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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망량의 인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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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인과율
Writer. 얌 | Design. 열
¦ 罔兩, 그림자 겉 부분에 엷게 지는 어둠, 그림자의 그림자 그림자는 몸을 떠날 수 없다. 히마리는 자신이 악령의 그늘임을 알았다. 다이키의 죽음 이후의 시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과 시간이 겹치며 만들어내는 공동 속을 거닐었을 뿐이다. 짧은 착란 끝에 히마리가 이끌려 선 곳은 몸의 반이 허물어지고 있는 남자의 밑이었다. 힘차게 저를 매질하는 세상의 힘에도 투박한 반짝임을 잃지 않았던 사내애는 이제 없었다. 흠이 너무 많아 오래 보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사내, 온몸으로 세상의 그림자를 뿜어내는 사내만이 히마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증오와 분개를 드러내기 위해 입매를 일그러뜨리고 눈을 좁게 떴다. 그런 얼굴을 보려고 나 여기까지 왔던가. 그다지 방황했던가. 방랑의 끝은 험지였다. 급하게 챙겨 온 패물들이 하나둘 손을 떠나는 와중에도 히마리는 절개를 지켜야만 했고, 그건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개를 꼿꼿하게 든다 한들 그녀를 백합으로 기억하는 이는 그곳에 없었다. 사시사철 모래가 몰려다니는 황야를 등진 저택은 밤이고 낮이고 을씨년스러운 바람의 소곤거림이 가득했다. 히마리는 색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다이키의 건강이 급격히 고꾸라지기 시작할 땐 두려웠지만, 그럴수록 눈에 힘을 주었다. 어쩌면 해방이리라. 미약한 희망이 그녀의 앞이마에 반짝이며 쏟아졌고 마침내 다이키가 마지막 숨을 내뱉은 순간, 그녀는 스스로 일어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제 달아나 숨어 살았냐는 듯이 몸이 홀가분했다. 히마리는 눈밭의 새처럼 종종걸음으로 모든 사건을 벗고 나아갔다. 직접 확인해야 했다. 어떤 식으로든 종결의 점을 찍어야 했다. 이 홀가분한 몸이 다음에는 어디에 닿을는지 알 수는 없어도. 히마리는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천수각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아니, 돌아간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곳에 가서 불탄 터를 확인하리라. 혹은 새로운 건물이 지어졌을 수도 있겠지. 벌써 6년이었다. 히마리는 어엿하고 조숙한 여인으로 피어났고, 신쿠도, 그날의 화재가 없었더라면 꽤 이목을 끄는 청년이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후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렸다. 눈물이 우묵하게 고인 심장 아래가 파르르 떨려왔다. 나의 신쿠. 히마리는 아직 그를 놓아주지 못했다. 다이키가 그녀에게 일러준 신쿠의 마지막은 사실이었으나 진실은 아니었다. 진실은 오로지 히마리의 두 눈을 통해서만 성립되었다. 인력거꾼에게 삯으로 금화 두 닢을 건네니 천수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손에 쥔 큰돈에 어떻게든 해내겠다고 몇 번을 다짐했다. 그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소문을 끌어온 덕분에 히마리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인력거꾼이 이제 되었다고 말한 이튿날 그들은 출발했다. 도망칠 적에는 그토록 짧게 느껴졌던 길이 거슬러 올라가자니 한참이었다. 히마리는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나른히 늘어뜨리고 시간을 죽였다. 불타버린 성과 찾을 수 없는 사내. 영영 사라진 사내. 그런 생각이 교차로 히마리를 괴롭혔다. 무릎이 서서히 뻐근해질 때쯤 인력거가 앞으로 기울더니 멈췄다. 내려도 좋다는 말에 히마리가 한 발을 밖으로 내디뎠다. 날은 흐렸고 곧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심상찮았다. 어두운 것도 어두운 것이지만,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습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출발할 땐 그다지도 건조했던 바람이 추라도 단 것처럼 멀뚱히 서서 사람이 저를 통과하도록 그냥 두었다. “이건…….” 히마리는 제가 떠나올 때와는 사뭇 달라진 정황에 눈을 조프렸다. “처음부터 묻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말았는데…… 저어, 어쩌다 아가씨 같은 분이 이런 곳을 찾으셔요?” 인력거꾼은 반투명하고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히마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허리를 숙인 채 물었다. 정수리가 훤히 비어 가엾게 보이는 남자였다. 히마리는 손등으로 입과 코를 은근히 가리며 인력거에서 내렸다. “어쩌다…… 라니?” 천수각을 돌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예감, 보드라운 꽃잎보다는 벼려진 줄기로 살아왔던 시간의 촉각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신쿠가 저기에 있다면 저럴 리가 없을 텐데. 