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1화: 상승예찬
상승예찬
Writer. 얌 | Design. 노비
바람은 파괴하는 힘이 아니다. 바람은 제자리로 되돌리는 힘. 바람은 나아가는 이의 등을 떠미는 힘. 바람은 앞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힘이며, 솎아내고 닦아내고 인사하는 힘. 바람은 무엇도 해치지 않는다. 악의를 품지 않는다. 바람은 가장 순수한 힘이다. 원천의 힘. 이 지구에 가장 먼저 발을 붙였을 힘. 뜨겁고 차가운 곳이 생기고, 높고 낮은 곳이 생기면서부터 존재했던 힘. …… 너는 그런 힘을 안고 태어난 거란다, 오딘. 아샤는 문득 뒤를 보았다. 많은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때는 저 스스로가 그들 신전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이 세계를 짊어지고 있다던 죄인 티탄처럼. 그것이 제 숙명이며 힘을 가진 자로 응당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그러나 지금 그의 팔에는 가뿐한 무게의 나비 한 마리가 깃들어 있었다. 아샤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세계를 구한다는 고루함을 주장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는 악이 너무도 많으며, 선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은 대립하며 파괴하고 상생한다. 마치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무너지고 마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즐기는 듯하다. 굉음과 함께 공기가 진동한다. 막 세 번째 건물이 무너진 참이다. 아샤는, 그 영웅은 당장에라도 지상에 강림하고픈 마음을 죽이며 나비를 보듬어 안는다. “내가 만약 나비라면…….” 그녀의 염원을 들어줄 것이다. 그들은 멀리 갈 것이다. 붕괴의 한가운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개와 손을 맞대고 바람에 몸을 실을 것이다. 오딘으로서의 힘이 가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건 이시스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시스임과 동시에 세크메트이기도 했는데, 히어로 네임을 둘이나 가진 건 그녀가 유일무이했다. “난 양면적인 인간이지.” 그날도 그녀는 자조 섞인 말을 뒤로 이었다. “내 힘은 계도하는 힘이면서, 파괴하는 힘이야.” 그녀가 손끝을 휘두르면 불꽃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그건 언제나 악당을 파고들었다. 어깨나 허벅다리 따위를 관통하는 불꽃의 힘이 느껴지면, 비명을 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명중률은 구 할을 웃돌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아직 죽인 사람이 없다는 건 많은 바를 시사했다. 그녀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넌 달라 오딘…….” 이시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샤는 바람에 힘을 실어 그녀를 백화점 너머로 날려 보냈다. “네 힘은 오로지 지키고 구하는 힘이야.” 이시스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그에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이시스는 연차가 꽤 쌓인 히어로였으며, 차기 간부로 지명될 만큼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지금도 아샤 안에 남아 있는 많은 온기와 즐거움은 그녀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오딘이라는 이름의 부모는 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 차례 거듭 거대한 굉음이 아샤와 그의 품에 안긴 나비의 등으로 끼쳐왔다. 아샤는 정말이지 희미해지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던 그날을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복기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는 그래야만 하는 때였다. 과거를 온전히 마주 보고 나아가야 하는 때. 이 가냘픈 날개가 찢어지지 않도록, 세계를 돌고 높이 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심이 그의 가슴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시점에만 할 수 있는 기도이자, 참회였다. 그는 그곳에 있었다. 르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때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아샤는 자주 자책했다. 그의 주치의는 그것이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생각이 실제로 들더라도 의도하여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을 끊어낼 수 있는 기인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아샤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인생의 크고 작은 휘청거림에서, 하다못해 버스를 놓칠 때마저도 그날 버렸던 시간을 상기했다. 아샤도 알았다. 그건 객관적으로 아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초동 대처가 미흡했다고도 볼 수 없었다. 그건 그냥 그렇게 되었을 일이었다. 질 낮은 테러리스트가 불러온 끔찍한 재앙.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순 없었을 것이다. 