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물의틈
Writter. 얌 CM | Design. 열 CM
어느 정도 발달한 인간에게는 좋은 꿈이라는 축복이 주어지지 않는다. 코비는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를 쓸며 수도를 열었다. 물은 늘 죽지 않을 만큼만이 주어졌다. 많은 것이 제한된 협소한 세계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런 것이다. 코비 재클린에게는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위해 그는 아직 죽을 수 없다. 혹은, 죽음을 허락받지 못했다. 누구로부터? 글쎄……. 코비는 피부를 찢을 것처럼 차가운 물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 고개를 들면, 한기에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깨끗하다는 인상이 없었다. 퀭하니 움푹하게 들어간 눈가와 우묵하게 패인 뺨 때문인 듯했다. 혹은 사선으로 낯짝을 가로지르는 저 빌어먹을 흉터 때문이거나.
“우욱.” 흉터의 존재를 눈치채기 무섭게 코비가 헛구역질을 했다. 내장의 겉과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것들이 무작위로 고개를 들고 코비를 향해 손짓했다. “그만…….” 코비가 신음하며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뒷머리에 타르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은 걸 떼어내야만 했다. 그는 이렇게 멈추어 서 있을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무엇이라도 좀…….
좋은 꿈?
벌벌 떨리는 손이 세면대 위를 짚는다. 가까스로 수도를 잠그자 똑, 똑 하고 일정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남았다. 코비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재빨리 간이 욕실을 빠져나갔다. 이곳은 철저하게 연구를 위한 공간이었다. 말인즉슨 코비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거의 없었다. 욕실을 나서면 곧장 방이었으므로, 코비는 어떤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마른 수건으로 거칠게 얼굴과 손의 물기를 닦아냈다. 이곳에서 기존의 하루란 무의미다. 그의 시계는 놀라울 정도로 그의 일에 맞춰져 있었다. 코비는 이제, 방 중앙에 서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뒤, 복도로 나설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벌레를 좀 보기 위해 움직여야겠지.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는 난제를 풀기 위해, 이미 수십 번 수백 번을 들여다본 것들에서 무언가라고 찾아내려 눈에 힘을 주어야겠지…….
수건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코비가 문을 열었다. 삭막하고 휑한 복도가 그를 반겼다. 이제 더는 헤아리지 않은, 무수한 날들 동안 마주했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차라리 죽이라지.” 염세적으로 지껄인 그가 걸음을 옮겼다.
지난밤에는 꿈을 꾸지 않았다. 기실 코비는 몇 년 동안 어떤 꿈도 꾸질 않았다. 눈을 뜨면 잊어버리는 것일는지도 몰랐다. 언제나 그는 식은땀에 푹 젖어서 일어났는데, 간밤 자신을 고통스럽고 괴롭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찝찝한 몸과 새까만 시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걸 시야라고 할 수 있다면. 그는 홀을 지나쳐 바깥으로 곧장 나왔다. 물론 그곳은 밖이 전혀 아니었다. 삭막한 풍경에 그럴듯하게 얼기설기 심어놓은 나무가 몇인가 있는 것이 전부인 공간이었다. 그건 코비가 자살하지 않도록 만들어둔 최소한의 방지턱이었다. 코비는 알았다. 이곳을 설계한 사람보다 그의 지능이 훨씬 더 뛰어났기 때문에, 그는 전부 알았다. 그런데도 그게 정말로 먹힌다는 사실이 우습고 역겨웠다. 자괴감이 들었다.
코비는 멍하니 깔린 대리석 길 위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해가 고개를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고, 하늘마저 협소한 이곳에서 코비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 바로 이 행위였다. 코비는 천천히 눈꺼풀을 내려 시야를 닫고, 숨을 크게 삼켰다. 가슴이 높이 부풀도록 있는 힘껏 호흡했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이 그를 감싸 안았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코비는 생각했다. 어느 날은 피뢰침이 될 만한 것을 가져다 세워 놓은 적도 있었다. 벼락이라도 꽂히면 전소되지 않을까? 비록 그것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겠지만…… 내가 죽은 뒤라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코비는 여전히 크게 삼키고, 크게 뱉었다. 깨끗한 공기가 속을 몇 번이고 헹구도록. 이건 유예였다. 그는 곧 제2연구동에서 나오는 벌레를 마주쳐야만 했다. 그것은 정확하게 벌레였고, 정확하게 매번 잊었다. 그것의 행태를 기록하고 새로이 얻은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이 저녁에 진행될 것이다. 더러운 소리를 내며 복도를 돌아다니는 벌레의 기척을 들으면서.