히마리가 초조하게 천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왜 말을 하곤 입을 다무는 것이지?” 인력거꾼이 쩔쩔매자 히마리가 그를 다그쳤다. 천수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늙은 사내를 짓누르는 듯했다. 인력거꾼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게 말입죠…….” 말도 안 돼. 히마리는 천수각에 얽힌 소문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곳이 아름답고 행복한 공간이 아님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그치만 사람이 죽어 나간다든지 불경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든지 하는 소문은 연약하게 뜀뛰던 히마리의 심장을 찌르기에 충분했다. 웬 악신을 모시고 있단 소문도 있노라고, 어렵게 말을 마친 인력거꾼이 달아나듯 멀어졌다. 불타버린 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충격과 배신감이 안면을 덮쳤다. 히메미야 다이키! 아비가 내게 무슨 짓을 했나? 천수각은 군데군데 그을리고 무너진 흔적이 있었지만 건재했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검은 건물은 옛날의 그 웅장함을 여전히 일부 지니고 있었다. 히마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스스로를 부추겼다. 히마리는 두려움 견딜 줄 알았다. 질긴 풀꽃 같은 항상성이 그녀 안에 있었다. 천수각은 확실히 그녀가 떠나오기 전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었지만, 그리하여 인력거꾼의 말이 알맹이 없는 떠벌림이라기보단 근거 있는 소문처럼 느껴졌지만, 히마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은 그녀의 성이었다. 잠시 떠나가 살았다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천수각의 대문이 바람에 활짝 열렸고, 히마리는 반기는 이 없는 문턱을 조심스럽게 넘을 수 있었다. 귀환의 첫 감정은 황량함이었다. 천수각에는 무서우리만치 생활감이 없었다. 히마리는 그것이 죽음의 부름임을 알았다. 제 아비가 죽을 때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손끝의 궤적, 곧 놀라울 만큼 짙게 풍기던 시취, 바람인 듯 흐느낌인 듯 하는 오묘한 소음…… ……. 저와 신쿠가 어렸을 적 서서 먼 마을을 내려다보던 작은 언덕은 풀이 시들다 못해 검게 죽어 있었다. 망루는 무너졌고 담벼락에는 흉측한 균열이 곳곳에 버짐처럼 피어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그만한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 이건……. 히마리는 천수각에 들어섰을 때부터 풍겼던 불쾌한 냄새에 콧잔등을 찌푸렸다. 약도, 고름도, 꽃도, 오물도 아닌 이 냄새는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답은 곧 알아서 미끄러지듯 나와 히마리 앞에 섰다. 히마리는 제 앞으로 우뚝 선 사내를 알았다. 그 키와 몸짓, 눈 닿는 곳마다 따뜻하게 달아오르는 듯한 머리칼……. 히마리는 기쁘게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애매하게 방해하던 천을 걷고 기쁨에 뺨을 붉혔다. 아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새장 안 그녀의 단 하나뿐인 동지. 떠밀어 두고 달아날 수밖에 없어 어찌나 속상했던가. 그래, 꼭 다시 찾으리라고 다짐했었지. 히메미야 다이키는 제 딸에게 많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에 의의를 두어라.” 그렇게 이르곤 입을 다물고, 점점 검어지더니, 몇 주 뒤에는 죽어버렸다…. 그래, 삶은 분명 축복이었다. 살아 있으니 이렇게 돌아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히마리는 금방이라도 노래할 새처럼 가슴을 숨으로 부풀리고, 광대를 살짝 올려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그러나 그녀의 시야에 검게 맺힌 인영은……. “길을 잃으셨나 봅니다.” 불쑥 손이 내밀어져 히마리의 어깨를 붙들어 잡았다. 과거였더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히마리의 낯에 불쾌감과 부정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녀는 신쿠, 그러나 그녀의 기억 속에는 없는 사내를 뿌리치려 손을 휘저었다. “뭘 하는 거야!” 새된 비명이 내질러졌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어깨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히마리는 충격에 겨워 고개를 저었다. “이것 놔, 무슨 짓이야, 신쿠!” 히마리는 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폭이 좁고 긴 옷을 입어 그런 행동만은 삼가야 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수치스러웠다. 히마리는 한 번도 그런 방식으로 움직여본 적이 없었다. 그건 천것이나 하는 짓이었다! 히마리의 뺨이 열과 수치로 붉어지자 신쿠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달아날 수 없었다. 히마리는 발등에 말뚝이라도 박힌 듯 서서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신쿠는 그렇게 되리란 걸 전부 아는 듯싶었다. 