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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빛의 인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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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인과율
Wirter. 얌 | Design. 민이
그 저택에선 빛이 가장 값진 것이었다. 태양이 유일하게 예외로 삼는 너른 터는 사계절 내내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낮에도 초저녁처럼 어둑했다. 웃자란 나무 그늘 밑에 서 있으면 저 아래 마을이 뿌옇게 보였다. “필시 보통 존재가 아니야. 뭔가 낀 게지.” 천수각 사람들은 그것이 유령의 짓이라고 수근거리곤 했다. 아이에게 유령은 매력적인 존재다. 반투명한 입김이 무언가를 가리고 있다면 반드시 들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히마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저택에서 그 뭔가에 가장 많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 어려서 할 수 있는 수줍은 고백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처럼 작았다.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 그럴 수 있다면….” 저택이 항아리라면 히마리는 그 안에 고인 갈망이었다. 그녀는 창살 없는 창문만으로도 부자유를 느꼈다. 말이 좋아 사방이 뚫려 있다 뿐이지 성인의 명치께에 겨우 올 수 있을 정도로만 자란 히마리가 저택의 저 아래로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저택의 가장 가장자리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신쿠도 그 옆에 있었다. 항상 같았다. 히마리의 곁을 떠나는 법이 없는 남자애. 신쿠는 그림자의 역할에 불만도 만족도 없는 모양으로 가만히 서서 입을 열어도 괜찮을 때를 기다렸다. 구름이 바람에 밀려 빠르게 지나간다. 히마리는 노란 구체에 불과한 태양과 저 아래에 있는 마을을 번갈아 보며 즐거운 상상을 이어갔다. “아가씨.” 히마리의 콧잔등과 뺨 위로 퍼진 짧은 자유가 선명해서, 신쿠는 무척이나 주저하고 있었다. 그 단어를 뱉음으로 히마리가 공기에 보이는 저항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저택을 둘러싼 숲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가르고 들어간다든가. 히마리는 대답 대신 “신쿠, 궁금하지 않니?” 하는 물음을 돌려주었다. 신쿠는 초조하게 저택을 돌아보았다. 그건 곧 일어날 일에 대한 확실한 암시였다. 검은 새 떼 같은 무리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곧 지척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두견새 울음만큼 나직하고 낮은, 그래서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발소리였다. “아가씨.” 신쿠가 채 뒷말을 잇기도 전 가까이에 펼쳐져 선 그들은 키가 작은 집들이 삼삼오오 모인 민가를 한참이나 내다보는 히마리를 안아 들고 빠르게 저택으로 들어갔다. “가주님의 허락 없이 이렇게 멀리 나오시면 안 됩니다.” 고작 쉰여섯 걸음이었다. 그들이 히마리를 데리고 들어가기까지, 어른의 몸으로 딱 쉰여섯 걸음이 걸렸다. 히마리에게는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쿠는 모든 죄를 짊어진 사람처럼 히마리를 든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그는 단념이라는 회초리 끝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줄 알았다. 제 행동이 곧 히마리의 평판이 됨을 이미 알았다. 히마리는 기세 좋게 저택의 끝까지 나온 것치고 조용했다.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저를 들고 걷는 이들에게 모든 걸 맡길 뿐이었다. 흐린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진한 색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밥 짓는 냄새,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소란스러운 패가 지나다니며 만들어내는 각종 사건……. 히마리는 그런 장면을 억지로 떠올리고 있었다. 한 번도 실제 눈에 담아본 적이 없기에 더 맹렬히 상상해야만 했다. 그래서 신쿠는 소리 낼 수 없었다. 히마리의 집중을 흐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보란듯 히마리의 옆에 세워져 모진 매질을 당하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건,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건 동정의 눈길이나 끝없는 위로가 아니었다. 