벌레가 되살아날 때마다 코비의 증오 또한 되살아난다.
그 벌레의 이름은 베르디. 날개가 없고 단단한 피질로 뒤덮인 끔찍한 괴물. 무지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어슬렁거리는 역병. 코비 재클린의 사명이자, 코비 재클린의…….
베르디.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코비의 닫힌 눈두덩이 움찔거렸다. 요즈음은 베르디를 떠올리면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났다. 아마 이전 베르디가 남긴 기억, 상흔 같은 그 기억 때문인 것 같았다. 베르디는 계속해서 잊고 코비는 모든 걸 기억했다. 갈가리 찢긴 머릿속의 지도는 여전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애석한 점이었다. 저번 베르디는 역겨운 벌레의 형상을 하고서도 마치 아이처럼 천진하게 행동했다. 자신이 열다섯이나 그 언저리쯤 된다고 여기는 듯했다. 환각제의 용량이 잘못 투여된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코비는 보고하지 않았다. 실수가 거듭된다는 사실을 상부에서 안다면 코비가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더 요원해질 것이었다. 정보를 조금 손보는 것은 쉬웠다. 이곳은, 말했지만, 하늘마저 협소한 철옹성이었으니까.
“있잖아…….” 베르디는 검은 팔 중 하나를 쭉 뻗으며 중얼거렸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우리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
베르디는 코비와 자신을 우리라고 불렀다. 그게 코비를 미치게 만들었다. 우리라니! 그건 실험체였다. 벌레였고, 재앙이었다. 코비는 그것을 파헤치고 탐구한 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낼 연구원이었다. 둘은 묶여선 안 되었다. 코비는 그것과 묶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끝이었다! 점점이 흩날리는 인간의 살점과 뜨겁게 쏟아져 내리는 피의 폭포. 검붉은 웅덩이를 밟고 선 날 이미 그러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저것을 죽도록 죽이도록 증오해야 한다고?
그런데 그날의 베르디는 정말이지 천진했다. 어쩐지 딱딱하게 튀어나온 그 눈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심코 생각해버린 것이다. 잔혹한 대학살의 날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과거의 어떤 날을. 그날은 바람이 유난히 향긋했고 볕이 따사로웠다. 이 좁은 연구소 단지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충만한 나날이었다. 코비는 깨끗하고 잘 다린 가운을 걸쳤고, 그의 동료들과 종일 의견을 나누었다. 베르디는 그때 창백한 소년이었다. 불안해 보이고, 소극적이지만 유난히 코비를 잘 따랐다. 적어도 저를 고의로 해치진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작은 심장 속에 자리한 듯했다. “실험체에게 정을 주는 건 좋지 못한 결정이야.” 동료 연구원 소라가 말했을 때, 코비는 낙담하면서도 뻔뻔스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게 어디 쉽나.” 코비의 대답에 소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베르디는 정말이지…… 눈에 띄는 아이였다. 코비는 그에게 무감정하게 대하거나 힘을 쓰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절대로 베르디를 특별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코비는 베르디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저 높은 담벼락을 넘게 해줄 수도, 베르디의 태생적인 고독과 고통을 이해하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랬는데도 열다섯의 그 어린아이에게는 코비의 존재가 절대적인 모양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비극이라 명명할 수 있지만, 그때의 코비는 얼떨떨하게 베르디를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코비는 고기능의 뇌를 가지고 있었고, 내로라하는 불세출의 천재였으며, 이성과 합리라는 단어와 몹시 어울렸지만 애정을 품은 만큼 인간을 잘 알지는 못했다. 바로 그게 허점이었다.