어둠에 파먹힌 낯짝이 흉흉했다. 히마리는 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등과 허벅지가 따끔거릴 정도로 긴장이 일었다. 덫에 걸린 쥐를 보는 눈에는 어떤 감흥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질식할는지도 모른다. 히마리는 점점 폐로 가는 산소가 적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공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어떤 작용을 보이고 있었다. 목구멍이 부푸는 듯했고, 얼굴이 홧홧해졌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식었다. 오한으로 떨리는 몸을 반파된 꼴의 청년은 전처럼 달래 안아주지 않았다. 히마리는 이 격변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지만……. 인력거꾼의 요동치는 목소리와 조아리던 고개, 끔찍해서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던 그 말들이 아른아른 춤을 추며 신쿠와 히마리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 소문이 전부 저 남자로부터 나왔던가. “들어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신쿠가 검지와 중지를 제 입가에 수직으로 댔다. “또 달아나실 겁니까?” 신쿠는 능수능란했다. 그리고 망가져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히마리는 신쿠를 따라 천수각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는 없었다. 모든 예정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천수각의 잔해를 확인한 뒤라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히마리는 천수각에 눌러앉게 되어 새로이 그곳을 익혔다. 신쿠는 이따금 냉정하고 잔혹하게 굴었지만, 금방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한 주기가 있는 듯했다. 무언가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 테지. 히마리는 짐작했다. 그가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 묻지 않는 건 비열한 짓이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거대한 진실이 담긴 함을 열어버리면, 그러면……. 히마리는 단지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된 요량인지 그가 이 천수각의 가주 노릇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6년이었다. 히마리는 떨떠름하게 받아들였다. 마음이 다쳤으리라. 아무리 부모가 반대했다고 한들, 히마리는 이제 과년한 여인이었다. 성숙함을 앞세워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번도 찾아오질 않은 주인에게 마음이 상했으리라. 손쉬운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린 히마리는 천수각에 도착한 지 사흘째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전에 히마리가 자주 나다니던 통로는 공기가 아주 차가웠다. 빛이 들던 야트막한 공간은 천장이 막혀 있었고, 시종들은 하나 같이 히마리를 보고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애초에 히마리가 기억하는 얼굴들이 많지 않았다. “니쇼지예요.” 앳된 시종 하나가 꾸벅 절을 하고 달아난 일 외에 신쿠가 아닌 집안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히마리는 신쿠와 접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신쿠가 나다니는 길목부터 신쿠의 방 앞까지 찾아가 말을 건넨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쿠는 조소하며 히마리를 성가신 날벌레 취급하기 일쑤였다. 어째서? 히마리는 힘 없는 촛불처럼 일렁이는 의문에 때때로 서러워졌다. “아가씨께선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못한 어느 낮, 다시금 방 앞까지 달려온 히마리를 돌아본 신쿠가 거칠게 속삭였다. “내가 긍휼을 베풀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 아, 악령이었다. 히마리는 이글거리며 끓는 불의 눈동자를 보았다. 빛이 없고 뜨거움만이 있었다. 부릅뜬 신쿠의 눈이 히마리를 지져댔다. 히마리는 휘청거릴지언정 무너지지 않았고, 벽을 짚고 서서라도 신쿠와 마주 보았다. 숨을 쌔근쌔근 몰아쉬는 히마리의 낯 곳곳을 뜯어 보던 신쿠가 그녀의 턱을 쥐고 아래로 당겼다. 단숨에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 히마리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모멸감이 그녀의 가슴을 할퀴었다. 발바닥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헉, 하고 히마리가 숨을 토했다. 긍휼이라고? 나의 종이 지금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그러나 신쿠는 멈추지 않았다. 히마리가 충격에 허우적거리건 말건 그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것처럼. “선택지를 주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 마지막 관용입니다…… 아가씨.” 