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크리스마스에 뭐가 일어나든,
연애가 언제부터 두 사람의 자아와 육신을 통합하는 과정의 동의어가 되었는지 보운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배우거나 이해하고 싶은 마음 또한 추호도 없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잖아.” 그렇게 말하는 정훈의 얼굴은 토라진 기색으로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세상에 화를 낼 때보다 투정을 부리는 게 더 무서운 남자가 딱 한 명 있다면, 보운의 생각에 그게 바로 정훈이었다. 화를 낸다면 같이 맞부딪히기라도 하면 되는 문제였으나 토라져 칭얼거리는 데에는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보운은 누구를 잡아다 달래는 것엔 소질이 없음을 넘어서 회의적이기까지 한 입장이었다. 그런 보운의 귀에 대고 질리지도 않는지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해대는 정훈은 흡사 다섯 살짜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알아서 한다고 했지. 이게, 씨, 진짜….” 결국 참다못한 보운이 고개를 팍 치들었던 게 월요일이었다. 그 말에 진심으로 충격이라도 받은 듯 정훈이 방을 빠져나갔고, 그 뒤로는 이틀을 내리 냉전 아닌 냉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보운은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수요일에는 무조건 본가에 가야 했다. 이브로 옮겨달라는 요청을 보운 나름대로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당일, 당일 해대는 연인의 입이 어찌 밉기만 했겠는가. 보운에게 어떤 의미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훈이 만족하고 좋다면야……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국일을 당기기는 어렵다는 회신을 받은 보운은 완전히 그 문제에 관심을 꺼둔 상태였다.
뭣하면 저녁에 만나도 되는 일 아닌가. 애초에 허구한 날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는데, 그 하루까지 꽉꽉 채워 함께 있을 건 뭐람. “야, 생각을 바꿔 봐. 생각을.” 보운이 비쭉한 입술과 세모난 눈을 하고 로션을 펴 바르는 정훈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졸라… 꼭 그날이어야 하는 이유가 뭔데.” 이쯤 되니 보운도 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목소리가 뾰족했다. 정훈이 홱 고개를 돌려 보운과 눈을 마주쳤다. “아니, 가라니까.”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다녀와. 뭐, 나는 그냥 영화나 두 편 보고, 밥도 알아서 잘 사 먹고, 거리에서 하하호호 떠드는 연인들이나 좀 구경하다가, 너 오는 거 기다리고…… 눈도 안 오는데 진짜 끝내주는 크리스마스다. 그치. 여보운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진짜 입에 어디 구멍 뚫렸냐?” 보운이 눈썹을 위로 들었다.
“입은 원래 구멍 뚫려 있거든?” 정훈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됐다. 내가 말을 해서 뭐 해. 차라리 어디 산골에 박혀서 농사를 짓지. 보운은 딱 그 생각으로 오전의 상황을 정리했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하고 발을 동동거리던 정훈도 끝에 다다라서는 생각이 많이 정리된 듯했다. 입을 꾹 다물고 보운이 집을 나설 때까지 휴대전화를 붙들고 내려다보던 뒤통수를 떠올린 보운이 고개를 저었다.
“날이 춥긴 춥네….” 그래도 명색이 연말이라고. 작게 중얼거린 보운이 목도리를 고쳐 매곤 천천히 집으로부터 멀어졌다. 목이며 턱 아래 피부에 닿는 감촉이 약간 까끌거렸다. 평소 보운이었더라면 절대로 사지 않았을 소재였다. 아크릴이 조금 섞였다나, 뭐라나. 그래도 지난겨울 정훈이 덥썩 사준 뒤로 보운은 꽤 요긴하게 목도리를 두르곤 했다. 같이 사준 장갑은 죽어도 끼는 법이 없었지만. 오늘 같은 날에도 이걸 매는 걸 보면 조금쯤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러기는커녕 따라 나와보지도 않던 정훈을 상기한 보운이 고개를 설설 흔들었다.
