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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하나, 성탄전조
하나, 성탄전조 정훈이 우는 소리를 낸 건 보운이 창문을 소리 나게 닫음과 동시였다. 가을이 될 무렵 집 근처에 문을 연 카페에서는 겨울이 오기 무섭게 캐럴을 틀어놓았다. 그게 벌써 두 달째였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10월부터 캐럴을 듣느냐고 매번 짜증을 부리는 보운과는 별개로, 정훈은 그걸 무척이나 기껍게 여겼다. 두 달을 내리 들으면서도 “좋잖아.” 같은 말을 입 밖으로 내며 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보운으로서는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편곡도 거지같이 했는데 저게 좋다고?” 보운이 씩씩거리는 데에도 정훈은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런가? 그 가수가 원곡자를 존경한대. 멋지지 않냐?” 그러니까 뭐가? 보운은 할 수만 있다면 정훈에 귀에 대고 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집밖에서 들려오는 캐럴만 참으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거리엘 나가도 온통 초록색에 번쩍거리는 전구 장식이질 않나, 크리스마스는 한참 남았을 때부터 티브이를 틀면 크리스마스 특집에 연말 특집, 특집, 특집……. “이 나라는 미쳤어.” 그게 보운이 내린 결론이었다. “땅이 너무 좁은데 사람이 많아서 다 같이 미쳐버린 거야…….” 그깟 크리스마스. 보운은 계속해서 짜증을 털어내며 마른세수했다. 기분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전부 바보같은 크리스마스 때문이었다. 다들 그만 좀 하라고…. 보운이 그러거나 말거나 정훈은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캐럴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뒤에서 보운을 끌어안았다. “그냥 들뜨고 좋지 않나?” 정훈이 싱글거렸다. 그의 팔이 은근하게 허리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자, 보운이 욕을 잇새로 짓씹으며 정훈의 손등을 아프게 내갈겼다. “눈치가 없는 거야 뭐야? 존나….” 보운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서야 낑얼거리며 뒤로 물러난 정훈이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너랑 보내는 생각만 했다고, 나는.” 보운은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정훈이라면 분명 어디론가 나가서 데이트라도 하자고 할 게 불 보듯 빤했다. 사람은 미어터지지… 날은 존나게 춥지… 거기다 볼거리라곤 하나도 없이, 먹고 마시는 게 전부인 한국 사회를 다 아는데. 크리스마스 같은 날을 기대하며 함께 보낼 생각뿐이라니. 더군다나 보운은 크리스마스 당일이면 자취방이 아니라 본가에 끌려가 있을 확률이 컸다.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수식이 붙은 날이면 곧장 본가로 소환되곤 하지 않았던가. 지난 몇 년 동안 크리스마스는 무조건 집안사람들이 모이는 암묵적인 행사의 날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지금 말해줄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안 그래도 성가신 데에 기름을 부을 필요가 있나. 보운이 대답을 삼가자 자꾸만 칭얼거리던 정훈도 곧 제 할 일에 몰두했고, 그렇게 날이 저무는 듯했다. 정훈이 잠들기 직전 눈을 번쩍 뜨고 묻지만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렇게 지나갔을 밤이었다. “여보.” 정훈의 손이 꼼질거리며 보운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다.” 보운이 잠결에 씨근덕거렸다. 정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체온이,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체취가 보운을 칭칭 감싸고 저 아래 수면의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잠깐 정적을 지키던 정훈이 보운의 귓가에 입술을 슬며시 가져갔다. 평소와는 다르게 성적인 함의도, 장난스러운 기색도 덜어낸 담백함이 있었다. “으음.” 그래서인지 곧장 피하지 않은 보운이 짧게 신음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씀벅이던 정훈이 보운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크리스마스에 나랑 있을 거지?” 정훈의 목소리엔 엷은 염려가 깔려 있었다. “또 그 소리야…….” 보운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 …….” 정훈의 가슴팍과 쇄골 언저리에 고개를 박고 있는 보운은 볼 수 없었겠지만, 정훈의 눈썹은 이제 눈과 거의 닿을 정도로 내려갔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보운은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고 마무리하려는 듯했으나…… 정훈에게…… 이건…… 일대의 문제였다! 며칠, 아니 몇 달 전부터 보아온 보운의 미적지근한 태도로 보건대 분명히 뭔가 있었다.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뭔가가. 의심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정훈을 자꾸만 초조하게 만들었다. 안 되는데. 정훈이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에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여름의 산타를 보겠답시고 남반구로 떠났다는 서신을 보내온 바 있었다. 서핑하는 산타와 인사하겠다나 뭐라나. 아들이 추위에 떨며 케이크를 홀로 자르건 말건 관심도 없는 모양이지. 그렇다고 ‘연인이 없어 떨거지가 된 애매한 친구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다른 거엔 다 질투했으면서 이런 건 왜 또 관대한 건데. 정훈이 이를 갈았다. 이제 거의 잠에 몸을 맡긴 보운을 설설 흔든 것도 그런 생각들에서 파생된 억울함 때문이었다. “아 왜에….” 보운이 낯을 팍 우그러뜨렸다. “나 크리스마스에 바빠… 안 놔? 죽을래…?” 눈도 뜨지 않고 짜증을 부려대는 모습에 정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여러 번 눈을 씀벅거린 정훈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두피의 모공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연인끼리는…… 크리스마스인데……. “왜……?” 정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성가심에 결국 잠에서 내팽개쳐진 보운도 상체를 확 일으켜 앉았다. 머리가 그답지 않게 엉망이었다. “이 미친놈….” 보운이 끙끙거렸다. “집에 가 봐야 돼. 알잖아. 너, 씨발… 너랑은 전날이나 다음날에 놀면 될 거 아니야. 안 그래도 그 생각에 짜증나는데 왜 자꾸 난리야?” 그래. 그렇다 이거지. 정훈이 거의 흐느끼던 숨을 뚝 끊어내며 두 손을 내렸다. 이제 서러움은 끝이었다. 뭉툭하게 튀어나온 불만이 얻어맞은 혹처럼 커지는 순간이었다. 두 입술이 비죽 앞으로 내밀어지고 주먹은 옹골차게 쥐어진다. 나만 생각했단 말이지. 크리스마스, 커다란 트리, 행복한 연인……. 길에서 뭐 볼 때마다 염세적으로 힐난하는 데에서 알아봤어야 하는데. 정훈이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나 다시 잔다. 또 깨우면 내쫓을 줄 알아….” 보운이 여전히 뾰족한 기색으로 늘어지듯 말하고는 털썩 누웠다. 안 그래도 잠들기까지 오래 걸리는데. 하여간 성가시단 투였다. 그에 또 울컥한 정훈이 어두운 사위를 파헤치기라도 하듯 눈을 부릅떴다. “맘대로 해라.” 분명, 정훈의 목소리는 꽉꽉 들어찬 설움으로 단단히 맺혀 있었으나…… 보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맘대로’ 할 예정이었으므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 주변을 둘러싸고 빠른 속도로 캄캄하고 아슬아슬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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