신쿠가 손을 거두었다. 히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희고 둥근 이마와, 예전처럼 볼록하진 않아도 옴폭 패인 채로 보드라운 뺨이 경련했다. 그 위로는 식은땀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긍지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그 안면에 신쿠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명맥이 끊긴 이 천수각의 주인 자리를 되찾아 보시렵니까.” 신쿠의 검지가 펴졌다. “아니면, 겁쟁이처럼 다시 달아나시렵니까. 영영 천수각의 그림자가 아가씨를 쫓을 테지만요.” 차례로 중지가 일어섰다. “그도 아니라면…….” 신쿠의 눈이 달처럼 휘어졌다. “내 종이 되어 모멸과 수치를 견디겠느냐.” 써늘한 목소리가 히마리의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갈겼다. 히마리의 선택은 제삼이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신쿠가 각진 어깨에 무엇을 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니, 후계를 잇는 건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히마리는 아직도 이렇게나 영민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알았고,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아주 빠르게 판단했다. 신쿠의 입장에서는 찰나였겠으나 히마리는 모든 계산을 마친 채로 신쿠의 약지를 손수 펼쳤다. “종이 주인의 명을 받드나이다.” 그런 밤이 있었건만 둘 사이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신쿠는 이따금 히마리에게 멸칭을 붙여 가며 그녀를 험하게 다루었지만, 대개 말뿐이었다. 그런 격변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언젠가 옛날처럼 조곤조곤히 존대와 존칭을 입에 올렸다. 히마리는 특별히 종이라는 데에 신경을 쏟지 않았다. 어차피 이 그림자에 절어버린 폭군이 성화를 부리는 탓에 시종들과 히마리는 같은 공간을 쓸 수조차 없었다. 히마리가 계급의 차를 느끼는 순간은 극히 일부였다. 그러니 그녀는 시들지 않을 수 있었다. 천수각의 검게 죽은 풀, 나무, 목조 기둥 따위와는 달랐다. 몸의 반이 일그러진 채 어둠을 뚝뚝 흘리며 걸어 다니는 그녀의 주인과도 달랐다. 히마리는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았다.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러한 그녀의 본질, 어떤 악신도 악령도 악한도 훼손할 수 없는 빛의 기둥이 신쿠를 미쳐버리도록 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히마리는 자신의 긍정적인 방향성이 신쿠를 계도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게 나아질 것이었다. 그녀도 처음엔 신쿠를 잃었다고 생각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았었다. 그러나 살아남았지. 그 모래가 텁텁한 황야를 보면서도 정신을 놓아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신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신쿠는 그 사실을 비웃었다. 어떻게든 히마리를 짓밟으려 애썼다. “그러지 말렴.” 벽을 주먹으로 때리기에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히마리의 얼굴은 강인했다. 침착하게 신쿠를 바라보았고, 신쿠의 일그러짐을 감당했다.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며 당연한 일이기까지 하다는 의사를 눈으로 말했다. 신쿠가 그녀를 떨치고 바닥에서 허우적거렸다. “아아…… 아아악…!”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괴성을 내질렀다. 히마리는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아 쥐고 숨을 헐떡거렸다. 두려웠지만, 견딜 수 있었다. 그는 신쿠였다. 그녀의…… ……. “아가씨 때문에 계획이 아주 제대로 어그러졌습니다.” 신쿠는 자주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 계획이란 무엇인지, 신쿠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살아가려 했는지만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말을 해주어야 알지 않겠니.” 히마리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말했다. 문틀에 기대어 선 신쿠가 조롱 섞인 눈길을 보내왔다. 습기에 익숙하지 못한 히마리의 연약한 살갗은 벌써 부르트고 물러 엉망이었다. 뜨거운 물이 한가득 담긴 대야를 드는 것도 고역이었다. 히마리가 낑낑거리면서 모든 일을 해내는 동안 신쿠는 잠자코 보기만 했다. “네가 뭘 하려고 했는지, 뭘 기다리고 계획했는지 난 아무것도 모른단다.” 욕조 안에 물이 반쯤 차자 히마리가 고개를 돌려 신쿠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기른 적은 없다만 말이지.” 신쿠는 금방이라도 히마리의 뺨을 내갈길 것처럼 눈에 불을 당겼다. 히마리는 움츠리지 않았다. 그가 성큼성큼 젖은 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다가오는데도 오히려 입가에 팽팽히 힘을 주었다. 