“하여튼 유치해서는….” 이따 모임이 끝나면 전화라도 먼저 한 통 해야겠다. 딱 거기까지의 감상이었다. 어쨌든 정훈의 그렇게까지 토라진 모습은 볼 기회가 자주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다지 멀지도 않았으나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과거 어딘가를 더듬던 보운이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보운을 데리러 온 차는 큰 도로변에 정차해 있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날이 날이니만큼 동네보다는 시가지로 나간 모양이었다. 뒷좌석에 올라타 앉은 보운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뒤따라 나오기라도 할까 걱정이 아주 안 되지는 않았는데, 다행히도 새로 몰두할 것을 찾기는 한 모양이었다. 뭐 나야 안심이지. 보운은 부드럽게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의 진동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머플러 안쪽에 섬유유연제 냄새가 고여 있었다. 보운에게는 정훈의 체향과 더불어 그를 떠올리게 하는 바로 그 향이었다…….
호텔 로비는 보운과 비슷한 처지의 가엾은 청년들로 붐볐다.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최소 한 시간은 부모의 손에 끌려다니며 이름도, 정체도 모를 어디 높으신 분께 인사를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할 것이다. 보운은 팔짱을 낀 채 커다란 트리 옆에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내는 소음을 들었다. 등을 기댄 대리석 벽에서 한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억지로 몇 입 받아먹은 과일과 핑거푸드가 속에서 말썽을 부리는 통에 보운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한 상태였다. 이래서 밖에서 뭐 먹기 싫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데에도 이럴 거냐는, 약간의 채근 섞인 부탁에 입을 벌린 게 화근이었다.
“하아…….” 보운이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을 확인했다. 백화점에서 온 관리 연락들, 재활 담당 교수님의 안부 문자,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로 도배가 된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연정훈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보운이 짜증 가득 담긴 말로 웅얼거렸다. 칭얼거릴 거면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한 건 보운이었으나, 분명 그랬으나……. 그렇게 좋은 날이라면서 어떻게 문자 하나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몸이 불편하니 애먼 모든 것들이 다 짜증스러웠다. 자칫하면 바닥에 휴대전화를 내던지는 결말로 치닫게 될 것이 빤했으므로, 한 번 꾹 눌러 참은 보운이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어머, 보운아.” 지나가던 여자가 보운의 마구 구겨진 얼굴을 보고도 선뜻 말을 걸어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보운은……. 보운은 고개를 들었다. 들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아닌 미경이었기에. “정말 오랜만이다…….” 미경은, 그녀는 감상에 젖은 듯 잠시 말을 멈추고는 눈을 느릿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보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마치 연주 중인 것처럼 감격스러워 보였다.
나쁜 과거와 썩 괜찮아진 지금이 교차했다.
“다시 보니 좋다.” 미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눈썹이 살짝 내려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좋은 선생님이었다. 어떤 이의 초대로 이곳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보운은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손등으로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와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보운이 불편한 티를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은 그녀가 싫다기보다는, 그녀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멋쩍었다. 그녀의 연락을 마구잡이로 무시하던 때가 있었다. 그 뒤로는 교차 지점 없이 살아온 처지였으니…….
“메리 크리스마스.” 단답으로만 대꾸하는 보운에게, 마지막으로, 미경이 말했다. “눈이.” 그녀가 곧 떠날 것 같자, 보운이 다급하게 붙들어 쥐듯 말했다. “…… 안 와서, 좀 아쉽네요.”
미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는 곧 사르르 녹는 듯한 웃음이 뒤를 이었다.
“어머, 아니야. 곧 조금씩 눈이 내릴 것 같아. 이따가 봐… 밤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일 테니까.” 미경이 말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홀로 쑥 들어가는 뒤통수를 보며 보운은 주머니 속에 손을 쑤셔 넣었다. 단단한 휴대전화의 프레임이 만져졌다. 눈이 올 것 같다고? 멍하니 고개를 돌려 로비 저편의 문을 바라보면 약간 희끄무레해진 하늘의 조각이 보였다. 보운은 망설이는 엄지로 하염없이 휴대전화를 쓰다듬으며 그 광경을 오래간 바라보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