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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여름의 눈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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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눈
Writter. 얌 CM | Design. 열 CM
영화는 고요를 통해 말한다. 장면과 장면 사이, 소리와 소리 사이, 눈빛과 눈빛 사이에 발생하는 고요가 영화의 본질을 조명한다. 깨어남 전에는 죽음의 상태가 있어야 하며 울음 전에는 잠시 숨을 멈추는 몇 초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영화에서의 고요는 도약 직전의 응축 상태를 가리키며 카메라가 선택한 순간만을 조명한다. 외부의 모든 것은 흘러가지만 다루어지지 않는다. 혹은 필름 안에 함께 박제된다. 따라서 정훈은 고요를 사랑했다. 그가 영화를 사랑하는 만큼 그 자신의 삶을 영화처럼 만들어주는 정적의 순간들을 사랑했다. 이를테면 그는 그가 운동화 끈을 묶고 몸을 일으킬 때, 현관문을 열기 직전 발생하는 1초를 사랑했다. 마침내 빛으로 금이 그어지고 쏟아지는 초여름의 햇볕을 쬐며 골목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순간에 휘청거리면서도, 이런 일은 몇 번이나 할 수 있겠노라고 생각했다. 새로울 게 없는 시작이었다. 이런 처음은 얼마든지 있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거주지를 옮겨 다니는 터라 이젠 정착이라는 단어가 훨씬 낯설게 느껴졌다. 정훈은 무선 이어폰을 끼고, 휴대전화를 보며 걸었다. 정적이 주던 기대와 맑은 날씨의 산뜻함은 이제 뒤로 물러간 지 오래였다. 액정에 뜨는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들을 살피다 박스오피스 순위를 확인하기도 하고, 의미 없이 듣던 노래를 뒤로 넘기기도 했다. 쿵쿵거리는 음악이 목과 심장을 두드리는 듯했다. 전학 첫날부터 지각은 좋지 않았으므로 발을 재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향은 몇 번이고 확인했으므로 눈으로 길을 더듬어 갈 필요가 없었다.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 장면을 연결하듯이 걸었다. 참새, 혹은 이름 모를 새, 유치원 통원 버스의 그르렁거림, 학생들의 목소리, 약간 더워서 도무지 깨끗하게 느껴지지 않는 공기……. 전봇대에 묶인 현수막이 너덜거리고 담벼락 위에는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두 블록 너머의 시장에서부터 시작된 은근한 비린내가 골목 전체에 도사리고 있었다. 정훈이 걸음을 잠시 멈춘 건 다시 보고 싶지 않던 이름이 휴대전화 액정 위로 떠오르면서부터였다. “김지혜.” 정훈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어느새 가까워진 신호등이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일주일가량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 모든 게 괜찮겠거니 생각했건만, 오산이었던 듯싶었다. 알림창이 연속적으로 떠오르며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헤어짐의 사유는 대단할 게 없었다. 사는 지역과 환경이 달라지니 자연히 정리하자는 게 정훈의 요지였다. 그러는 사이 몇 통인가 부재중 전화가 찍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훈이 사는 지역을 옮겨 다닌 횟수만큼, 어쩌면 그에 곱절로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특별하지 않으면 남기고 싶지 않다. 정훈의 생각은 오로지 한 방향만을 향했다. 그가 짧게 혀를 차며 엄지를 움직였다. 그만 연락해. 정훈이 남길 말은 하나였다. 지혜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건 아니었다. 외려 감정의 척도를 따진다면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어느 기점에 눈금이 가 있었다. 한때는 지혜를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함께 있으면 웃음이 자주 났다. 아마 일주일 전까지 그랬다. 그러나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그것들이 차에 실리는 걸 보면서, 앞으로 다녀야 하는 학교의 이름과 교복의 색깔을 눈에 익히면서는 그러한 감정들이 흐릿해지고 말았다. 며칠이 흐른 뒤에 정훈은 자신이 지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다고 지혜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난감했다. 그러니 연락을 끊은 건 그의 선에서는 정중하고 이성적인 판단이었던 것이다. 정훈에게 지혜의 무게란 딱 그 정도였다. 새로 사람을 만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만큼 가벼웠다. 물론 지혜가 그러한 사실까지를 파악할 일은 없었다. 정훈이 전송 버튼을 누르곤 한숨을 푹 내뱉었다. 고개를 젓고 한 발을 내디딘다. 귓가의 드럼은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밀도 높은 박자를 쏟아낸다. 잠깐의 불쾌함은 금방 신경을 건드리는 흥분 작용으로 인해 휩쓸려 지나갔다. 정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깔리는 음악이었다. 모든 걸 깨달은 주인공이 아주 빠르게 도시를 헤집고 달리는 장면이었다. 그런 걸 보면 통쾌하다기보다는 슬플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멋졌다. 도시의 전경이 한꺼번에 빨려 나가듯 멀어지는 배경과 어쩐지 정적으로 보이는 주인공의 얼굴이……. 장면과 장면의 사이, 정적이 소음으로, 소음이 다시 정적으로 넘어가는 그 틈새를 비집고 어떤 힘이 불쑥 들어온 건 정훈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갑작스레 다가온 힘이 정훈의 걸음을 저지했다. 세상이 까만 정적으로 뒤덮인다. 정훈은 순간 뒤로 당겨지는 몸을 비틀거리며 고개를 틀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찰나의 적막이 홀연히 달아나고 그의 앞으로 쌩하니 지나가는 1톤 트럭의 운전자가 남기고 간 욕설이 음악으로 꽉 채운 귓구멍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등골이 다 서늘했다. 원초적인 공포와 안도가 몸을 휩쓸었다. 지혜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공상과 현실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순간, 하마터면 저것에 치일 뻔한 것이다…. 정훈이 숨을 고르며 저를 잡아챈 이를 확인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여름, 태양, 빛이 번쩍거렸다. 빛의 작고 가느다란, 뾰족한 파편들이 눈앞에서 톡톡거리며 터졌다. 