아샤와 이시스가 아니었더라고 하더라도. 이시스가 백화점의 건너편으로 넘어간 건 용의자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아샤가 해야 할 일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괴력 이능력자 영웅 몇 명이 먼저 투입됐으나 붕괴 정도가 상당하여 장해물을 치우는 일에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브리핑을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아샤는 그의 힘을 사용해 무너진 층을 들어 올릴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공간이 확보되면 다수가 투입되어 생존자를 구한다. 아샤는 그때도 지금도 작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샤가 무너진 층을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직감적으로 모든 게 잘못되었음을 알았다.산 이의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빠르게 안으로 몸을 들였을 땐 전부 선명해졌다. 귀에 꽂힌 통신 장치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이시스였다. 아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라이트를 켜며 투입되는 요원들의 낯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돌가루 먼지가 자욱한 사위는 빛이 투과될 구석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아샤는 이미 그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데에 많은 힘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땀이 목덜미와 등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한 발을 앞으로 떼면,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피였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어떤 정신으로 생존자를 찾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샤의 주치의는 앞선 말을 했을 때와 같이 무감하고도 단호한 얼굴로 그것이 “충격을 덮기 위한 뇌의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샤는 그것이 결코 긍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비겁자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날의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심지어는 아샤와 만나는 그 순간에 매몰되어 다른 무엇도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나비처럼. 아샤는 팔에 감기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아샤는 도망친 것이다. 기억으로부터. 옅은 분홍빛 눈동자가 아샤의 기색을 읽을 때, 아샤는 그녀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시선을 맞추어 주면서도 무한한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르네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보다 맑은, 그래서 두려움에 가득 찬 분홍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아샤는 미친 것처럼 주변을 뒤지다 겨우 그녀를 발견했다. 손에 잡히는 게 사람인 듯싶었는데 마네킹이었고, 마네킹인 줄 알았는데 검은자위를 뜨고 저를 보는 장면이 계속되니 미칠 것만 같았다. 개중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모두 큰 고통 없이 일격에 강을 건넜으리란 짐작이었다. 신음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르네는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린 채였다. 그녀의 몸은 너무도 가느다랗고 작았다. 그 몸을 힘껏 웅크린 탓에 기적적으로 산 것일는지도 몰랐다. 그녀 근처에 있던 매대가 그녀의 위를 사선으로 드리우고 있었다. 철제 매대가 아니었더라면 그녀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 …….” 아샤가 헉헉거리는 숨을 뱉으며 그녀에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통신 장치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샤의 머릿속에서는 이시스가 단말마를 내질렀던 순간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본부, 오딘입니다.” 아샤의 목소리는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묽은 눈동자가 두려웠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구해야 하는 사람을 두고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 된 것은…… ……. 무엇보다 그 애, 르네, 아니 그때의 로티는 너무 어렸다. 이런 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걱정이 될 지경으로 어렸다는 말이었다. 이런 어린애가 왜 고통에 빠져야만 할까? 그때 아샤의 얼굴은 무자비하게 일그러져 있었을 것이다. “생존자 일 명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구출하도록 하겠습니다…….” 통신 장치에 대고 말한 아샤가 로티의 몸을 안아 들었다. 