손을 번쩍 들었던 신쿠가 일순 모든 맥을 잃고 휘청거리더니 눈을 깊게 감았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채 서 있는 그의 눈 감은 얼굴은 소사체처럼 보였다. 히마리는 그의 사각지대에서 재빠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온몸이 꿉꿉했다. 바로 다음 순간, 신쿠가 몸에 걸치고 있던 홑옷을 훌훌 벗어냈다. 바닥으로 옷가지가 떨어지자 그의 흉한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심장부터 얽어져 올라오는 검정이 그를 좀먹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요동칠 때마다, 피가 뿜어져 전신을 나돌 때마다 검정이 울렁거리며 생명력을 과시하는 듯했다. 길쭉하고 탄탄한 다리와 고통이 그에게 준 단 하나의 유산인 마른 근육들이 히마리 앞에 있었다. 그녀는 난생처음 보는 사내의 나신에 졸도할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히마리가 꿋꿋하게 눈에 힘을 주고 서 있자, 신쿠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숫처녀가 어찌 사내 알몸을 보고도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곧 첨벙거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신쿠가 욕조 안에 앉았다. 뜨거운 물이 그를 핥고 출렁거렸다. 히마리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들어 개며 고개를 떨구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아, 처음이 아니기라도 합니까.” 신쿠가 조소했다. 히마리가 고개를 치들고 그를 흘겼다. “종이 어찌 주인의 몸을 보고 다른 마음을 품겠니.” 그녀는 단정하게 말을 끊어내려 했지만, 살짝 흔들리는 호흡이 따라붙었다. “너 말야…… 가만 보니 기억력이 참 좋은 모양이야. 혹 네가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걸 내게 뒤집어씌우려는가 봐.” 신쿠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긴 숨을 내뱉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는 곧 꺼질 늪처럼 불안정하게 보였다. 히마리는 얼른 옷을 개어 한쪽에 놓아두고는 부드러운 천을 손에 감았다. “어째서일까…….” 히마리가 다가가자 등을 내어 보인 신쿠가 중얼거렸다. 손이 닿기 무섭게 그가 눈을 감았는데, 뒤에서 언뜻 보이는 옆얼굴은 고통을 인내하는 순교자를 닮아 있었다. 그렇게 당찬 방향으로 신쿠와 맞서는 데에 반해 실질적인 소득이 나지는 않는, 지난하고 버거운 대치가 이어졌다. 신쿠는 어떤 방향으로든 히마리를 굴복시키고 싶어 했다. 히마리는 지나온 시간으로 어림잡아 그의 알맹이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음을 짐작했다. 그걸 해소해 주어야 할 텐데. 언젠가 그가 제정신을 찾고 눈을 뜨면, 비로소 제 잘못을 인정하고 그녀 발 아래에 뉘우쳐 울면, 그럼 다 괜찮아질 텐데. 히마리의 방은 신쿠의 방 옆에 딸린 작은 창고와 같았는데, 그녀는 이불 아래에 금과 옥으로 세공한 비녀 두 개를 넣어 두었다. 천수각을 찾을 때 가져온 것이었다. 신쿠가 정신만 차린다면 그것을 들고 나가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너와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히마리는 어두운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반듯하게 누운 등 아래로 올록볼록한 비녀의 윤곽이 느껴졌다. “그게 뭐든 정말 즐거울 거야…….” 종일 자잘한 노동에 시달린, 그러한 노동이 익숙하지 않은 몸이 비명을 질러댔으나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고고했다. 꽃이 시들어 그 아름다움을 잃을 때에도 청록의 줄기만은 꼿꼿하던 늦여름을 기억한다. 히마리는 얇은 문 너머 헐떡이는 신쿠의 신음을 들으며 잠을 청했다. 이맘때의 히마리는 둘 중 하나였다. 까무룩 잠에 빠져 죽은 것처럼 밤을 보내고 눈을 뜨거나, 선잠을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편두통에 시달렸다. 오늘은 분명 후자였다. 새벽 어딘가부터 시작된 빗소리가 끊임없이 그녀의 신경을 두드렸다. 히마리는 도가 지나쳐 숨조차 버거운 습기에 허덕이며 눈꺼풀을 들었다. 빛 하나 없이 캄캄한, 다다미 넉 장이 겨우 깔린 좁은 방에 그녀가 있었다. 사방에서 우우 우우 울부짖는 듯한 비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시꺼먼 망망대해에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 조각배에 몸을 싣고 떠는 표류를 연상케 했다. 히마리는 두 무릎을 팔로 감아 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가 서늘했다. 다시 잠들기란 요원한 듯싶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히마리는 일상의 사이사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큰 비를 죽죽 쏟아내는 하늘은 빛이 들 구멍 없이 촘촘하게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천수각은 그런대로 거느린 사람들을 비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만큼은 충실히 해냈다. 비가 내리자 한층 더 우중충해지기는 했다지만, 이런 날씨에 밖으로 내몰리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히마리는 꿉꿉하고 끈적거리는 마루 를 가로질렀다. 