“크면 나도 너… 처럼 될까?” 베르디가 그런 말을 해온 게 바로 그날이었다. 황금빛 햇살과 달콤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그날. 외딴 연구동에도 가슴을 간지럽히는 분위기가 감돌던 바로 그날. 코비는 눈을 크게 뜨고 베르디를 바라보았다. “뭐?”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베르디는 눈물로 젖은 얼굴이었다. 기본적으로 베르디는 잘 울지 않았다. 웃는 일도 찌푸리는 일도 없었다. 그런 애 눈에서 저만큼 눈물을 뽑을 정도라면……. 오전에 검사를 받았다는데 그 과정에서 무언가 차질이 있던 것 같았다. 코비가 머릿속으로 연구원 명단에서 그럴듯한 이름을 고르는 사이, 베르디가 손을 뻗어 코비의 가운 자락을 잡아 쥐었다. 작고 마른 손가락 가닥가닥이 치밀하게 구부러지며 흰 천에 구김을 남겼다. 평소였더라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코비는 어쩐지 목구멍부터 턱까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코비는 품에 안은 차트를 어쩌지도 못한 채, 눈을 씀벅거렸다. 차트 끝을 감싼 손가락이 불안정하게 까닥거렸다. “무슨…….” 그리고 간신히 뱉은 말이 그것이었다. 한 문장도 채 되지 못하고 끝이 흐려진 음성이 따뜻한 바람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 사라졌다. 베르디는 자신의 낯을 유심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여타의 연구원과는 다르다고, 거의 확신한 표정이었다. 젖은 눈을 열심히 깜빡거리며 코를 훌쩍거렸다. “똑똑하잖아.” 흠뻑 젖은 얼굴과는 다르게 건조한 음성이 톡 튀어나왔다. 그건 그것대로 코비를 놀라게 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날의 베르디에게는 마치 노인과 회한이라는 비유가 어울렸다. 어린 소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고독해 보였고, 슬퍼 보였고, 분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눈앞의 어른에게 투신하고 기대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코비는 그 나이 때쯤의 아이가 어떻게 구는지를 알았다. 특별히 유복한 가정이 아니더라도 아이는 사랑받아 마땅한 취급을 받으며 자라난다. 넉넉하게 가진 것을 베풀고, 남으로부터 나의 모든 것을 지키려 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런데 이 앞의 베르디는 그 과정을 건너뛰어 아득히 먼 미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어린아이도 그렇게 되어선 안 되었다. 코비가 한쪽 눈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한쪽 손을 뻗었다. 베르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아이 특유의 열기로 젖은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녹진하게 손가락에 감기다가 포르르 흩어지는 그 감촉이.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언가 갈라지고 있었다. 무감과 고아함으로 무장한 그의 가슴팍을 벌리며…… 무언가가 튀어 나오려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그건…… 그건 다정이었다. 다른 말로는 선심이며 측은지심이었다. 코비에게도 그런 패가 있었다. “넌 더 나을 수도 있어.” 9할은 거짓이었지만, 아이에게 건네기엔 적절한 사탕이었다. 그때 둘이 선 땅으로 조금씩 볕이 들었다. 구름이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코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았다. 드러난 해의 손길에 베르디의 젖은 낯도 가운데부터 조금씩 마르고 있는 모습이 훨씬 보기 좋은 탓이었다. “…….” 베르디가 입술을 우물거리다, 고개를 젓는 것도 끄덕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행동을 취하더니 꽉 잡아 쥐었던 가운을 서서히 놓아주었다. 코비는 주름이 잔뜩 진 가운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베르디의 머리칼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런 날이 자꾸만 조각난 기억과 판단 사이로 끼어들었다. 괴물을 두고 할 수 있는 생각은 절대로 아니었으니, 어쩌면 정말로 제가 미친 것일는지도 몰랐다. 코비는 눈을 떴다. 여전히 황량하고 높은 담벼락이 그와 마주 보는 곳에 우뚝 서 있었다. 얼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코비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떨리는 손으로 낯을 짚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가느다랗고 거친 표면을 더듬고 있자면 누가 머릿속에 락스를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아득해졌다. “아…….” 저절로 고통에 찬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엉겁결에 구부정하게 상체를 숙이면, 흰 대리석 길 사이사이로 누렇게 뜬 잔디가 보였다. 그날과는 영 딴판이었다. 달큰한 향기도, 새의 지저귐처럼 비치는 햇빛도, 맹목적이고 살가운 아이도 없었다. “그거랑 이건 달라.” 코비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 아이와 이 빌어먹을…… 빌어먹을 것은 다르다고…….” 코비는 불과 얼마 전에도 벌레의 표피를 뚫고 환각제를 놨었다. 아이는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통제 불가한, 자신이 아직도 인간이라고 믿는 괴물만이 그것을…….
