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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셋, 그게 기적은 아닐걸요?
셋, 그게 기적은 아닐걸요? 미경의 언급 뒤로도 하늘은 한참 희끄무레하기만 했다. 구물거리며 검거나 어두운 회색의 구름이 하늘을 줄지어 미적거리는 꼴이 보기에 나빴다. 보운은 살면서 한 번도 눈이 오기를 바란 적 없었다. 눈은 악기를 불안하게 만든다. 나무, 상아, 동물의 창자 따위로 조합된 그 악독한 무생물들은 날씨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보운은 눈이 오는 날이면 지나치게 튼 히터에 거의 비명을 지르던 건반들을 기억했다. 피아노를 보존하는 쪽을 택한다면 영락없이 차가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게 되었고. 사고 이후로는 눈이며 비가 오는 날마다 몸이 찌뿌둥하고 무겁기만 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유리문 너머를 내내 노려보던 보운이 몸을 돌렸다. 파티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밖을 내다보던 보운도 벌써 사이사이 몇 번이나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 안을 드나들었다. 어디 있었어, 찾았잖아. 이리 좀 와 봐. 너 혹시 김 선생님 기억하니? 유학도 다시 생각해볼 만하지. 치료만 받으러 다니는 건 시간이 좀 아깝기도 하잖아. 수많은 말들. 수많은 인사들. 보운은 지쳤다. 샴페인 잔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자 이제 그만하고 다들 돌아갑시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하지만 교육이란 무엇인지. 미경과는 다시 마주치지도 않았지만, 보운은 입을 꾹 다물고 혀를 입안의 아래쪽에 딱 붙인 채 어느 기점부터는 침묵을 유지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몇몇 사람이 이탈한 것이 도드라진단 사실이었다. 끝물인가. 장장 네 시간여 만에 하강 곡선을 그리는 분위기를 살피며 보운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보운을 두고 어디론가 사라진 부모님은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넓은 내부를 크게 한 번 둘러본 보운이 짤막한 메시지를 한 통 남겨두곤 결심했다. 가야겠어. 회귀란 동물의 본능 기저에 아주 깊이 박힌 욕구라고 했다. 그리고 보운은 욕구라는 것들을 대체로 혐오했다. 이성과 합리를 배반하는 선택을 종용하는 불순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감정을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에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삶에의 기조였으며 음악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이렇게 장황한 연설로 여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보운은 회귀라는 인간의 중대 욕구에 편승하여 종착지를 골랐는데, 그게 다름 아닌 정훈이었던 것이다. “야.” 보운은 신호음이 몇 번이나 지난 뒤에 겨우 전화를 받는 정훈의 목소리를 끊으며 칼칼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너 어디야?” 정훈은 놀랍게도 호텔 근처의 시내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웃기고 있어. 보운은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보지 않아도 정훈이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빤했다.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전화를 노려보거나 하면서 시간을 죽였겠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해 벌떡 일어나서,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으리라. “복수해준다 여보운.”같은 유치한 말을 하며 멋을 잔뜩 부렸을는지도. “너 없어도 잘 놀거든?” ……. 그래. 분명 그런 말도 했을 것이다. 정훈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보운은 혀를 차며 택시에 올라탔다. 시내까지는 걸어서 십여 분 정도가 걸릴 뿐이었지만, 이런 날씨에 그렇게까지 걷고 싶은 마음일랑 추호도 없었다. “날씨가 안 좋네요.” 택시 기사가 여유롭고 너그러운 목소리로 허허 웃었다. “데이트가 있으신 모양이죠?” 오지랖은. 속으론 콧방귀를 뀐 보운이었지만, 그는 처음 보는 사람에겐 충분히 너그럽고 사회적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거나 희박한 상대라면 더더욱. “뭐…… 네.” 