아득한 공상에 빠진 소녀의 옆얼굴이었다. 저걸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신쿠는 아직 덜 여문 주먹을 쥐고 참아내었던 것이다……. 종아리에 가로줄이 몇 개나 그어지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가씨께선 아셔야 해요.” 한 번의 매질에 하나의 문장을. 그건 언제나 견고한 규칙이었다. “그렇게 좋은 옷을 입고 풀밭에 나가면 안 된답니다.” 힘은 매우 균일했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게 하겠다는 못된 선의가 있었다. “풀물은 매우 억세서 귀한 옷감을 물들이고 또 망치고 마니까요.” 신쿠는 매질하는 가정교사가 히마리를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더러운 건 아예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게 나은 법이니까요.” 그는 신쿠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쿠의 눈동자를. 저택에서 유일하게 빛이 드는 그 복도는 구석에 있었다. 기실 복도라기보다는 복도 끝에서 꺾어지는 작은 공간이었다. 물건을 놓기에도 애매하며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그곳은 천장에 뚫린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왔다. “이 저택을 지은 건축가는 아주 유명했다고 해.” 히마리는 그곳에 엎드려 누운 신쿠의 등을 어루만졌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견갑골과 열이 올라 끈끈해진 살갗을 달랬다. “아가씨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집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신쿠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혼몽한 와중에도 적확한 단어를 고르려 애썼다. “영원히?” 히마리가 물었다. “영원히.” 신쿠의 등 위에 작은 햇빛이 점점이 맺혔다. 가장 값진 것. 히마리는 빛이 얹어진 위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있지, 신쿠.” 열기가 올라오는 종아리에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였다. 어떤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환기한다. “네, 아가씨.” 신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엎드린 채였으므로 그가 확실하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히마리는 식은땀이 맺힌 그의 목덜미에만 시선을 두었다. “만일 내가 가주가 되면, 나는 우리에게 모든 걸 허락할 거야.” 흰 손가락들이 금을 타듯 신쿠의 등 위를 거닐었다. 신쿠는 자꾸만 가빠지려는 숨을 삼키며 바닥에 포갠 팔 위로 고개를 묻었다. “…….” 대답하고 싶었지만 통증이 상당했다. 그어진 붉은 선들은 마치 각각 자아를 가진 것처럼, 뜨겁게 자글거리며 종아리를 휘감고 무릎 위를 올라올 듯했다. “쉰여섯 걸음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유를 우리에게 줄 거야.” 히마리가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서역의 사람들은 간절히 바라는 게 있을 때면 손을 모으고 하늘에 간청한다고들 하던데…… 지금 히마리에게는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빛이 드는 하늘이라곤 손바닥 두 개 로 가릴 수도 있을 법한, 천장의 작은 창문이 전부였다. “자유 말야, 신쿠.” 종이 인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 히마리는 지금 제가 갖는 한계를 절실히 알고 있었다. “자유…….” 작은 입술 사이 에서 자꾸만 같은 단어가 쳇바퀴를 돌았다. 발음하면 발음할수록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목이 마르고 가슴이 바싹 조여 왔다. 손끝이 떨려 신쿠의 등을 고르게 쓰다듬을 수가 없었다. 히마리는 불덩어리처럼 애달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뜨거운 행복, 그저 미래를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가질 수 있는 그 가냘프고 소중한 행복이 그녀의 몸에 철철 넘쳐흘렀다. 창백한 뺨에도 미미한 혈색이 감돌았다. 턱없이 부족한 빛 때문에 자라난 기갈이 빛을 위해 펼쳐지는 것이다……. “네, 아가씨.” 신쿠는 다만 암흑과 같은 팔 사이로 더욱 깊게 고개를 파묻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언제라도. 그게 언제라고 하더라도……. 