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인과율
Writer.얌 | Design. 열
올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몇 년째 나라의 거사를 정확하게 맞추었다는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믿어도 좋을 것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예언이 천수각에까지 들어온 날부터 하늘이 검게 죽기 시작했다. 바로 전주까지 올해는 가뭄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비 소식이 없었는데, 예언을 기점으로 무언가 크게 변화한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짐승이 가장 먼저 느낀다는 말이 맞았다. 천수각의 근처를 뛰놀던 작은 사슴 무리와 새 떼가 종적을 감추었다.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큰 토끼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에 무성하게 자란 풀은 한 방향으로 바짝 누워 바람결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천수각은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뽐내었다. 저택 내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오를 넘긴 순간부터 반쯤 녹은 눈송이가 천천히 흩날리기 시작했다. 흙이 차가운 물과 만나 젖는 냄새가 저택에 팽배했다. 이 무렵의 천수각에는 새로운 규칙이 하나 생겼다. 가주가 직접 선포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종들끼리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둠이 내린 천수각에선 돌아다녀선 안 된다.” 나이가 가장 많은 시종장 오쿠야는 근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넓은 천수각을 책임지는 시종은 고작 다섯 명이었는데, 오쿠야는 그 사이의 위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쪽이었다. “어둠에 잡아 먹히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그 말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쪽이었으나, 시종들은 질문을 파생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당연하지. 이 저택의 어둠이 바로 누구인지를 봐.
“만일 예언대로라면, 준비해 두어야겠어요.” 시종 무리 사이에서 가장 어린 니쇼지가 오른손을 살짝 들고 말했다.
시종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모든 대비를 끝내야만 했다. 밤이 내리면 천수각은 인간의 힘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굴로 변모하곤 했다. 산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온 나그네가 어둠에 잡아 먹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우가 닭장의 닭을 잡아먹는 평범한 일조차 어떤 예감이나 문제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게 전부 그, 이름보다는 그 어둠이라 불리는 신쿠가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였다. 시종들은 모일 때면 어여쁘고 강력한 가주가 살아 있는 한, 그 어둠을 이겨낼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라고 숙덕거리곤 했다. “그 천한 남자애가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 수 없네만.” 오쿠야의 입가에는 약간의 빈정거림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사는 방법은 이것뿐이네.”
죽여버리려다 말았어. 우리 아가씨가 힘들어하거든.
“어떻게 생각해요?” 신쿠가 어둠 속에서 한 걸음 걸어 나오며 물었다. 눅눅하게 젖기 시작한 창호지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훑던 히마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신쿠는 빛이 들지 않 는 고동색 눈동자를 끈질기게 응시하며 빙긋이 웃었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히마리가 가냘픈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녀는 마루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고장이 난 뒤로 그녀는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원래 그녀가 좋아하던 건 이곳이 아니었다. 신쿠는 고개를 돌려 복도의 끝을 바라보았다. 저 우스운 곳까지 가면 야트막이 빛이 드는 공간이 있지 않던가. 히마리는 신쿠가 말리지만 않는다면 그곳에 앉아 몇 시간도 거뜬히 보낼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희망이 없으면 죽어버릴 여자.
“시종들이 제 이야기를 하던걸요.” 신쿠가 하의 자락을 살짝 걷고는 무릎을 굽혀 그녀의 옆으로 자리했다. 그의 종아리와 발목에 핏물이 흥건했다. 눈동자를 살짝 굴린 히마리가 어깨를 떨었다. “…… 어떤 이야기를?” 드물게도 그녀의 눈에는 총기가 돌았다. 제정신 쪽인가. 신쿠는 생각하며 희고 섬세한 조각 같은 옆얼굴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잡종.” 신쿠의 손이 히마리의 어깨 위로 둘렸다.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사내.” 고개를 기울이면 우뚝한 콧대와 늘어지는 머리칼이 히마리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히마리는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목이 뻣뻣해지도록 힘을 주고 숨을 참았다.
“가주께서 허락한 이야기인가요?” 신쿠가 속삭였다. 피 냄새가 났다. 희미하게.
검은 속삭임에 히마리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심하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를 감흥 없이 내려다보던 신쿠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고개를 틀어 복도 끝을 바라보면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가 내린다던데요.” 신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눈이라던가.” 그리하여 저 복도의 끝에는 빛이 내리지 않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이 멍청한 아가씨는 가장 밝은색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일 테고. 신쿠는 얇은 종이 너머에서 일렁거리는 누런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태양이 아니었다. 태양일 수 없었다.