걷는 내내 아주 희미한 신음이 목에서 끓었다. 요즈음은 온몸이 욱신거렸다. 신쿠가 히마리를 너무 험히 다루는 탓이었다. 그의 억센 손길과 아귀힘, 주체하지 못하고 당기거나 밀치는 그 광기가 히마리를 멍들게 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히마리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뒤로부터 써늘한 타박이 뛰어들었다. 히마리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손뼉 소리가 두 번 느리게 울렸다. “주인이 부르는데, 아가씨는, 참으로 고매하시어.” 둔탁하고 느린 걸음이 히마리에게 끼쳤다. 히마리는 제 어깨에 둘리는 팔의 무게를 꾹 참아냈다. 신쿠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돌처럼 서 있기나 하시는군요.” 신쿠에게서 몰락한 천수각의 냄새가 났다. 히마리는 어렴풋이 절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틀어 신쿠의 입가에서 벗어났다. 눈이 마주치면, 히마리는 눈을 반쯤 감았다. “하아.” 학습된 경멸, 그러니까 지체 높은 윗사람의 신성한 경멸이 그녀 입술 사이에서 터졌다. 종을 부리고 나긋하게 살아가는 그런 여인의 경멸이었다. 신쿠가 연극적으로 하는 것과는 질적인 궤를 달리했다. “히마리, 하고 불러. 그래야 돌아볼 수 있지 않겠니. 종은 개가 아니란다. 손뼉과 휘파람으로 부를 수는 없지. 그래서는 안 되고말고.” 신쿠가 왈칵 분노를 내뿜었다. 그는 그녀를 안다시피 한 팔을 풀더니, 곧장 그녀의 몸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떻게.” 핏발 선 눈이 히마리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어졌다. 히마리는 혓바닥을 입천장에 딱 붙였다. 그러면 아랫입술과 턱이 떨리는 걸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숨을 쉬기는 버거웠지만. “아직도 그런 표정을 하십니까….” 일순간 히마리는 서글퍼졌다. 제 앞의 사내 얼굴이 너무도 일그러져 있는 탓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와 저 사이의 관계도 일그러져 있었고, 이 세찬 비바람도 허공을 일그러뜨렸고, 주종의 관계도 뒤바뀌어 일그러졌으니 한없이 서글펐다. 그녀는 눈을 잠시 감고 숨을 골랐다. “바보구나, 너는.” 히마리의 호흡이 무성한 습기 사이를 매끄럽게 갈랐다. “전부 너와 모은 빛이란다. 이 천수각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우리는 행복을 알아서 주워섬겼지.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말이야. 아니, 행복이 금기인 양했어도 말이야.” 그녀의 말이 가진 힘이 신쿠를 부드럽게 떠밀었다. 신쿠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두 걸음을 물러났다. 화살에 꿰뚫린 짐승처럼 그의 몸은 직선적으로 경련했다. “이 안에.” 히마리는 두 손을 제 가슴 위에 모아 올렸다. “너와 모은 작은 빛들이 있어. 나는 그것을 엎지 않을 테야. 네가 있기에 내가 강함을 믿어. 내가 있기에 너는….”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히마리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떠들어대다, 제 낯을 덮치는 손바닥에 작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만.” 신쿠가 그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하늘을 찢는 번개가 쬐고, 우렁우렁한 천둥이 뒤따랐다. 천지가 뒤집히는 소음이었다. 정신을 차린 히마리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간신히 꿈틀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여전히 잡아 누르고 있는 신쿠의 손이, “역겨운 말 그만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쿠의 손이 떨렸다. “이제 알겠다.” 웃음인지 흐느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니, 빗소리였던가. 히마리는 잘 보이지 않는 왼쪽 눈을 찡그렸다. 어둠 속에서 신쿠의 움직임이 희미하게 보였다. 작은 코가 움찔거린다. 짙은 체취와 비의 우울을 맡을 수 있었다. 이곳은 신쿠의 방이리라. 히마리는 바닥에서 벌레처럼 움찔거리던 순간의 마지막과 지금 상황을 연결 짓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별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조금씩 어둠이 익숙해지자 히마리가 허리를 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두 팔은 뒤로 묶여 뻑적지근했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나신이었다. 당혹감이 빠르게 그녀를 덮쳤다. 한참을 부스럭거리던 신쿠가 소성에 기민히 반응했다. 그는 히마리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깨어나셨습니까.” 어떤 거리낌도 없이 다가온 그가 히마리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눈높이가 맞아떨어지자 히마리는 급격한 공포를 느꼈다. 신쿠는 옷을 갖추어 입은 채였다. 평상복도 아니고 수도에 행차할 적에나 입을 만큼 화려하고 격식을 갖춘 복장이었다. 몇 겹인지 어둠 속에 서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에 반해 히마리는 처음 깨달았던 것처럼 알몸이었고, 그녀의 가느다란 두 팔로 몸을 가릴 수도 없었다. “…… ……. 