아름다운 희망. 가냘프고 연약한 빛 같은, 따뜻한 맛이 나는, 언제고 꺼내 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희망. 그늘의 맛이 났다. 히마리는 눈을 떴다. 방은 격식을 갖추어 정돈되어 있었다. 다만 너저분한 게 있다면 금발의 사내뿐이다. 신쿠. 그는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던 상체를 일으켜 더듬더듬 히마리의 머리 옆을 손으로 짚었다. “일어나셨군요.” 문장 하나를 평탄하게 뱉지 못하고 턱턱 끊기는 분노를 드러낸 그가 히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깜, 빡. 히마리가 눈꺼풀을 닫았다 열자 차가운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신쿠가 구겨진 것처럼 보인 건 전부 고여 있던 눈물 탓. 히마리가 작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틀었다. 손쓸 수 없이 많은 양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좋은 꿈을 꾸셨나 보네요.” 신쿠가 손끝으로 히마리의 눈물을 훔쳤다. 닦아내는 것이 아닌, 손가락 위에 눈물을 얹고 감정하려는 태도였다. 히마리가 가냘프게 떨며 꿈속의 일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제발. 히마리는 이름 모를 거대한 힘에게 간청했다. 아직 꿈속에서 늘어뜨렸던 사지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제발……. “이제 시간이 왔어요, 아가씨.”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묘한 빈정거림이 스민 음성이 히마리를 찔렀다. 히마리는 뜨끔한 마음을 감추려 비와 돌조각에 젖은 새처럼 몸을 뒤척거렸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 일어나는 것보다 신쿠의 힘이 먼저였다. 신쿠는 좀처럼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시간을 지체하는 것을 지나치게 싫어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히마리는 분 단위로 자신을 재촉하던 신쿠를 떠올렸다. “…….” 눈을 내리깔면 남아 있던 작은 눈물의 파편이 아래로 흩어진다. 너무 가뿐하게, 그의 팔에 붙들려 일어난 히마리가 입을 앙다물었다. 내가 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신쿠가 눈을 갸름하게 떴다. 여전히 눈물길이 반짝이는 그녀의 낯을 보고 있노라니 구역질이 치밀 것 같았다. 그러나 신쿠는 웃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이제 아가씨는 제가 아니라면 혼자 몸을 일으 킬 수도 없네요.” 히마리의 몸을 작고 아름다운 의자로 이끌면서, 신쿠는 끊임없이 낮게 속삭였다. 뱀처럼. “둘뿐인 천수각이니, 다행인 일이죠.” 바싹 말라 의지가 보이지 않는 어깨를 어루만진다. 또…… 뱀처럼. 히마리는 제 갈비뼈 언저리를 스치는 신쿠의 손길에 눈을 질끈 감았다. 히마리는 멍하니 앉아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부가 아주 희고 창백해서 거의 그늘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한때 영원을 약속하며 빛을 잃었던 눈동자는 깊은 고동색으로, 눈물에 젖어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방이 눅눅한 어둠으로 차 있었기에 얼굴의 윤곽은 딱딱 나뉘어 그녀가 느끼는 비참함을 강조했다. “있지, 신쿠.” 그녀는 자신을 돕는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네 말이 맞아.” 긴 속눈썹 위를 건조하게 닦아내는 천에 눈을 감으면, 초마다 생생하게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정말 좋은 꿈을 꾸었어.” “그래요?” 신쿠가 조소했다. “어떤 꿈이던가요, 아가씨?” 그는 기꺼이 장단에 맞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억나니.” 히마리는 다시, 눈을 떴다. 뺨에 칠해지는 분 냄새가 따뜻했다. “우리 그 약속 말야.” 히마리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거울 속의 여자는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히마리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행복함을 찾으려 애쓰는 비천한 여인. “내가 가주가 되면 뭐든 해준다고 했지.” 히마리가 고개를 틀어 신쿠를 바라보았다. “그 약속은 아직 유효해.” 신쿠는 웃지 않았다. 시꺼먼 어둠이 드리운 낯을 무섭도록 굳히고 히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곧 기묘한 계책이 하나 떠올랐다는 듯, 얇고 하늘하늘한 장옷을 들고 돌아오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전 그 약속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아가씨.” 