코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제2연구동을 향했다. 또, 지금의 베르디와 이전 버전의 베르디조차 달랐다. 베르디는 이미 아이의 기억을 잊은 채였다. 그저 눈에 띄게 거친 손길이나 종종 차가운 시선으로 저를 냉대하는 코비의 눈치를 보기 급급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코비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고, 코비와 제가 하는 일이 옳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또…… 의심하고……. “하.” 코비가 문을 거칠게 열었다. 여전히 차가운 색감의 복도가 펼쳐졌다. 곧 베르디가 일어날 시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꺼운 문 너머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닥을 기는, 육중하고 단단한 껍질을 가진 생명체의 소리가.
베르디의 일과는 코비보다도 단출했다. 그 애는 의무가 없었다. 코비가 연구에 몰두하는 동안, 인류를 위해 천재적인 두뇌를 사용하는 동안 연구소를 일도 없이 돌아다녔다. 몇 번이고 해낸 것이었지만 늘 새로워했다. 나는 왜 이곳에 있어? 그것을 납득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언제나. 지금은 그다음 단계였다. 백신을 만들 때까지만, 완성할 때까지만 반복하면 되는 지난한 시간의 지표 중 하나. 코비는 베르디의 앞에 고요하게 서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단단하고 검은 팔들이 베르디가 숨을 쉴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밖엔 내 가족이 있어.” 코비는 차가운 철제 침대를 차트로 가리켰다. 그는 언제나처럼 조금 피곤했고, 어서 끝내고 싶었다. “말했지?” 부드러운 미소가 저절로 입에 걸친다. 사실이었지만 감정은 거짓이었다. 코비는 이제 바깥의 제 가족을 그리워한다는 감정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다. 부모님의 얼굴을 그리면 곧장 구역질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제가 있는 곳이 산산이 파괴되던, 의지하는 인간들이 다져지던 장면이 구멍 난 감정의 사이사이로 끼어들었다. “…… 응.” 베르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애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코비의 눈치를 지나치게 고려하고 있었다. 뭐, 코비로선 그런 편이 다루기 쉬우니 다행이었다. 코비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이가 살짝만 보이도록 입을 벌려 웃었다.
“그럼 누워.”
실험은 지겨운 것이다. 실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실험에 희망은 없다. 실험이란 그저 나쁜 꿈.
“오늘의 할 일을 해야지.” 코비가 말하자, 주춤거리던 베르디가 차가운 침대 위에 길게 몸을 눕혔다. 철과 벌레의 껍질이 부딪히며 내는 딱딱거리는 소리는 역겨웠다. 코비는 그것을 감추려 더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빈 주사기를 들어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코비가 날카롭고 반짝이는 바늘 끝을 베르디에게 향하도록 겨누었다. 이대로 팔이 아니라 목을 뚫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베르디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기억을 잃은 채로. 코비는 잠시 일어났던 충동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베르디의 역겨운 팔을 잡아 쥐고 바늘을 꽂아 넣었다. “…….” 베르디는 신음을 삼켰다. 통증이 없을 리 만무했다. 바늘이 수백 수천 번 꽂힌 장소였으니까. 베르디가 잊은 것이 너무 많았다…….