회귀. 그 단어가 옆머리에서 통통 튀며 자기 어필에 한창이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뭘 그렇다고 해? 택시에서 내리면서 보운은 제 입을 툭툭 두드렸다. 아니라고 할걸. 친구라고 할걸. 그랬더라면 그렇게 멍청한 대답은 하지 않았을 텐데. 전적으로 제 선택에 의해 정훈에게 돌아가면서 보운은 씩씩거렸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했다. 귀를 아프게 울려대는 캐럴…… 도대체 몇천 년 전에 뻘짓하다 죽은 사람 생일은 왜 그렇게나 챙겨대는 건지. 울면 안 된다고? 지랄하네. 보운은 좀처럼 빈정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멋쩍은 기분만큼 분노가 비례하여 추격하고 있었다……. 정훈은 시내 한가운데 거대한 트리 아래 서 있었다. 물론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게 정훈뿐만은 아니었다. 새파란 청록색 트리에 전구는 번쩍거리고, 난잡한 장식은 장식대로 바람에 흔들리고…. 사람들은 좋다고 그 앞에서 웃거나 자세를 잡으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쩐지 덩그러니 서 있는 듯한 정훈이 또렷했다. 보운은 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도 자꾸만 찌그러지는 얼굴을 복구할 길을 찾지 못했다. 왜 저렇게 청승을 떨고 있어. 그런 소리가 저절로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 반나절의 고행 동안 보운도 배운 게 하나는 있었다. 그는 턱에 힘을 주어 입을 다문 채 정훈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어쩐지 초조하고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시선을 이리저리 배회하던 정훈이 뒤늦게 보운을 알아보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 그리고, 그러는가 싶더니, 표정을 왁 구기는 것이 아닌가. 저거 왜 저래. 이유야 이미 알 것 같았지만, 일단, 보운이 생각했다. “왜?” 보운은 눈을 치뜨고,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물었다. “왜?” 정훈이 입을 벌렸다. 입김도 쏟아지질 않았다. 도대체 이 추운 날 얼마나 서 있던 건지. “왜애애?” 단단히 골이 난 정훈이 보운을 향해 원망 섞인 시선을 잔뜩 쏘아 보내더니 바닥을 한 번 쿵 찼다. 그 기세에 사방에서 꺄꺄거리며 즐거움을 만끽하던 이들이 움찔 놀라 정적이 흘렀다. 캐럴이 정적의 사이사이를 꽉 채웠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씨, 쪽팔려. 조용히 안 해?” 보운이 정훈의 팔을 콱 움켜쥐었다. “일단 어디 좀 들어가자. 너……” 엄청 추워 보여. 잔뜩 심통을 부린 주제에 보운이 잡아끄는 대로, 정훈은 기울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어라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더 성화를 부리기에도 멋쩍은 모양이었다. “너무 늦잖아.” 결국엔 조그맣게 덧붙인 정훈이 코를 먹었다. “얼어 죽는 줄 알았네.” “그래, 콱 뒈졌음 더 빨리 왔을 텐데. 안 그래?” 보운이 사납게 말하며 연신 주변을 살폈다. 여기에도 연인, 저기로는 가족…….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들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던 시선이 결국 다시 정훈을 돌아보았다. “흥.” 정훈은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홱 돌렸다. “…… 어쭈.” 보운의 눈썹이 들렸다. 내가, 이 날씨에, 오전에 일정이 꽉 찼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왔는데. 그 얄랑한 본능에 홀라당 감겨 돌아왔는데. 지금 흥이라고 했다 이거지. 보운이 정훈의 팔을 잡은 손에 꽈아악 힘을 주었다. 그 표정 어디까지 가나 보자. 보운은 속으로 이를 갈아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내는 정훈이 늘 길을 잡아 왔던 곳이었고, 심지어는 계획조차 없는 데다, 어딜 가도 사람이 붐비는 날이었지만, 될 대로 되라지. 저 얼굴이 헤실거리는 꼴을 봐야겠어. 내가 친히 와줬는데도 깡깡거린 걸 잊게 만들어 주지. 어쩐지 표독스러운 기색까지 띤 보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들이 점차 멀어지는 거대한 트리에 둘린 조명처럼, 번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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