없는 정훈이라는 우주를 재구성하고 그건 그렇게까지 좋은 게 아니었다고 치부하다 무너져야만 했다. “개새끼…….” 보운이 어깨를 떨었다.
“어…….” 그리고 거짓말처럼, 이 모든 절망을 단숨에 한 선으로 이어버리는 목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왔다. 어깨를 잡아채는 힘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몸이 돌아간다. 보운은 본능처럼 아래를 보았다. 발밑으로 그어진 흰 선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아직도, 화 많이 났어…? 요…?” 기억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그 목소리가 보운에게 건네어졌다. 정훈은 엉성한 차림이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보운을 제 쪽으로 당겼다. “빨간불인데.”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사위의 어둠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듯 찬란했다. 보운은 멍하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절망을 가득 실은 관념의 트럭이 도로를 질주하다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걸 느낀 순간 정훈의 머리 뒤쪽에 서 있는 신호등이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게, 뭐냐, 그렇게 가 버려서.” 보운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기만 하자, 정훈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뒷머리를 벅벅 긁던 그가 곧 성큼성큼 보운과의 거리를 좁혔다. 가까워지는 얼굴이 있었다. 보운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가까워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깊은 안도가 보운을 관통했다. 보운은 지금 그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뭔지 나도 알아야지. 그래야 같이 화를 내든,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잡아떼든, 어?” 정훈이 볼멘소리를 냈다.
보운은 고개를 저었다. “입 좀 다물어….”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도록 완벽히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정훈에게 내밀어졌다. “좀, 다물라고, 머리가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으니까. 다 처 까먹은 넌 모르겠지만.” 보운이 코를 훌쩍거렸다. “꿈꾸는 거야?” 정훈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우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통 종잡을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초면의 남자가 미친 것처럼 화를 내고 사라져버렸는데 걱정이 된다니.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도 얼핏 보였던 균열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게 꿈인 것 같아?” 보운이 손을 뻗어 정훈의 옷깃을 잡아 쥐었다. 손아귀 안에서 일그러지는 천의 소리가 간지러웠다. “어떻게 확신해?”
이 애, 위험하다. 뭔가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었다. 정훈은 직감했다. 그러나 어디를? 도대체 무엇을? 정훈으로서는, 어딘가 도려진 것처럼 요 며칠을 살아온 정훈으로서는 단번에 추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남자를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럴 거였다면 낮부터 이 새벽까지 근처를 빙빙 돌며 찾으려 애쓰지도 않았을 거였다. “모르겠어.” 정훈이 보운처럼 코를 훌쩍거렸다. 추워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얇은 옷가지 사이로 잔인한 바람이 마수를 뻗쳐왔다. “근데 알고 싶어. 이런 기분은 좀 오랜만이거든? 내가….” 정훈이 두서없이 말했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코끝이 찡해질 만큼…….
“지금은 영화보다 네가 더 궁금해.” 정훈이 말했다.
보운이 어깨를 크게 떨었다. “그게 왜 그런 줄이나 알아?”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주어도 뒤쪽으로 밀어낼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글쎄…… 그보다, 좀 들어가자. 감기 걸릴걸?” 정훈이 주저도 두려움도 없이 보운의 손목을 잡아챘다. 차갑고 뻣뻣한 손바닥이 차갑고 뻣뻣한 손목을 틈 없이 감쌌다. 보운은 신호등을 넘어 그저 제 마음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무엇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싼 도시의 건물들은 고요하고 굳건했고, 밤은 어두웠으며 듬성듬성한 불빛은 날카로웠고 바람은 무심했다. 보운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천천히 정훈을 따라 걸었다. 묵직하게 그들 위로 덮여 있던 몽롱함이 한 꺼풀 걷히고 있었다. “또 이 개고생시키면 콱 죽여버린다.” 보운이 동그랗고 색 옅은 뒤통수에 대고 날카롭게 속삭였다. “도대체 개고생한 쪽이 누군지.” 정훈이 받아쳤고, 그 목소리와 말투와 순간을 이루는 모든 것이 전부 과거와 같아서 보운은…….
“너!”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정훈은 사라지지 않았다. 손목을 잡은 힘도 여전했다. 그렇다면 괜찮았다. 다시 시작할 명분이야 차고도 넘쳤으므로. 모든 걸 지우고도 이 밤, 감정에 이끌려 찾으러 나온 마음 하나만을 믿는다면 전부 옳게 나아갈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운석의 무덤들을 죄 헤아려 꿰어둔 듯이 어두운 길을 함께 걸었다. 이유를 몰라서, 목적이 있어서…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도록 켜켜이 빽빽한 꿈을 건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