울부짖는 듯,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신쿠는 눈을 감았다. 히마리가 바르작거리며 몸을 웅크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 복도로 어찌나 돌아오고 싶었는지 모른다.
증오여!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이곳은 여전히 천수각이다.
신쿠는 제 앞에 상체를 무너뜨린 채 웅크린 뒤통수를 바라보다 고개를 든다. 검은 목조 기둥과 천장이 시야를 스친다. 신쿠는 일순 자신이 아주 먼 곳으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느낌에 빠진다.
나를 이곳에 있게 하소서!
신쿠의 첫 기억은 천수각을 바라보며 걷는 한낮이다.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인데도 천수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주변 공기가 이상하게 흐려졌다. 안개가 낀 것처럼 발치 앞을 내다보기가 힘이 들었다. 어린 그는 겁을 먹고 제 손을 움켜쥔 사내를 힐끗거렸다. “겁먹지 마.”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어린 그가 따르기에는 어려운 속도여서, 그는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지만…… 멈추는 일은 없었다. 종래에는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된 어린 그는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목에 힘을 주었다. 뻣뻣해지도록.
“앞으로 너는 이곳에서 살게 될 거다.” 사내는 냉랭했다. 신쿠는, 지금으로선, 그가 제 혈육이었는지 혹은 판매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천수각에 처음 발을 들인 이전의 삶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럼 천수각에서의 삶은 네 것이었나?
천수각에서 신쿠는 돌연변이이자 장난감으로 통했다. 히마리가 그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그는 완전히 내쳐질 수는 없는 존재였으나…… 어떤 힘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천수각은 사시사철 처음의 모습을 유지했다. 겨울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봄에는 푸릇한 냄새가 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그 속에서 자라나며 그는 양도된 삶의 방식에 적응했다. “괜찮습니다.” 그 말은 그의 모든 것이 되었고, “아가씨를 위해서예요.” 그 말은 그가 두 발을 붙이고 선 땅이 되었다. “그래, 고마워.” 어린 히마리가 그렇게 대답하면 신쿠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지나가는 어른 중 누구도 신쿠가 마음 놓고 웃는 꼴을 기꺼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줄기의 빛이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며 히마리는 손을 내밀었다.
“민가를 구경하러 가자.”
그러면 그들은 고작 서른 몇 걸음이 될까 하는 거리를 내달렸다. 손을 잡은 채였다. 저 멀리 장난감 마을처럼 보이는 민가를 내다보며 담소를 나누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좋았다. 저 밑으로 내려갈 방법은 얼굴 위로 흰 천이 덮이는 것뿐이라고 해도 괜찮았다. 둘이었으니까, 함께였으니까. 그러니까…… 천수각에서의 삶이 온전히 제 것이 아니더라도 살아갈 수 있었다. 신쿠는 제 숨과 명이 전부 히마리의 것임에 한치 불쾌함도 없었다. 그건 그냥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천수각으로 끌려오던 그날로부터……. 텁텁한 안개 속에서 질질 끌려 걷는 것과 히마리의 곁에 살아 숨 쉬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자면, 신쿠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후자를 택할 터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천수각의 빛이 잘 보였다. 원래 빛이 잘 들지 않는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으나, 신쿠는 놀라우리만치 잘 찾아낼 수 있었다. 빛의 조각들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히마리가 있었으니까. 신쿠의 일은 히마리를 찾는 것이었고 히마리의 일은 저택의 빛을 찾는 것이었다. “이건 이 천수각에서 가장 값진 거야.” 히마리는 자주 말했다. “너와 공유할 수 있어서 기뻐.” 어린 얼굴이 순수한 기쁨을 머금을 때야말로 신쿠는 생각했다. 저 하늘 위로 뜬 거대한 광원보다도 값진 것이 이곳에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팔아 너는 무엇을 벌었니?
악의는 어둠으로부터 피어오른다.
어둠이 집어삼킨 사내는 악의의 근원이라고 해도 좋을까?
다음 순간 신쿠가 기억해낸 것은 수많은 손이다. 희거나 검거나 붉거나 얼룩진 손들이 사방에서 뻗어져 신쿠를 잡아 눌렀다. “그만!” 신쿠가 비명을 내지르는데도 힘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혹하고 더 깊어졌다. 아주 깊은 구렁텅이로 혼백을 집어처넣으려는 목적만이 있는 듯했다. 신쿠는 혼비백산하여 고개를 가로젓고 두 팔을 허공에 휘둘렀으나 잡히는 것이 없었다. 손들은 집요하게 신쿠를 옭아맸다.
네가 번 것이 정말 그것이니?