투명에 가까운 미색 체액이 주사기에 가득 차면 코비는 주사기를 물렸다. 어차피 현미경으로 본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표본을 채집하는 건 중요했다. “나 가도 돼?” 베르디가 칼칼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 용량과 색을 거듭 확인하던 코비가 히스테릭하게 말했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 가서 뭐라도 해.” 어차피 나갈 수 없을 테니까. 이걸 해결할 때까진. 코비가 그대로 등을 돌리고 책상으로 걸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베르디가 주춤주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다시, 예의, 그, 토도독, 서걱서걱…… 하는 소리가 연구실을 가로지르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정적이었다.
플레이트에 체액을 쏟고 얇은 유리판 사이에 몇 방울 덜어낸다. 그 위로 기포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른 유리판을 덮는다. 현미경 아래로 끼워 넣고, 영점을 맞추고, 고개를 숙여 눈을 들이대는 행위까지 기계적이었다. 코비는 이런 짓을 눈 감은 채로도 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 최악의 날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움직였었다.
“제발!” 코비는 그답지 않게 절박한 목소리로 헐떡거렸다. 기관과 연결되는 유일한 핫라인을 쥔 채였다. 피는 이미 멎었지만, 채 갈아입지 못한 옷은 검붉은색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방에서 매캐한 냄새가 났다. 몇 구의 시체를 태웠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에디, 소라, 라몬스, 에디, 소라, 라몬스…… 그리고……. 턱, 턱, 턱……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둔탁하게 몸을 부딪치는 그 소리가 귀를 마구 후려쳤다. 코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와줘야 합니다.”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아니, 떨리는 건 코비의 몸이었다. 그는 거의 경련하고 있었다. “구출이 필요합니다. 다 죽어버렸어요. 남은 것은 나, 코비 재클린이 전부입니다. 에디, 소라, 라몬스…… 전부…….” 코비는 수화기를 두 손으로 쥔 채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큰 움직임에 벌어진 얼굴과 가슴의 상처가 타는 듯이 욱신거렸다.
“새로운 양상이군요.” 사무적인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새로운 발견이에요.”
“하하…… 하하하……!” 코비는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둔기로 머리를 몇 대 얻어맞은 듯했다. 그건, 그러니까 이런 뜻이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했으니 다행이에요. 그걸 디딤돌 삼아 더 높은 곳을 봐야죠.
“닥터 재클린, 모든 것은…….”
코비는 아직 수화기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유일하게 그가 대화할 수 있는 산 존재였다.
“인류와 국가를 위해.”
코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구도 보지 않을 순응이었다. 누구도 볼 수 없는 결의. 얼굴과 가슴의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게 느껴졌다. “당신에게 물자를 지원할게요. 새로운 항로일 수도 있어요.” 다시 기계적인 목소리. 정말로 우스운 점은, 그때의 코비가 실제로 희망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예…….” 코비는 피가 굳어 뻣뻣해진 손으로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죽은 동료들이 산처럼 쌓인 구간을 지나 벌레가 갇힌 방을 피해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코비는 흑흑거리는 숨이 단어와 단어 사이로 끼어드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지만, 새로이 필요한 물자와 설비를 전달하는 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벌어진 가슴팍을 손으로 짚은 채, 그날도, 이 현미경 앞에 앉아 있었다. “해낼 수 있을 줄 알았지…….” 코비가 중얼거렸다. 그리곤 후회했다. 부정의 말을 입에 담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럴수록 코비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속부터……. 그를 유지하는 것은 겉껍데기였다. 만일 다시 한번 이것이 갈라진다면 영영 모든 게 끝이 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세포는 평소와 같았다. 조금의 진전도 없었다. 공식을 다시 더듬어 봐야 할 듯했다. 어쩐지 웃는 얼굴인 듯한 세포들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살피던 코비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찢어졌던 곳이 뻣뻣하게 당겼다. 식은땀이 뒷덜미에서부터 미끄러져 척추를 따라 내달렸다.
쿵, 쿵, 쿵…… ……. 벽을 두드리는 소음, 그것은 더는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디로부터의 소리인가?
……. 코비는 손을 들어 당기듯 아픈 가슴을 짚었다. 심장의 고동이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 그러니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증거. 갈라졌다 어설프게 붙은 연약한 이음새가 덩달아 진동했다. 살아 있다는 증거. 그러니 죽을 수도 있다는…….
