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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넷, 그냥 단지……
넷, 그냥 단지…… 보운의 계획은 거의 완벽했다. 즉흥적으로 짠 것이기는 했지만, 흠잡을 데가 없었다. 우선 겉보기에 썩 괜찮은 카페로 들어간 게 시작이었다. 정훈은 “사람이 많을 거 같은데? 난 괜찮지만….”하고 다소 김새는 소리를 하며 그답지 않게 우려를 표했지만, 보운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잔뜩 격양되어 있었기에 정훈이 더 건드려 북돋울 필요조차 없었다는 말이었다. 카페는 따뜻했고 달짝지근한 냄새로 가득했다. 차갑게 굳은 기름기로 희게 뜬 뷔페 음식들을 몇십 개나 마주하고 지나쳐 보냈으므로 보운에게는 그런 게 간절했다. 뜨거운 음료는 윗부분에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반짝거리는 설탕인지 사탕인지의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이것 봐…… 하고 말하더니 음료의 거품을 윗입술에 묻히는 장난을 친 정훈이 보운을 마주 보았다. “이러면 뭐라도 해주고 싶지 않아?” 정훈의 목소리는 꼭 그가 한 입 들이켠 음료처럼 달짝지근했다. 그럼에도 보운의 도끼눈은 좀처럼 죽을 줄을 몰랐다. “입.” 보운이 날카롭게 말하고는 제 몫의 음료를 확인했다. 입이 텁텁해지는 건 원치 않았으나 그들이 걸어온 밖은 꽤 추웠고, 그러니 달고 뜨거운 것에 마음이 동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입?” 정훈이 벌떡 일어나 섰다. “…… 왜 이래, 미쳤냐?” 보운이 질색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여간 토라져서 이래도 홱, 저래도 홱, 새치름한 모습을 보이던 게 조금 전이었는데……. 그새 기분이 풀린 건지 장난질이다. 보운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정훈의 기분 변화에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저걸 끼고 사느니 속이 터져 죽지. 그들의 자리는 반지하 카페의 구석이었다. 길에서 걷다가 애매한 다섯 개의 계단을 밟아 내려와야 있는 카페는 바깥쪽으로 난 자리를 차지하면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꼴이 되었다. 그걸 피하고자 선택한 장소였다. 두꺼운 흰 기둥이 정훈의 등 뒤로 우뚝 솟아 있어서 반대편에서는 그들이 무얼 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정훈이 서서 버티든 말든 보운이 음료를 한 모금 머금었다. 달고 약간 쌉싸름했다. 초콜릿에 무슨 향신료를 더한 것 같았다. 너무 묵직하지 않아서 크림이 섞이니 맛이 좋았다. 난생처음 보는 이름이었는데도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시즌 음료라는데 그 짧은 시간 사이 아쉬운 마음이 들 무렵……. “입이랬다, 네가.” 정훈이 보운의 뺨을 꽉 움켜쥐더니 입가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는 뒤로 물러나 자리에 도로 앉았다. 보운이 경악으로 굳어 입을 살짝 벌렸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실실거리는 정훈의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지. 이 새끼 어디가 예쁘다고 내가 이 결심을 했지? 뜨뜻한 잔을 꽉 감싸 쥔 보운의 두 손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분노가 어떤 기준치를 넘기면 유쾌로 탈바꿈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운 좋은 점이라면 그 얼마 없는 경험이 보운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었고, 불행한 점이라면 그 얼마 없는 경험이 하필이면 보운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진짜 확…….” 마음 같아선 손에 든 음료를 정훈의 얼굴에 쏟아버리고 싶었지만, 보운이 순간 머리가 터질 만큼 분노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고선 그럴 수도 없어졌다. 결국 음료만 두어 모금 더 마신 보운이 한숨을 푹 내뱉었다. “야, 됐고 이제 그만 나가자.” 음료를 절반이나 마셨을까 싶은 보운이 비죽거렸다. “그러자고 하시면 그래야지.” 아무래도 좋단 듯 정훈이 느물거리며 받아쳤다. 정말이지 기분이 끝내줬다.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오후까지는 내장이 뒤틀려 죽을 만큼 꽁해져 있었으나…… 보운의 연락 한 번에 전부 싹 내려가지 않던가. 정말로 그것만을 기다려왔으니까. 어떻게든 보운과 마주치기라도 하고자 호텔 근처를 서성거리며 추위를 참았으니까. 먼저 연락하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고, 보운을 본다면 “이번만 풀어줄 테니까 내가 원하는 말 한 번만 해.”하는 퉁명스러운 제안이나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면서 생색도 낼 참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연락이 왔는데 전부 쌩까고 너랑 보내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책임이라도 지라고. 그런데 보운은 그 모든 예상을 깨고 먼저 전화를 걸더니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이런 건 예상 밖인데. 아니지, 예상의 버뮤다 삼각지대인데?