로티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정확하게 보는 눈으로, 가만히, 아샤의 눈을 들여다 보았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색깔이었지만 아샤에게는 마치 칼날처럼 느껴졌다. “안녕. 이제 넌 안전할 거야.” 아샤가 말했다. “이제 넌 안전할 거야…….” 그건 일종의 주문이었다. 비단 로티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본부에게서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넌, 안전할 거야.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안녕, 나는 오딘이야.” 아샤는 로티를 안아 든 채 비틀거리며 걸었다. 숨이 차올랐다. 저쪽에서 대원 무리가 빛을 쏘아 주었다. “오딘 님! 이쪽입니다!” 무성한 소리를 해치고 나아가는 내내 아샤의 머릿속은 희게 번져 있었다. 그때 로티는 자신이 살아 돌아온 무저갱을 보고 있었다. 가벼운 머리를 아샤의 어깨에 가냘프게 기댄 채, 멀어지는 참극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망각이라는 축복이 왜 그녀에게는 내리지 않은 것일까? 아샤는 정신과 전문의가 아니기에 알 수 없었다. 이능력이 뇌로부터 기원한다는 사실조차도 최근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로티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발, 두 발 내디디며 생각한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데에는 제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리고 지금 그녀를 이끌 방법을 알게 된 이상 멈추는 건 어불성설이다.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폭발적인 파괴 열망에 젖어 한계를 넘도록 발현되었던 힘의 근원. 누군가를 해치는 힘이 아닌 구하는 힘. 이 세계가 가졌던 최초의 힘. 바람이 분다. 쾌청한 여름날이다. 정확히 그날과 같다. 그 장례식에서 해주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았다. 날이 너무 좋은 날이기에 속이 불편했다. 여름이었지만 볕은 따갑다기보다는 선명하고 아름답다는 감상을 주는 그런 낮이었다. 시원한 바람, 아샤의 자의가 아닌 그 바람이 몰려와 따뜻한 살갗을 식혀주었다. 아샤는 그런 날씨를 해치고 장례식이 진행되는 교회로 들어갔다. 장례는 합동으로 치러졌다. 나라에서 모든 것을 지원해주겠다고 나섰다. 들어가기도 전부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피해자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시민들까지 추모에 합세한 탓에, 교회는 전에 없이 북적거렸다. 그런데도 소란스럽다거나 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으니 기묘했다. 끈적끈적하고 검은 우울의 타르가 교회를 휘감고 있는 듯했다. 로티는 그러한 교회 구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먼지가 나뒹구는 바닥이었다. 아샤가 지나가는 장례 보조사에게 물었을 때, 그녀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어른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했다. 아샤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를 홀로 두어야만 하는 어른들의 사정 따위를. 로티는 모은 발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에서야 인지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곳곳에서 울음이 들려왔다. 일순 뒷머리가 지끈거림에 아샤가 신음했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널 탓할 사람은 없어. 모두 이해해줄 텐데.” 그의 동료가 말했지만, 그는 이곳에 있다.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여러 번 다잡아야 했다. 그는 영웅이었다. 그가 장례식에 등장하기 무섭게 이목이 쏠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질책하지 않았으나, 그는 어쩐지 버겁다고 생각했다. 영정 중에는 이시스의 얼굴 또한 있었다. 그녀는 용의자를 추격하려다 집단 린치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건 계획된 조직범죄였으며, 그녀를 홀로 보낸 것 또한 큰 위험이 따르는 결단이었다고…… 아샤는 전해 들었다. 일이 모두 끝난 후에야 그런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낀 작전이던 것이다. 수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죽은 사람들……. 아샤는 짧은 묵념 뒤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들을 매장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무리를 지나 로티에게 다가갔다. 그 작고 가엾은 영혼에게. 로티는 아샤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샤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는 남자를 아주 약간은 가여워했다. 그런 게 전부 눈에 보일 나이였다. 그러면서도 야윈 뺨과 목, 손목 같은 부위는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아샤는 떨리는 웃음을 머금고 로티와 시선을 마주쳤다. 로티는 오래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보였다. 그건 마치 바람이 아무렇게나 휩쓸고 지나간 늦가을의 쓸쓸한 정원 같았다. 아샤는 자꾸만 목울대를 치고 넘어오려는 감정을 삼키기 위해 애를 썼다. 뒷덜미가 따갑고 섬뜩했다. 