모든 것이 끝난 뒤에는 무시무시한 적요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고 남은 재가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산 것이 없었다. 신쿠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정강이뼈가 두 동강이 난 듯이 아팠다. 그는 비틀거리며 반파된 저택을 헤집었다. 겅중거리는 몸이 볼썽사납게 뒤척거렸다. “아가씨!” 수만 갈래로 갈라지는 목소리가 천수각을 뒤흔들었다. 모든 복도와 모든 방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고요함은 여전해서, 그는 이제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복도의 끝에 도달했을 땐 바닥을 기다시피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룻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가슴과 배를 얼렸다. 신쿠는 바닥에 가슴이 쓸릴 때마다 기묘한 통각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머리에서 관이 흘러내릴 제, 신쿠는 고개를 들었다. 그 야트막한 공간에는 조금의 빛도 내리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엉금엉금 기어 그 사이로 들어간 신쿠가 몸을 웅크렸다. 숨을 쏟으면 흰 입김이 부유하다 완전히 사라졌다. “아가씨, 아가씨…….” 그가 웅얼거리는 소리는 그가 웅크린 공간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리고 고요였다. 다시, 재가 흩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도 그를 찾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구제하지 않았다. 신쿠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아…….” 비통에 찬 신음이 벌어진 입에서 마구 흘러내렸다. “아아아……!” 다부지게 쥔 주먹이 바닥을 몇 번 이고 내리쳤다. 화마에 나약해진 이음새가 삐걱이며 틈을 벌렸다. 신쿠는 그 틈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둠과 눈을 마주쳤다.
천수각의 망령은 그날로부터 빛을 잃었다. 어둠이 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너절한 옷을 걸친, 썩어가는 몸으로 복도를 거닐고 있노라면 산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봐, 신쿠. 새가 지저귀는구나.” 히마리는 새가 울기 시작하면 늘 그렇게 말했다. 이 근방에서 종달새와 같은 아름다운 새는 볼 수도 없었는데, 소쩍새나 나이팅게일의 불길한 울음이 마치 길운을 가져다 줄 음악이라도 된다는 듯이 굴었다. “어찌나 아름다운 소리인지 몰라.” 그렇지만 히마리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으면, 신쿠 또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예, 아름답네요.” 희미하지만 언젠가는 드리울 빛이 숨었을 곳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운다, 가 아니라 지저귄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꼴을 보라…… …….
신쿠는 죽어가고 있었다. 새의 울음은 마치 그를 위한 장송곡 같았다. 그의 벌어진 입에서 타액 섞인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슴으로부터 번진 어둠은 이제 그의 목을 뒤덮고 옥죄는 모양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가씨…….”
그리운 이를 부르면 꼭 벌을 받는 듯한 격통이 그를 내리쳤다.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아악……!
그는 비통한 제 울음 사이에서 시꺼멓게 다시 태어났다. 세 번째 삶이었다.
첫 생을 안개에서부터,
둘째 생을 빛의 조각으로부터 얻은 사내가 이제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네.
가엾어라, 가엾어라!
이 세계에서 이름 없는 존재란 딱 셋이었다.
팔려 온 이의 이름이란 있으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도구로써 실재하는 삶이란 이름이 필요치 아니하였고, 어둠 속을 기는 존재란 너무 불경하여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세간에서 팔려 온 이는 팔려 온 이로, 도구는 도구로, 어둠은 어둠으로만 불릴 수 있었다.
천수각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었다. 불씨가 사그라들자 그들은 돌아왔다. 신쿠가 너무도 원하는 그 여자, 히메미야 히마리만을 제외하고. 시종들은 신쿠를 가주로서 대우했다. “높으신 분, 덕이 있으신 분, 우리를 다스리실 분.” 눈이 번들거리는 오쿠야가 말했다. 신쿠는 그를 그냥 두었다. 그가 제게 몇 번이고 매질했음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보복하지 않았다. 신쿠의 증오와 분노는 오쿠야를 향하지 않았다. 오쿠야와 오쿠야 같은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신쿠의 증오는 오로지 히마리를 향했다. 오지 않을 그 작은 몸을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찢었다가 이어 붙였는지 몰랐다. 어둠에 물들도록 흔들었는지 모른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빛 조각이 머릿속 한쪽에서 팡 터졌다. “오지 않겠다면, 좋아.” 신쿠가 씨근덕거렸다. 그건 웃음도 울음도 한숨도 헐떡임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게 뒤섞인 무언가였다. “내가 당신을 보러 갈게요.” 신쿠는 제게 허락된 모든 걸 이용해야만 했다.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꼭 해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아가씨……!” 찢어지는 음성으로 부르고 또 부른다. 낱장이 된 종잇장을 뒤지고 오쿠야를 심문한다. 사특한 존재의 손을 빌리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다.