앙상하고 힘없는 히마리의 나신이 드러났다. 건조한 광경이었다. 신쿠는 주저 없이 그 마른 몸 위로 장옷을 둘려 입혔다. 찬 공기에 몸을 바르르 떨던 히마리가 눈을 크게 떴다. 불꽃이 튀듯 현실이 퍼뜩 뛰어올라 그녀 앞에 펼쳐졌다. 히마리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가까스로 참는, 가엾은, 명백히 우울한 여자…… 히메미야 히마리가 앉아 있었다. 신쿠, 신쿠, 신쿠. 히마리는 계속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에 기인한, 과거를 더럽히는 금빛 악마가 기어코 제 목을 비틀어 죽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쁜가? 그건…… …… 꼭 자유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신쿠가 히마리의 몸을 안아 들었다. “아.” 히마리의 입술이 벌어지고 가냘픈 한숨이 터졌다. 소름이 끼치도록 꿈속의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히마리는 그 언젠가, 자신이 아주 어렸을 적, 깨금발로 일탈을 시도하던 그때를 불러와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살이 더 빠지신 듯하네요.” 신쿠가 복도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기묘한 정적도, 어둠도 그대로였다. 저택은 마치 어둠을 먹고 몸을 불린 거대한 괴물의 배 속 을 거니는 듯했다. 히마리는 증오해 마지않는, 정겨운 집 곳곳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며 눈조차 깜빡거리지 않았다. 토막 난 끈을 억지로 묶어 엮어둔 것처럼 정신이 어설프게 연결된 게 느껴졌다. 신쿠가 모든 걸 망가뜨리고 있었다. 머리를 헤집어 뇌를 다 섞어 놓아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리라. 신쿠가 ‘제’ 신쿠를 죽인 이후로, 히마리는 자주 꺼져가는 등불 같은 눈빛으로 천수각의 어두운 벽들을, 그 벽에 얼룩진 마찬가지로 어두운 그림자들을 보곤 했다. 신쿠는 자꾸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천수각은 모두가 죽기 전 복도와 별실 몇 개의 증축을 끝낸 상태였다. 히마리는 신쿠와 함께 할 수 있는, 그와 단둘이 지낼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 몇 개를 더 만들고자 했다. 히마리의 죽은 부친이 남긴 마지막 허락이기도 했다. 용도까지는 모르는 듯싶었지만. “욕심을 부릴 줄 알게 되었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히마리를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히마리는 말라버린 갈망의 밑바닥이었다. 이 저택은 사금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때의 진심은 져버린 매화였다. 새는 떠나고 울어줄 이는 존재하지 않으니, 히마리는 젖어 짓이겨진 꽃잎 같은 손을 움지럭거리며 그저 숨을 죽였다. 히마리가 그때 늘린 복도와 방은 지금의 신쿠가 더 깊은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갈 구실이 될 뿐이었다. 신쿠가 막 복도의 끝을 돌기 전, 히마리의 어깨가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거기 아직 그 장소가 남아 있었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천수각을 다듬을 때 없앨 수 없었다. 이젠 다 커버린 히마리와 신쿠는 함께 들어갈 수 없을 만큼 협소한 단 한 칸의 공간. 위로 높은 천장이 있고 거기엔 작은 창이 나 있다. 반대로 복도를 늘렸지만 그곳 만큼은 좁은 상태 그대로 두어야만 했다. 바닥에 점점이 흩뿌려지는 희미한 햇빛…… 그건 이 저택에서 여전히 가장 값진 것이었다. “신쿠, 신쿠.” 히마리가 갑작스레 소리 높여 호명했다. 그 어느 날 가졌던 고귀한 귀족 여식의 긍지가 고스란히 엿보이는 어조였다. 도착적으로 깊은 곳을 향하던 신쿠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아가씨는 아직도 어린애 같은 말투를 사용하시네요.” 분명한 경고였지만, 히마리는 멈추지 않았다. 외려 저를 강제에 가깝게 안아 든 신쿠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기까지 했다. “나, 가주가 될게. 저기 보이지? 저 작은 좁쌀 같은 햇빛들…… 마치 황금 같지 않니.” 히마리의 얼굴이 최근 사이 가장 밝았다. 신쿠는 그것을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눈으로 응시했다. 절멸을 바라는 것이 분명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거렸다. 