무슨, 무슨 짓이니?” 히마리가 떨었다. 목도, 목소리도, 머리도, 상체도 다리도 떨렸다. 신쿠가 손을 뻗었다. 히마리는 몸을 빼고자 했지만 그녀의 등과 어깨에는 차가운 벽이 굳건히 서 있었다. 신쿠의 뒤로 난 창이 흔들렸다. 번쩍, 번개가 치고, 우르릉, 천둥이 쏟아졌다. “제대로 골랐어. 이번엔 진짜라고.” 신쿠가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오늘처럼 크게 보인 적이 있던가? 히마리는 어떻게든 그 손을 피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도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었고, 어떻게든 신쿠와의 접촉으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었다. “그만둬!” 히마리가 가냘프게 외쳤다. “싫습니다.” 신쿠가 재빠르게 절단을 감행하곤 히마리의 몸 위로 손을 얹었다. 차갑고 딱딱한 손이었다. 느껴지는 감정이라곤 증오가 전부였다. 히마리는 가슴 위를 기어다니는 손가락이 끔찍해 눈을 감았다. 소리를 내는 것은 곧 긍지를 땅에 내치는 일이었다. 아무리 두렵고 고통스러워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를 피할 수 없다면……. “사내 알몸을 똑바로 보던 이가 맞는지 모르겠군요.” 신쿠의 목소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같았다. 일정하고, 엄격했다. 인정이라곤 일말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쿠의 손이 히마리의 가슴을 거칠게 쥐었다. 히마리는 하마터면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모욕적이었다. 불쾌하고, 곧 죽고만 싶었다. 머릿속에서 증오와 애정이 몸을 섞었다. 그것들이 낳은 탁한 감정이 히마리를 지배했다. 가슴을 양껏 주무르고 유두를 비틀어 비비는 힘이 어찌나 거센지! 히마리는 거의 울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지 않는 대신 입술이 비틀렸고, 꽉 감긴 눈가는 젖어 들었다. 말도 안 돼. 남녀의 결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가르쳤던 책, 지식, 선생, 그 어느 곳에도 이런 건 나와 있지 않았다. 이건 폭력이었다. 밭에 불을 지르고 땅을 헤집는 행위, 연못의 물을 퍼내고 우물을 돌로다 막는 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히마리가 이를 악물고 윽윽거리자 신쿠가 무어라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의 행동이 뒤바뀐 것도 바로 그를 기점으로 했다. 히마리는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뜰 수밖에는 없었다. 신쿠는 히마리를 들어다 제 이불 위로 던지듯 올렸다. 비로소 트인 공간에 놓인 히마리가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러나 등 뒤로 묶인 손 때문에 쉽게 중심을 잃었고, 신쿠는 경고하며 그녀를 짓눌러 눕혔다. “그 빛이라는 게 아가씨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쿠가 핥듯이 말했다. 그가 히마리의 코끝을 가볍게 씹었다. “우윽….” 히마리가 움츠리며 바르르 떨자, 곧 신쿠의 입은 그 아래로 내려갔다. 꽉 다물린 입 위로 제 입술을 포개더니 무자비하게 혀끝을 세워 파고들고자 했다. “아…… 으으…….” 히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도적처럼 구는 것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차가운 손과는 달리 한없이 뜨거운 살덩어리가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입천장을 찌르고 혀뿌리를 건드리는 폭력적인 입맞춤이 이어졌다. 히마리는 치미는 토기를 억누르며 다리를 바둥거렸다. 가느다란 허벅지를 신쿠가 철썩 소리가 나도록 내갈겼을 땐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제발, 제발, 제발! 히마리는 기도했다. 생애 그렇게까지 간절한 적이 없었다. 제발 멈춰. 역겨운 괴물 감정이 그녀 안에서 날뛰었다. 그녀는 결국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신쿠의 혀를 씹었다. 이 사이로 살덩어리를 잘 쥐고 턱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윽!” 갑작스레 터진 통증에 반사적으로 몸을 물린 신쿠가 눈을 치떴다. 그의 입가는 타액과 핏물로 축축했고, 그건 그의 아래 깔린 히마리도 마찬가지였다. 히마리는 견딜 수 없는 모든 것에 떠밀려 울었다. 소리 없이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녀의 이마, 눈, 뺨과 관자놀이, 그로 이어지는 머리칼까지가 흠뻑 젖었다. 제발 이러지 마. 히마리가 눈으로 애원했다. “아, 이제야.” 신쿠가 환희로 몸을 떨었다. 그러자 아주 미약하게 남아 있던 희망의 등불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비바람이 이렇게나 거센데. 그런 것이 살아 있는 일이 어찌 일어나겠는가. 히마리는 심장 위에서 춤을 추는 괴물 감정을 마주 보았다. 그러는 사이 신쿠는 다시금 제가 계획한 일을 착실히 해나갔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인 적 없었으며, 앞으로 제정신을 되찾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히마리가 울음으로 뒤범벅이 된 웃음을 뱉었다. “아아……!”