툭,
문득 뒤를 돌아보면 가슴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살점이 바닥에 붙어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하고 몸이 가벼웠다. 자꾸만 웃음이 나는 게 무언가 맞아떨어졌단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여태 산을 뒤지고 잿더미를 뒤져 알아낸 모든 정보가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아아…….” 그는 천수각의 잔해 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위로 치들었다. 벌벌 떨리는 손끝이 하늘을 곧이곧대로 가리켰다. “내가 갈게!” 그가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갈게요, 아 가씨!”
가장 값진 걸 줄게.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걸 줄게.
너는 나에게 되갚아야 해.
시간을 지나오는 일은 지난하고 역겨웠다. 그곳에서 신쿠는 지금처럼 제 생의 모든 것을 보고 되짚었다. 고작 이 년을 되돌린 것이었으나 몸은 미래의 천수각을 닮아 있었다. 오만 곳이 불타고 무너져가는 더러운 목조 저택. 마침내 두 발이 땅에 닿았을 때, 신쿠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반듯한, 안개로 뒤덮인 천수각이 있었다. 신쿠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어머, 왜 웃어, 신쿠?” 히마리가 불쑥 물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웅크렸던 몸을 바짝 펴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기분이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리, 이리 와 봐. 신쿠. 여기 건너에 불빛이 있어.” 마치 꿈꾸는 듯한 목소리에 신쿠가 입가를 움찔거렸다. 제정신이 잠깐 돌아온 것 같더니, 그녀는 또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깊이 빠져 있는 중이었다. 신쿠가 애써 바로 섰던 몸을 다시 숙였다. 퍼지는 혈향에 히마리가 콧잔등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사람이었다. 아직은 깨어날 수 없다는 듯, 고집스레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렇네요, 아가씨.” 신쿠가 무감하게 말했다. 한쪽 무릎은 바닥에 댄 채였다.
이곳을 제외하고는 전부 나무 문이었으니, 히마리가 이곳에 집착하는 걸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빛이 재화라는 믿음은 그녀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이 순간에도 유효한 것이었다. 신쿠가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얇은 종이 너머 춤추는 빛의 움직임을 응시하던 히마리가 마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예의 그 새침 떠는 표정을 짓더니 턱을 살짝 올린다.
“너, 변했어.” 히마리가 말했다. “예전엔 작은 빛에도 좋아하곤 했잖아.”
그 말이…… 신쿠를…… 참을 수 없이 만들었다.
너야!
네가 변하게 한 거야!
내가 변한 이유는 다름 아닌 너야!
나는 늘 변하지 않는 평생을 준다고 했잖아,
*네가 내 상록의 마음을 짓밟았잖아!
“멍청하긴!” 신쿠가 손을 뻗어 히마리의 어깨를 잡아챘다. 억센 힘이었다. 밤새가 울부짖었다. 바람이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두 눈을 크게 뜬 히마리가 허둥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과 추위로 뒤덮인 복도가 그녀에게 현실을 선물하자, 그녀는 곧 희게 질려 굳어갔다. “아아아…….” 숨을 삼키며 신쿠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신쿠는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주 단단히 화가 났고…… 모든 것을 분출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를…….
신쿠의 힘은 히마리를 질질 끌어냈다. 마치 저가 그 어린 날 팔려 오던 날을 재현하려는 듯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초겨울의 한밤이라는 것이었다. 히마리는 몸을 바둥거리면서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런 훈련을 받은 여자였다. 차가운 바람이 칼날처럼 피부를 죽죽 긋는 데에도 눈의 힘만은 풀지를 않았다. 그게 신쿠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희고 작은 발이 젖고 언 땅 위에서 미끄러지는 걸 보고서도 계속 걸었다. 우악스러운 힘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 히마리가 몸에서 모든 힘을 빼내었다.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덜걱거리며 미끄러졌다. 신쿠의 힘에 모든 걸 맡기겠단 것처럼 굴었다……. 신쿠는 멈추지 않았다.
하늘이 어둡다기보다는 회색이었다. 그래서인지 신쿠의 뺨에 번진 검은 얼룩이 더욱 선명하고 또렷해 보였다. 구름이 무섭고 더럽게 꿀렁거리고 있었다. 몸과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진눈깨비가 몹시 차가웠다. 히마리는 반사적으로 이를 딱딱 부딪치며 신쿠의 힘에 모든 걸 내맡겼다. 차라리 이대로 천수각 바깥에 나를 내던져 준다면. 히마리는 언뜻 그러한 희망을 품었지만, 신쿠가 그녀를 데리고 천수각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높은 담벼락으로 둘린 곳까지 그녀를 끌 고 갔다. 그 또한 인두겁을 두르고 있기에 히마리를 붙든 손이 붉게 번져 있었다. “흐흐…… 흑…….” 신쿠의 입술 사이로 기묘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히마리는 그것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았다.