그에게 한낱 햇빛 조각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언젠가는, 그 언젠가의 시간에선 소중한 재화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는 목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건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였다. 신쿠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비소를 머금었다. “아가씨는 황금빛을 좋아하셨죠.” 신쿠의 걸음이 빨라졌다. 히마리는 여전히 신쿠의 목을 안은 채, 점점 멀어지는 그 공간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으려 애썼다. 다시 눈물이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가엾은 몸이 꿈결 같은 과거의 맛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몸서리쳤다. 신쿠는 안은 몸으로부터 느껴지는 모든 감각을 무시했다. 그는 기어코 그 음산하고 거대한 홀로 히마리를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힌다. 홀은 넓고 어두웠다. 축축한 공기가 느껴졌다. 꽃으로부터 온 것이다. 벽면이 흰 꽃들로 빼곡했다. 올려둘 수 있는 모든 곳에는 초가 있었다. 길고 짧은 불빛이 줄지어 아주 한정적으로 앞을 밝혔다. 죽은 이들은 없었으나 히마리는 국화와 백합 한 송이 한 송이가 전부 그들의 얼굴 같다고 여겼다. 꽃송이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이 난다고 느껴질 정도로 찬란한, 화려한 의자에 앉혀진 히마리가 고개를 들어 신쿠를 바라보았다. “기어코…….” 히마리의 음성은 무척이나 희미했다. 신쿠는 뒷말을 더 듣지 않아도 모든 걸 예상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까닥거렸다. 그는 기계적이고 냉정한 동작으로 관과 홀을 가져왔다. 악연이다 못 해 운명의 속박처럼 느껴지는 두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던 히마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관이 씌워지고, 손에는 억지로 홀이 들린다. 너무도 무거웠다. 목이 곧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내색하고 있었으나 그런 건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았다. 히마리는 눈을 감았다. 신쿠가 분주히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곳은 신쿠와 히마리, 두 사람이 있었지만… 히마리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신쿠가 그녀를 인격체로 대하고 있지 않단 사실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히마리는 떨리는 손으로 홀의 손잡이를 꽉 잡아 쥐었다. 식은땀이 자꾸만 그녀의 손을 매끄럽고 단단한 홀의 기둥에서 미끄러지도록 만들었다. 신쿠가 히마리의 몸에 하오리를 두르고 밧줄을 묶기 시작했다. 히마리는 그 언젠가 그의 종아리 위로 그어지던 줄, 붉은 그 줄을 떠올렸다. “아아…….” 히마리가 고통에 신음했다. 작열감이 그녀의 상체를 칭칭 동여 감고 낼름거렸다. “이렇게 아팠니…….” 한탄이라기보다는 고해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잠시 멈칫했던 신쿠의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임을 재개했다. 줄로 감긴 히마리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신쿠는 만족한 듯, 히마리의 턱을 잡아 들게 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뜬 히마리가 숨을 집어 삼켰다. 시선이 마주친다. “아름답네요.” 신쿠가 눈을 살짝 접어 웃었다. “이제 시작할까요?” 신쿠는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고 모든 주문을 외웠다. 히마리는 입을 벌리고 그걸 들었다. 불타오르는 듯한 핏빛 꽃이 만개하는 순간을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꿈에도, 꿈에,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어딘가의 그는 늘 버림받은 채였을 테니까. 히마리가 놓은 것이다. 모두 히마리의 탓이었다. 신쿠였더라면, 신쿠였더라면 갈라진 히마리까지 아울러 보듬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전부 히마리의 탓이었다. 왜 늘 고통 받는 신쿠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모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왜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을까? 전부 끝났다고 생각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긴, 맞지. 