나쁜 예감은 전부 끝난 뒤였는데, 이게 그 결과였는데,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느릿한 장송곡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사이, 임시로 지어진 합동 장례식장의 구석, 한 남자와 아이의 기묘한 대치 상태는 오래 계속되었다. “…… 거기에.” 아샤는 이 대화의 시작이 있다면 그건 자신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의 예상은 산산이 조각난다. 이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아이에 의해서. “그냥 뒀으면…… 나는 죽었을 거예요.” 로티가 더듬더듬 말했다. 힘이 다 빠진 목소리였다. 목을 긁으며 나오는 건 바람 같기도 했고 앓는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기도 했다. 혹은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나비의 날갯짓이 만드는 아주 미세한 소리처럼도 들렸다. 그런 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야. “왜 나를 살렸어요?” 로티가 물었다. 그건 이제 와 생각하자면 생의 증명을 위한 질문이었다. 그러니 아샤는 상처 받아선 안 되었다. “왜 나만…… 살렸어요?” 로티의 작은 손이 마찬가지로 작은 무릎을 쥐었다. 그 작고 가냘픈 부위에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손가락이 희게 질리고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아샤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그건 로티가 뿌리부터 악인 존재여서가 아니었다. 아샤는 자신이 해내지 못한 모든 것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채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그러나……. “왜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왜…… 다른 사람은 구하지 않았어요……?” 그는 영웅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숨을 살짝 들이켠 아샤가 일그러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 그는 피를 쏟는 심정으로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너 홀로 남아 살아가야 하는 일이 생긴대도…….” 훗날 그는 이 모든 문장을 잊게 된다. 이건 괴로움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살리고 말 거야.” “그러니 정말 미안하다.” 그가 기억하는 건 이 문장이 전부이다. “이 이기적인 어른이 이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널 구할 거라는 사실에 미안해.” 로티는 대꾸하는 대신 눈을 가만히 빛내며 아샤를 응시했다. 그때였을 것이다. 그녀 안의 고치가 튿어지며 젖은 날개를 비비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를 깨운 건 아샤 자신이었다. 그녀가 르네 보니타로서 개화한 그 순간에 분명 아샤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모든 아귀가 들어맞는다. 네 번째 붕괴가 시작되었다. 연구소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었다. 아릿한 붕괴의 공포가 아샤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아샤는 그것마저 포옹해야만 했다. 그의 안에 모든 것이 있었다. 그는……. “나는…….” 아샤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래, 바람. “네가 저승의 강을 몇 번이나 건넌다고 하더라도 너를 구할 거야.” 날개가 찢어진 프시케는 홀로 날지 못한다. 핀이 박혀 있던 자리를 한참이나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그러는 사이 몇 번이나 망각의 강에 고개를 처박는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고 하더라도 아샤의 일은 하나였다. 아샤는 그녀를 구할 것이었다. 르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녀의 수긍은 어떤 것보다도 가치가 있었다. 그때에는 얻지 못한 것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샤는 비로소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알았다. “그거 알아요…… 나의 히어로?” 르네의 살얼음 같은 낯에 희미한 웃음기가 어렸다. 신록이 사지를 뻗는 이 여름과 어울리는 투명한 미소였다. 그들이 도약할 때, 푸릇한 향기와 여름의 볕이 그들을 비호했다. 그들은 빛나고 있었다. 폭발의 우렁참도, 그 파편도 닿지 않을 만큼 떠오른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영웅이 아닌데도 지하 세계에서 돌아온 건 프시케가 유일해요. 아, 그 나비 여자. 영혼의 현신.” 르네의 말 사이사이 숨 가쁜 기쁨이 묻어났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한여름 맑은 햇빛이 그녀의 낯에 고여 더없이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몇천 년도 전부터 이건 전부 정해진 일이던 모양이죠…… …….” 땅이 멀어진다. 도시의 키 큰 빌딩들이 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어디에도 닿지 않은 상태를 오래 유지하려 한다. 폭발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떠올라 멀어지는 인간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못할 것이었다. 아샤는 대지에서 자신을 묶어 두던 것들로부터 해방되었다. 