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혼란스러워서 일단은 그냥 짜증과 골이 잔뜩 난 얼굴을 유지하고 있자니, 보운이 먼저 굽혀오는 것이 아닌가……. 연정훈 횡재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데? 정훈은 그때부터 이미 신이 나 있었다. 뭐라고 쪼잘쪼잘거리면서 정훈을 이끌려는 손길도, 언제나처럼 날카롭고 좀처럼 배려할 줄 모르는 손길도, 앞서는 걸 중요시하는 뒤통수도 다 좋았다. 하마터면 카페에 들어오기도 전에 보운의 뒤통수에 대고 입을 몇 번이나 맞출 뻔했다. 이러나 저러나 연인과 함께하는 첫 크리스마스라는 것이다. 정훈은 이전까지 같은 경험이 없었다. 징크스인지 뭔지 정훈의 짧고 많았던 연애들은 전부 좋은 날에 겹치지 않은 채였다. 그래봐야 어린이날? 사랑하는 연인에게 나도 어린이라며 배를 까고 칭얼거리는 게 천직이 아니라면야, 그런 날은 정훈에게 무의미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지. 오늘은 제대로 크리스마스고, 반쪽이긴 하지만 지금 여보운은 나랑 있다. 정훈은 카페에서의 입맞춤으로 씩씩거리며 앞서 걷는 보운의 뒤통수를 눈에 가득 담으며 슬쩍 웃었다. 보운이 두 번째로 선택한 곳은 소품샵이었다. 평균보다 덩치가 좋은 두 사내가 들어가 구경하기에는 약간 불편한 감이 없잖았다. 그래도 정훈은 연신 웃으며, 자꾸만 밀어내는 보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이것저것에 말을 얹었다. 가령 영화 장면들이 찍힌 엽서를 들치고, 아는 그림이 나올 적마다 신이 나서 영화에 대해 떠드는 식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연말과 연휴를 주제로 쌓인 엽서들은 그야말로 정훈의 밥이었다. “이거는 너무 쉽네. <나 홀로 집에> 알지? 거기 나오는 호텔이고.” 정훈이 보운에게 번쩍거리는 불빛이 인상적인 호텔 사진 하나를 들이밀었다. “흠, 이건….” 그리고 엽서를 휙휙 넘기며 눈을 빛냈다. “<폴라 익스프레스>잖아? 이거 진짜 오랜만이네.” 정훈이 어두운 청람색 배경에 기차의 앞면이 찍힌 사진을 흔들었다. “…… …….” 보운은 팔짱을 낀 채 그런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떠드는 건, 그게 예술이기까지 하다면 아무리 날이 선 상태의 보운이라 하더라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보운은 입을 앙다문 채 고개만 까닥거렸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봐주고 있단 사실을 정훈도 알았다. 그러니 보운을 자극하기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에 푹 빠져 주절거리는 것이었고…. “그래서 여보운은?” 마지막 엽서까지 알뜰하게 살피고 말을 얹은 정훈이 한결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 뭐?” 보운은 정훈이 내려둔 엽서를 공연히 뒤적거렸다. 정훈이 옆쪽의 다이어리를 들며 눈을 옆으로 굴렸다. 보운의 입술이 살짝 비죽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와 씨… 여보운 귀여워, 하고 입속말로만 중얼거리며 웃었다.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영화 없냐고.” 아주 작은 글씨로 공들여 써야만 일과를 전부 채울 수 있을 게 분명한 내지를 확인한 정훈이 다이어리를 도로 내려놓았다. “뭐.” 보운의 표정은 소품샵의 다정한 온도의 조명에 많이 녹아내려 있었지만, 음성만큼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도저히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두 사내를 힐끔거리는 가게 주인에게 윙크하던 정훈이 다시 보운을 보았다. “뭐?” 이제 보운이 했던 말을 정훈이 고대로 받아 발음했다. “진심이냐?” <전장의 크리스마스>라니. 정훈의 눈 깜빡이는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아니, 좋아할 수는 있지. 근데 그게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영화’일 수도 있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하나도 안 나잖아. 그 영화에서 제일 크리스마스에 근접한 건 데이빗 보위가 가진 알록달록함인데, …….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기는 정훈을, 보운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보운은 에스프레소 한 샷도 다 담기지 않을 듯한 작은 찻잔을 살폈다. “영화는 모르겠고… 내가 잘 아는 건 사카모토 류이치거든.” 그리고 소품샵을 나올 때쯤 해서야 그런 식으로 덧붙이는 것이었다. “진짜 희한하다니까.” 정훈은 보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앞으로 삼십 분도 더 떠들 수 있었지만,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어떤 게 어떻게 좋았냐고 물어봐야지. 마음으로만 담아 두며 보운의 손을 잡았다. 거리를 걷는 연인과 가족들이 아주 많았다. 이제 하늘은 구름이 적잖이 끼어 같은 시간의 다른 날보다 더욱 어둑어둑했다. “사람들 보잖아.” 보운이 정훈을 흘겨보았다. “다들 이러고 다니는데 뭐 어때.” 정훈은 죽어도 놓지 않겠단 의지를 펼치듯, 잡은 손을 들고 두 사람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손을 잡고 걸었다. 연인 사이를, 가족 사이를, 친구 사이를 손 잡은 채로 걸었다. 정훈의 얼굴을 보고 일직선으로 다가오던 사람들이 보운과 잡은 손을 보고 멋쩍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있었다. “야, 고개 숙여.” 