“변했다고 말하는 건 쉽죠.” 신쿠가 히마리를 붙든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 힘에 떠밀린 그녀가 비틀거리며 담벼락 앞으로 섰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건…… 파랗고…… 딱딱하고…… 거꾸로 매달린…… 오쿠야였다.
“흐읍……!” 히마리가 숨을 크게 삼키며 경련했다. 체념조차 이겨버린, 극심한 농도의 정신적 자극이 그녀를 후려쳤다. 문득 죽은 이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히마리가 벌벌 떠는 것을 눈치챈 신쿠가 대롱거리는 오쿠야의 몸 옆으로 히마리를 밀어붙였다. “아가씨.” 신쿠가 속삭이자 희부연 입김이 쏟아졌다. 히마리는 그걸 온전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저예요. 많이 변했습니까?” 언뜻 다정함을 가장하는 목소리가 검었다. 히마리의 크게 뜨인 눈이 가장자리부터 검게 죽어갔다. 신쿠는 히마리의 퍼들퍼들 떨리는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집요하게 시선을 옭아 맸다. 히마리가 자지러질 듯이 숨을 흑흑 들이키다 눈을 감았다.
다 녹은 눈송이가 그녀의 눈두덩 위로 툭툭 떨어진다. 물방울이 주르르 아래로 길을 텄다.
신쿠는 저열한 만족감을 느꼈다.
“미안해…….” 히마리가 헐떡거렸다. “필요 없어.” 신쿠가 모든 빛의 사지를 끊어놓았다.
“빛은 필요치 않습니다. 보세요…… 아가씨. 이곳은 어둠의 저택, 당신과 나의 천수각.” 뱀의 혓바닥 같은 목소리가 담벼락 위를 기어오르다 히마리의 정수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차가운 물방울이 히마리를 적셨다. 히마리는 붉게 팽창한 발끝을 움츠리며 숨을 죽였다. 어둠이었다. 빛이 보이지 않았다. 눈꺼풀 안쪽의 깊고 두려운 어둠이 그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신쿠의 손길이었고, 신쿠에게 건네어야 할 재화였다. 히마리가 덜덜 떨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좀 거래가 되는 것 같네요.”
“신쿠…….”
“네, 아가씨.”
“…… …….”
“네 어둠이 느껴져…….” 히마리가 손을 뻗었다.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눈을 감은 채였다. 붉게 튼 손끝이 허공을 더듬다 신쿠의 뺨 위로 얹어졌다. 얼룩진 성흔에서 살점이 떨어지는 감촉이 기묘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어둠 속에 있구나…….” 히마리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신쿠는 담벼락과 제 몸 사이에 그녀를 가둔 채 입을 다물었다.
빛이 성스럽다면 어둠도 성스러워.
어둠이 더럽다면 빛 또한 더러워야 해.
빛이 있어 어둠이 있다면, 어둠이 있어 빛이 있는 거야.
어둠이 빛을 파괴한다지만, 진실은 다르지.
빛만이 어둠을 파괴해.
어둠은 그저…….
“바라던 바입니다.” 신쿠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턱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오쿠야의 얼어붙은 몸이 흔들리며 담벼락에 부딪히는 소리가 딱, 딱, 딱… 울렸다. 바람이 불고 밤새가 흐느낀다. 비가 된 차가운 눈송이들이 땅을 적시고 얼리기를 반복했다. 초겨울부터 이런 추위라니. 예언자의 말이 맞았다. 올해 겨울엔 아주 많은 눈이 내릴 듯했다. 신쿠는 그 빛을 닮은 흰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짧게 궁리하다, 히마리의 몸을 안아 들었다. 몸은 어떠한 저항도 없이 신쿠에 손에 따라 움직였다. 신쿠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 녀는 고작 은화 몇 닢가량의 빚만을 상환했을 뿐이었다. 더 많은 어둠이 필요했다. 얼어붙기 시작한 마른 몸을 안은 신쿠가 천수각을 향해 걸었다. 그녀를 살려야겠다. 살아서 빛을 갈망하도록 만들어야지. 빛이 있어 어둠이 있다면, 어둠이 있어 빛이 있는 거야. 더 많은 어둠이, 아니, 더 많은 빛이 필요했다. 더 많은 어둠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