그 뒤로도 베르디는 몇 번이나 기억을 잃었다. 코비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였다. 그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쌩쌩 굴러가던 머리통은 곧 연료를 모두 소모한 채 멈추게 될 것임을 암시하듯, 자주 덜그럭거렸다. 눈을 감았다 뜨면 머리를 쥐어뜯는 자세로 깨어난다. 정신이 차려지지 않아 거울을 보며 뺨을 수없이 내리친 것도 몇 번이나 되었다. 공식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들고 있던 볼펜으로 허벅다리를 찍어 누르거나, 벽에 머리를 박았다. 여러 번, 또 연거푸. 코비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이제 베르디가 몇 번이나 기억을 더 잃었는지, 그로부터 날이 얼마나 지났는지 슬슬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 알잖아?” 코비가 날카롭게 물으면 베르디는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젓거나, 끄덕거렸다. 항상 둘 중 하나였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거나.
저건 왜 자라지 않는 걸까? 베르디의 무구한 눈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피를 질질 흘리는 이마를 힐끗거리면서, 이 연구소에 무지막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괴물을 얼마나 봐줘야 하는 거지?
왜 나를 괴물 보듯 하는 거야.
괴물은…….
“궁금했어.” 괴물은 침착하게 말했다. 의연함이 그 속에서 반짝거렸다. 궤멸을 불러일으킬 사고를 친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코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젖히듯 들었다. 목구멍으로 뜨끈한 감정이 울컥울컥 흘러들었다.
전부 끝이었다. 이곳에 남은 벌레라곤 저 악마 하나뿐. 코비가 그렇게까지 지켜내고자 한 것들이, 세상과 단절코자 전부 바쳤건만, 한순간 모두 빠져나갔다. 코비는 질금 눈을 떴다. 베르디는 열린 문 바로 옆에 있었다. 시꺼멓게 아귀를 벌린 듯한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연구소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희망마저 다 사라진 것이다. 벨제붑의 악령이 사람들 사이로 휘몰아치리라. 그저 앞서 생각하는 자가, 인간을 사랑했을 뿐인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려진 벌을 보아라……. 무구함의 감투를 쓴 최초의 악마는 멀뚱히 서 있었다.
좋은 꿈이라는 축복은 어디에 있나? 차라리 검정이었다면. 이 지긋지긋한 악몽을 더는 견딜 수 없다…….
코비는 메스를 빼 들었다. 흰 가운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죽어야 했다. 쿵, 쿵, 쿵. 가슴이 엇박으로 뛰었다. 무언가 한 번 갈라졌던 흔적을 찢으며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더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었다. “이젠 못해.” 코비가 웅얼거렸다.
베르디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서서, 코비를 헤아리려 노력했다. 숨이 막히는 광경이었다. 넓게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단단한 외벽 안에 움츠리고 살아가는 은자의 기분이 이럴까? 문을 여는 순간 빠르게 빠져나오던, 무수한 벌레들이 빚은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웅웅거렸다. 베르디는 손바닥으로 제 귓바퀴를 문지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코비는 불안정해 보였다. 반짝거리는 메스 날을 제 목으로 겨누더니 눈을 똑바로 마주쳐왔다.
“너는 이 세상의 악이야.” 코비의 저주는 투명했다. 맑고 아름다웠다. 인간에게 불을 건네던 손길이 그랬듯이. 높은 산에 묶여 간을 내어주던 옆구리의 상앗빛이 그러했듯이. “존재해서는, 존재했어선 안 될…….” 코비가 일그러진 웃음을 내보였다. 눈앞의 장면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죽은 동료들의 산, 피 웅덩이, 화창한 햇빛, 두껍고 단단한 외벽, 곧 벌어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현미경 렌즈 너머의 표본, 눈물에 젖은 아이의 얼굴, 머리채처럼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들……. 메스를 목에 대고 깊이 누른다. 눈물이 툭하고 터져 나왔다.
“넌 나 같은 게 될 수 없어.”
베르디는 코비의 말을 듣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등에 차갑고 딱딱한 벽이 닿았다.