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손가락이 거칠었다. 다물린 음부를 열어젖히고 음핵을 짓누르는 손끝이 야속했다. 메마른 입구를 성의 없이 비벼대는 신쿠는 조급해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그녀를 몰락시키리라. 이 악령은 그렇게 말했다. 검게 드글거리는 눈동자가 히마리의 모든 몰락을 지켜보았다.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입가로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히마리가 경련하며 몸을 떨어대는 데에도 멈추지 않았다. 구부린 신쿠의 손가락이 히마리의 음핵을 공굴리다 그 밑으로 난 틈을 비집었을 때, 히마리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밀지가 아무렇게나 짓밟힌다. 기진맥진하여 늘어진 두 다리 사이에서 신쿠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중지가 들어가니 그 다음은 훨씬 쉬웠다. 생리적으로 질금질금 흐르기 시작한 애액에 핏물이 비쳤다. 히마리는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린 채 할딱거렸다. 집요하게 엄지로 음핵을 자극하는 탓일 것이다. 검지와 중지의 손끝이 내벽을 꾹꾹 밀며 문질러대는 탓일 것이다. 허리가 떨리고 입술에서 울음 섞인 비음이 터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약지가 입구 근처를 배회하며 기회를 엿보기 때문에, 신쿠의 게걸스러운 입이 가슴을 물고 혀끝은 유두를 희롱하기 때문일 테다. 이건…… 이건 전부……. 찢어지는 빗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아래로 은밀하게 찔걱거리는 소리가 깔렸다. 히마리는 허리를 뒤틀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도 아랫배를 안쪽에서부터 툭툭 치는 듯한 찌릿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뒤로 묶인 팔이 너무 저렸다. 그리고 곧 그 저림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감각이 그녀를 찔러댔다. 발끝으로 신쿠의 허벅지를 밀어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신쿠는 완전히 깨우쳤다.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새까만 천장이 히마리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하으, 아, 아, 아아….” 이제는 목 뒤에서 웅덩이를 이룬 눈물 때문에, 그녀가 조금만 움직여도 차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예 다리를 벌리게 해 고정한 신쿠가 손목에 섬세한 힘을 주었다.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섬광에 히마리가 발끝을 움츠렸다. “이제야!” 신쿠가 감탄했다. 그는 손바닥을 흠뻑 적신 애액이 늘어지는 것을 유린하듯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꽉 조이던 내벽이 움찔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감당하고 있었다. “헉, 하윽…….” 히마리가 가늘게 헐떡거렸다. “이제야…….” 신쿠는 눈을 깊게 감았다. 감격에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그의 아래 깔린 여인을 보라. 완전히 꺾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저 가슴에 빛을 담아 두었다고? 신쿠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그가 그녀의 안쪽에서 손가락을 구부리자 히마리가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가씨의 어둠이 보입니다…… …….” 그 말에 번개가 이마로 찍히는 듯했다. 히마리는 커헉, 하는 숨을 뱉으며 버르르 떨었다. 신쿠, 신쿠. 섬뜩한 사내를 본다. 밑을 헤집고 들쑤시며 웃는 잔혹한 이를. 아, 그는 악령. 그녀의 충실한 종은 이제 없었다. 돌아갈 땅도 불타버린 뒤였다. 그럼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나. 히마리의 눈동자가 위를 향했다. 두통이 심각했다. 다시 신쿠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지만, 피할 수 없었다. 뜨끈하고 비린 피가 입을 타고 넘어왔다. 히마리는 맥없이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림자는 몸을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악령의 충실한 종이요 그의 망량이었다. 낡은 천수각에서 스스로를 그림자로 변태한 짐승이 히마리를 찍어 누르고 깊은 곳에 제 인을 새겼다. 아비의 죽음도, 이곳에 와 허우적거리던 노력도 전부 아무것도 아니었다. 히마리는 깨달았다. 손가락이 거칠게 빠져나가자 물줄기가 뿜어졌다. 천박한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수치를 느낄 새도 없었다. 히마리는 눈을 똑바로 떴다. 여전히 그녀의 입안을 헤집는 신쿠가 있었다. 죽은 것처럼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있었다. 허물어지고 있는 사내. 온몸으로 세상의 그림자를 뿜어내는 그 사내가……. 히마리가 눈을 다시 감으면, 그녀 눈가에 고여 있던 마지막 눈물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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