맞잖아. 너는 그렇게 하고 싶었잖아. 덮어두고 모르는 척 살고 싶었잖아. 사실은 어딘가 불안했잖아. 가주가 된다고? 그러면 정말로 다 끝이 날 줄 알았니? 끝날 줄 알았어? …… 끝없는 악의가 소곤거린다. 히마리를 미치게 만들 작정인 듯싶었다. 히마리는 날카롭게 떨어지는 속삭임들에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밧줄이 자꾸만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더 깊이, 더 강하게. “배반하지 않을 충실한 종이 될 것을 서약합니다.” 신쿠가 몸을 낮추고 바닥에 무릎을 대어 앉았다. 그의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에 비친 작은 촛불이 무자비하게 일렁거렸다. 히마리는 그것에서 햇빛의 흔적을 보았다. 보고야 말았다. “가주시여.” 가증스러운 서약을 끝마친 신쿠가 히마리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투박한 힘에도 히마리는 신음 하나 뱉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었다. 밧줄과 마찬가지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걸 억눌러주는 힘이었으니까. 신쿠는 기꺼이 상체를 숙였다. 그의 차갑고 매끄러운 입술이 시퍼런 핏줄 돋아난 마른 발등 위로 내려앉았다. 히마리는 몸을 떨며 숨을 참았다. 기적 같은 일, 천재지변, 갑작스러운 한쪽의 죽음……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작은 촛불들이 촘촘했고 붉은 꽃과 흰 꽃이 어지러이 뒤섞여 만개한 꼴은 이 천수각이 아니라 지옥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고요했다. 신쿠는 으스러뜨릴 듯 쥐었던 히마리의 발목을 놓아주었다. 히마리는 그가 제 발목을 부러뜨리지 않은 것이 못내 서글펐다. 만약 그랬더라면 하나의 구실이 생겼을 텐데. 홀이 바닥으로 기운다. 히마리가 손에서 모든 의지를 놓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진 홀이 초 십수 개를 밀쳐 넘어뜨렸다. 불이 잘 붙지 않는 바닥에서 탁, 타닥, 탁…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신쿠.” 히마리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제 아래 무릎을 꿇고 앉은 신쿠가 아니라 허공을. “가주가 묻는다.” 바람보다 더 공허한 목소리였다. “이제는 만족하겠니.” 너는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잖아. 물기를 전부 뱉은 모래알처럼 희망이 으스러진다. 값을 치를 수 없었다. 전부 가졌는데도, 전부 잃었다. 약속은커녕 저 남자에게 햇빛 몇 점을 구해다 줄 수도, 그것으로 그를 자유롭게 할 수도 없었다. 히마리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심장이 아주 느리게 뛰었다. 신쿠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전부였다. 이후 기척이 없었다. 그는 무엇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지켜보는 것 같았다. “아가씨는 아직 제게 무엇도 주지 않으셨어요.” 신쿠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홀에 켜켜이 쌓였다. “그러니 부족합니다.” 신쿠가 손을 뻗어 히마리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히마리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앓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오리 밑의 몸이 죄 녹아 왕좌의 밑으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제가 이 성흔에 먹혀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세요.” 진정한 서약은 이쪽이었다. 그때, 왜 제 곁에는 있어 주지 않았던 겁니까? 왜 그랬어요? 왜 그랬긴, 넌 비겁하니까. 네겐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주가 되면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모든 허락을 주겠다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놓아주겠다고? 넌 나를 위로했던 게 아니야. 너는 너를 위로했던 거야. 넌 이기적이니까. 히메미야가 본인들의 이기심을 위해 저지른 일을 봐. 너는 그 죗값을 치러야 해. 햇빛이 아닌 어둠으로. 끝없는 어둠으로 값을 내. 너무도 무기력한… 마르고 창백한… 슬프고 자조적인… 그 무엇도 아닌…… 그러나 이 천수각 의 전부인…… 가주가 몸을 움츠렸다. 머리 위에 쓰인 관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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