“그래선 안 되고.” 코비의 목에 작은 틈이 생겼다. 틈은 곧 핏방울을 떨어트렸다. 그는 분명히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동시에 홀가분해 보였다.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건 탈주였다. “좋은 꿈은 없어, 베르디.” 코비가 헐떡거렸다. 그는 오래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파리한 안색으로 피를 흘려댔다. “더럽고 나쁜 꿈만이 존재하지.” 악에 받힌 목소리가 웅웅거린다.
“난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날 거야.”
“…… …….” 베르디는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무기력했다. 그로선 도저히 코비를 막아설 수 없었다. 왜 모든 것이 망가졌다는 것인지,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인지 깨닫지 못한 머리는 먹먹할 뿐이었다. 기실 베르디는 기억이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들었던 코비의 말 중 제대로 이해한 것이 몇 없었다.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었지만…… 코비가 말하고 있지 않나.
너는 그래선 안 돼. 나는 나갈 거야.
어디로?
이 몸이라는 허물 밖으로.
“기억 안 나.” 베르디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애써 무시하며 눌러 말했다. 코비가 가여웠다. 그는 괴물 같았지만, 때때로 다정했다. 어떤 동물이든 좁은 공간에 오래 갇혀 있으면 정형 행동을 보이기도 하니 베르디는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이제는 전부 필요 없어졌지만. 이 공간에서……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무거운 질문이 베르디를 짓눌렀다.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다. 베르디가 눈물을 참아내려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코비는 메스를 쥔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단번에 찔러 넣었다.
“하지만 받아들일게…….” 베르디는 체념했다. 코비는 죽을 것이었다. 그를 말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저는 그처럼 연구원도 아니었을뿐더러, 자격조차 없었다.
시야로 검정에 가까운 붉음이 쏟아진다. 뜨끈하고 역겨운 냄새 또한.
“미안해.”
베르디가 말했으나 코비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끝내도 괜찮아.”
이미 끝은 찾아왔으니까.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베르디는 생리적으로 꿈틀거리는 몸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절벅거리며 고이고 있었다. 그러나 코비의 검정만은 오염되지 않았다. 흰 가운이 전부 피로 물들고, 살갗 사이사이로 죽음이 파고드는데도 코비의 날카로운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여전히 검정이었다. 베르디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숨을 쉬면 쉴수록 피 냄새가 속에 스미는 듯했다.
“말했잖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앞으로도.” 코비가 말했다. 아니, 그건 거짓이었다. 코비는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생명의 베일이 그에게서부터 벗겨져 허공으로 날아가다 사라져버렸으니까. 베르디는 그의 죽음을 이해했고, 그와 다시 대화할 수 없으며, 그의 목소리를 듣는 건 이상한 일임을 알았다. 그런데도 분명히…… 코비는 그렇게……. 축 늘어진 코비의 목에는 흔들리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벌어진 틈은 검정이었고, 폐에 남아있던 공기가 새애액 하는 소리를 내며 느리게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틈으로 코비가 달아났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괴물 같던 겉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영혼을 웅크리고 비틀어 달아난 프로메테우스. 베르디는 뜨뜻하게 젖는 발끝의 감각에 시선을 내렸다. 핏물이 베르디가 선 곳까지 끼쳤다.
“…… …….”
온기는 곧 사라질 것이다. 피는 빠르게 굳는다. 그러고 나면 베르디는 혼자였다. 그가 뱉는 문장은 전부 평생에 걸친 독백이 될 것이었다. 베르디는 주춤주춤 코비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다시, 열린 문을 돌아보았지만 그건 그냥 여전히…… 열린 문이었다.
문득 팔이 아팠다. 주사로 난도질당한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겠지. 베르디는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제 팔로 눈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보였다.
인간의 손이었다. 인간의 팔이며, 인간이 가지는 살결 특유의 부드럽고 환한 빛이었다.
“좋은 꿈을 꾸고 싶어.” 베르디는 지친 걸음을 계속했다. 바깥으로 나가든, 나가지 않든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코비는 자신을 혐오했다. 인정하고 나자 약간이나마 서글프고, 힘겨운 마음이 들었다.