그런 걸 볼 때마다 보운이 일갈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 반들반들하지, 잘생겼지, 다른 사람 눈에 확실히 띄지……. 어느새 맞잡은 두 손 중에서 더 힘이 많이 들어간 건 보운 쪽이었다. “이제 뭐 할 거 없나?” 정훈이 말끝을 늘였다. 이대로 들어가서 케이크나 퍼먹다가 자기에는, 물론 그냥 잘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보운도 그런 정훈의 기색을 읽은 것인지 작게 침음을 흘렸다. “뭐가 더 필요해.” 한 번 져주기로 한 것 이왕이면 끝까지 가기로 마음이나 먹은 듯이 보운이 말했다. 이제 주변은 완전한 저녁의 푸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게마다 불을 더 밝게 켜고, 캐럴 또한 더욱이 맹렬해졌다. 시선에 걸리는 얼굴은 하나하나 빠짐없이 웃고 있었다…. 정훈이 코를 킁, 하고 훌쩍거렸다. 보운의 콧잔등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냥 들어가기 싫어서 그러지.” 정훈이 잡은 손을 당겼다. 그의 힘에 비틀거리며 정훈에게 기대는 꼴이 된 보운의 눈이 샐쭉해졌다. “트리라도 다시 보고 가자. 어두워졌으니까 더 예쁠걸.” 정훈은 이제 완전히 설득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결국 떨떠름하게 보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날이 저물자 많은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한 듯이 인파가 몰렸다. “어쩔 수 없잖아.” 정훈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보운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걸었다. “아, 씨, 진짜, 불편하다고.” 보운은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정훈의 품에 옆통수가 기대어질 때마다는 잠시간 조용했다. 바람은 차갑고, 기분은 적당히 따뜻하고, 입김은 예쁜 흰색이다. 무명천의 가장 깨끗한 곳만 잘라 모아둔 상자 같은 저녁의 공간들. 트리가 아주 가까워지자 정훈과 보운의 얼굴은 노랗고 붉은 조명으로 물들었다. 정훈은 보운의 눈동자 속 야무지게 들어찬 트리의 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행복했다. 분명히……. 트리 앞에 서서, 그들은 마주 보았다. 어떤 합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솔직히 오늘 진짜 서운했던 거 알지.” 정훈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넌 맨날 서운하잖아.” 캐럴과 사람들의 북적거리는 소음이 너무 커서 보운은 약간 느리게 대답을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진짜, 진짜였거든?” 정훈이 투덜거리고는 보운을 제 몸에 가까이 당겨 세웠다. 등에 느슨히 팔을 감으면 보운의 몸이 가볍게, 날갯짓을 막 시작하기 전의 새처럼 긴장하는 것이 손 아래로 느껴졌다. “그래도 와줘서 좋다. 고마워, 여보운.” 귀여운 긴장을 팔 아래 거느린 정훈이 속삭였다. “…… …….” 보운은 대답 대신 정훈의 발등을 지그시 밟았다. 이건 대개 닥치고 입이나 맞추라는 뜻이었다. 정훈은 빠르게 입력된 명령에 흐, 하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아.” 막 입술이 겹치기 전 보운이 작게 신음했다. “왜?” 반쯤 감긴 눈으로 보운의 낯을 살피던 정훈이 낮게 물었다. “…… 눈.” 보운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보운의 눈두덩 위에 절반쯤 녹은 눈꽃이 내려앉아 있었다. 와아, 와,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새까만 밤하늘에 큼직한 눈송이가 수를 놓으며 한들한들 퍼부어지고 있었다. “오…….” 정훈이 잽싸게 보운의 눈두덩을 손끝으로 훔쳐주곤, 입술을 찾았다. “여긴 눈보다 내가 먼저.” 그렇게 읊조리고는 눈을 감는다. 보운은 당장에 그의 가슴을 떠밀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당겨 안아서 엉망으로 입맞추고 싶었다. 그런 기분이 동시에 든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말로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변의 시선은 죄 무시한 채 아랫입술을 질척하게 빨아오는 힘이 있었으니. “으음, 좀…….” 보운이 입술 틈에서 작게 칭얼거렸다. 정훈은 못 들은 체하며 보운의 몸을 더 깊이 당겨 안았다.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유를 모르고 내도록 불안하고 짜증스럽던 마음이 올바른 자리에 들어앉은 듯이 일직선의 안정을 그렸다. 이깟 크리스마스, 바보 같은 크리스마스, 사람은 미어터지고 뒤지게 추운 바로 그 크리스마스. ……. 크리스마스, 커다란 트리, 행복한 연인…… 연정훈, 연정훈! 보운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정훈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곳 또한 아직 눈송이가 내려앉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니 적당한 체온을 머금고 있어 따뜻했다. 고개를 틀어 더 깊이 맞물려 들어오는 입술을 느꼈다. ■ 그냥 단지, 눈송이가 내려앉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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