능력을 이렇게 사용하는 게 얼마 만인지. 그는 가슴에 휘몰아치는 자유를 만끽하며 르네의 몸을 고쳐 안았다. 르네가 어깨를 떨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섞여 마치 현악기의 연주처럼 들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전부 나의 의지야.” 아샤가 힘주어 말했다. 그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쯤은 있었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쾌청한 하늘이 보였다. 저쪽의 태양이 그들이 가야 하는 길을 내리쬐는 것이 보였다. 아샤는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작은 도시라면 좋을 것이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기를 좋아하던 아이를 위해, 누구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는 곳으로 갈 것이다. “너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 아샤가 속삭였다. “르네 보니타.” 그건 맞는 말이었다. 르네 보니타의 세상은 시계가 멈추었던 그날부터 단 하나였기 때문에. 지금도 한 팔로 그녀를 두르고 있는 그녀의 아틀라스가 있지 않던가. 르네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다, 손을 앞으로 나긋하게 뻗었다. 반짝이는 햇빛이 그녀의 손바닥에 고였다. 손금을 타고 줄줄 흐르는 황금의 빛이 손목을 넘어 팔꿈치까지 넘실거렸다. ……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혹시 몰라요, 나는 변덕스럽고 작은 물살에도 쉽게 쓸려가는 사람이라. 어찌 될지.” 조심스럽고 여지를 남겨 두는 문장은 그녀의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샤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그런 보루가 필요했다. 나중에 가선, 그 보루가 아샤 체르니가 되리라. “다만…. 이 공기가, 바람이, 하늘이 좋아요.” 르네가눈을 감았다. 바람이 그녀의 크림색 머리칼을 흩뜨렸다. 그건 아샤의 뺨을 간지럽히는 날갯짓이 된다. 모든 것이 선명하다. 이 여름은 푸르른 빛, 저 태양은 황금의 빛, 나의 세계는…… ……. “시원한 게, 아샤를 닮았어요.” 나를 선택했다. 르네의 뺨에 생그라운 혈기가 돌았다. “…… 만약 내가 그들을 이해하려 하는 날이 온다면, 그건 당신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일 거예요.” 르네의 불완전한 말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샤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눈 감은 옆얼굴을 시야 가득 담는다. 행복이라는 것은 바람과 같은 것. 보이지 않으며 잡거나 가둘 수 없는 것. 그러나 몸을 내맡겼을 때 비로소 느껴지는 것. 코끝을 간지럽히는 힘으로, 속살거리는 힘으로, 파닥이는 힘으로…. 나의 힘은 그런 것. 바람은 유기하는 힘이 아니다. 바람은 속죄하는 힘. 바람은 함께 나아가 주는 힘. 바람은 깍지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힘이며, 고백하고 용서하고 감싸 안는 힘. 바람은 무엇도 해치지 않는다. 바람은 세계의 힘이다. “걱정은 마. 네가 무사히 이곳을 사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나는 세계를 저버리지 않아.” 아샤가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도약했다. 물론, 함께였다. 르네가 조심스럽게 허공의 손을 틀어 아샤의 뺨을 짚었다. 고난이 그를 조금쯤 마르게 했을까. 하지만 그에 따른 씁쓸함과 애틋함보다는 앞으로 채워 나갈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기대가 피어오른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어김없이 눈이 마주친다. 빛나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에 이지러지게 빛나는 청록빛이 선명했다. 지금 당장 고꾸라진다고 하더라도 행복하리라. 르네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 사랑하고 있어요, 나의 히어로.” 그 고백은 상승이다. “오딘이 아니라 아샤 체르니, 당신을요.” 그들을 아주 높은 곳까지 단번에 끌어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고양된 숨소리가 섞인다. 아샤가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그의 등 뒤로 찬란한 하늘이 그의 것처럼 보인다. 세상을 등에 진 남자가 대답하기를……. “축하해.” 그리하여 세상의 위대한 대변자가 되어 선언하기를……. “벌써 세상의 한 부분을 사랑하게 됐네.” 말끔한 하강의 종언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아주 작고 아름다운 도시를 찾을 때까지 그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전에 없는 활력이 아샤의 몸속을 휘몰아쳤다. 자신이 지키고자 한 단 하나의 나비, 마침내 아주 좁은 범위로 좁혀진 이 순간을 그냥 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여름의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들의 발끝에서는 채 마르지 못한 지옥 강물이 뚝뚝 떨어졌다. 막 역경을 헤치고 솟아난 두 빛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찬란했다.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 것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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