차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베르디는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눈치챘다. 벌레였다. 밤에 눈을 감으면 벽 너머로 들리던 벌레의 소리였다. 격리실의 문을 열었을 때 쏟아져 나오던, 그런 벌레의 소리. 인간이 아닌 것이 바쁘게 움직일 때 나는 그러한 소리. 하지만 벌레는 전부…….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베르디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반질반질하게 주변을 비추는 문이 하나 보였다. “…… …….” 베르디는…… 눈을 깜빡거렸다.
완전한 벌레 한 마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좋은 꿈을 꾸고 싶어.”
베르디가 제 팔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살갗이 밀려 벗겨지는 통증이 있었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짙은 색의 경질 껍데기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숨이 가빠진다. 이건 나쁜 꿈인가? 이건……. 베르디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복도의 끝을 보았다. 붉은 핏물이 모여 흐르다, 종래에는 가느다란 선으로 이어져 복도까지 침범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사삭, 하는 불쾌한 소리가 흘렀다. 베르디가 걷는 소리였다. 베르디가 뛰는 소리였다. 베르디가 기는 소리였다.
베르디는 이제 다시 코비의 죽은 몸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엎드려 있었다. 모르겠다. 베르디는 몰랐다. 자신이 왜 악인지, 왜 역겨운 것인지, 왜 이런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인지…… 왜 살점은 떨어져 나오지 않으며, 왜 나쁜 꿈이 계속되는 것인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한 해답인 남자는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베르디가 코비의 몸을 잡아 흔들었다. 금세 식은 몸은 감촉이 이상했다. 미지근하고 약간 빳빳했다. 그리고 베르디가 잡은 곳에는 길쭉한 자국이 남았다. 인간의 손으로는 절대로 낼 수 없을 법한 그런 자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시반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한 베르디가 주저앉았다.
철벅, 하는 소리가 났다. 피 웅덩이였다.
“코비?” 베르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코비 재클린?”
당연하게도 고요가 이어졌다. 베르디의 손이, 어쩌면 다리가 복도 바닥을 더듬거렸다. 따끔거리는 감촉과 함께 메스가 잡혔다. 베르디는 다시금 제 손을 확인했다. 검고 뭉툭하고 가느다랬다. 메스에 찔린 끝에서는 미색 투명한 체액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복도 바닥이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숨은 가쁘지 않았다. 눈을 굴리면, 코비는 여전히 누워 있다. 벌어진 목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좋은 꿈을 꾸라고 했잖아……?” 베르디는 고해한다. 그는 꿈을 꾼 적이 없었다. 매일 밤은 그저 암흑이었고, 눈을 뜨는 순간은 창백한 백색이었다. 무엇도 기억하지 못하는 머릿속이 상영할 수 있는 영화란 없었다. “그런데 혼자 깨?” 멍한 음성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베르디는 메스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메스는 차갑다. 결심은 차갑다. 복도 바닥은 차갑다. 눈물은 차가운가?
피는…… 차가운 것인가?
눈물은 차갑지 않다. 피는 차갑지 않다. 그러면 나를 적시는 이것은 무엇이지?
그는 눈을 떴다.
그의 이름은 베르디, 나이는 열다섯 살, 이곳은…… 복도이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연구소의 복도. 차갑고 축축한 액체는 몸을 적시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흥건하다. 베르디는 어렵사리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핏기가 하나도 없이 새하얀 몸이 엎드려 누워 있었다. “당신은 누구야?” 베르디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디는 문득 손끝으로 제 가슴을 더듬었다. 마치 갈라졌던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틈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조금 더 움직이면 막다른 살이 만져지고, 더는 파고들 수 없었다. 차가웠다.
어리둥절하고 궁금했다. 고개를 들면 닫힌 문이 있었다. 다만 적막했다. 지척에 누운 몸은 미동도 없고, 전신에 힘이 쭉 빠져 움직이기 어려웠다. 몸을 뒤척이면 파르르, 공기가 떨리는 소리가 잠시 울리다가 사그라들었다.
“이건 꿈인가……?” 베르디가 의문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