정훈의 뒤에 서 있던 이는 아주 가뿐하게 잡았던 가방을 놓곤 걸음을 뗐다. 어느새 신호등은 초록색 등을 번쩍이며 내뿜고 있었다. “…… …….” 정훈이 입을 열어 그를 부르고자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등이 아주 곧았다. 숱이 많아 복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햇빛에 푸르게 반짝거렸다. 그의 옆구리로 이어폰 줄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또 하복을 갖추어 입은 등은 아주 하얬다. 정훈은 그를 기점으로 우르르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무리에 떠밀려 걸어가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저를 지나칠 때 언뜻 봤던 옆얼굴이 무척이나 선명했다. 선이 가늘고 눈동자가 맑았다. 분명히 그랬다. 여름의 빛이 고여 응축된 것처럼……. 정훈은 닳도록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어떤 사람은 보는 순간 테이프가 길게 늘어진 것 같은 착각을 주지.” 왈츠를 추기 시작하는 순간 남자가 뱉었던 문장이 슬그마니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게 저런 사람인가? 정훈이 확신하지 못하는 사이 그는 건너편 길가에 세워진 차에 올라타 금세 정훈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정훈은 학교로 이동하며 지혜의 연락처를 차단했다. 지나치게 놀라 들떴던 마음이 추락한다. 곧 모든 게 귀찮아졌다. 괜스레 밀려오는 찝찝함에 이어폰까지 빼고 걷고 있자니, 여름 아침의 더위가 갑작스럽게 선명해졌다. “걔는 좀 더…….” 가뿐했던 것 같은데. 공기의 밀도에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 나아갔던 것 같은데.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등이 가볍고 차가워 보였던 것 같은데. 정훈은 계속해서 그 얼굴을 상기했다. 잊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첫날부터 크게 다칠 뻔한 걸 구해준 이가 아니던가. 그런 순간은 뇌리에 깊이 남으면 남을수록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그를 찾으리라. 인사라도 건네는 게 정훈이 할 일이었다. “답례는 중요한 거야.” 정훈의 부모는 곧잘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머무름이 짧은 사람일수록 그게 참 중요해.” 카메라를 닦으며, 책장을 넘기며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다가도 정훈과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었다. “정훈이 너도 언젠간 이 말의 뜻을 알게 될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훈은 그들의 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사려 깊은 이가 되지는 못했다. 지혜에게 벌인 일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런 식으로 끊어낸 관계가 끝도 없었으니. “그래도 이번엔 해보고 싶네.” 정훈은 어깨를 크게 으쓱거렸다. 교문을 넘는 이들 틈에서도 그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차를 타고 떠났으니 정훈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으리라. 학교 하나를 하루 안에 다 돌아보지 못하겠어. 막연히 가벼운 마음을 먹은 정훈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고 교문을 지났다. 새로울 게 없는 첫날, 새로울 게 없는 학교. 정훈은 지겨운 데자뷔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더 이상 연기가 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름이 무엇인지부터 어디에서 왔는지, 뭘 좋아하고 어떤 취미가 있는지……. 지루한 질문에 하나하나 웃음기 섞인 대답을 내놓으면서도 정훈의 눈은 바쁘게 복도 쪽을 향해 있었다. 담임이 이미 한 차례 소개했을 텐데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정훈에게 대답을 요했다. 배정받은 자리 주변으로 몰려든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통에 정훈은 한 가지 일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런 관심은 싫지 않았다. 평소였더라면 오히려 즐기는 쪽이었을 것이다. 정훈이 염려하는 건 하나였다. 혹시 학년이 다르면 귀찮아지는데. 전교를 다 뒤집어야 하잖아. 명찰 색이라도 봐 둘 걸. 한심해 보였으려나……. 정훈은 난생처음 해보는 고민에 몰두했다. 어렴풋이 분위기만을 잡아냈던 장면이 이상하리만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교실 한가운데에서도 정훈은 실낱같은 기억의 끄트머리를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제게 다가오는 문장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대꾸해주었는데, 그건 정훈의 몸에 밴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이곳도 한철일 테다. 사소한 트집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관계의 진전이라거나 흐름이 생기기 전에 떠나버릴 텐데. 그 때문에 정훈의 낯에는 내내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이제 슬슬 떨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조례와 1교시 사이에는 아주 짧은 시간만이 존재한다. 기실 첫인상을 판단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정훈은 흐릿하게만 느껴지는 얼굴들 사이를 시선으로 유영하다 다시금 복도 쪽을 내다보았다. 반쯤 열린 문으로 전학생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가득한 눈빛 몇 개가 보였다. 제 반이 아니라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기웃거리며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모습이 꽤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애는 없었다. 정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세련된 머리 스타일을 한 여자아이 한 명이 정훈의 옆자리에 앉아 책상에 팔을 걸쳤다. “첫날인데 그럴 리가.” 정훈이 능청스럽게 대꾸하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명찰에는 이름 석 자가 쓰여 있겠지만, 그보다야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쪽이 가까워지기 쉬웠다. “학교 소개 도와줄까?” 이맘때의 아이들은 시각적인 자극에 약하다. 정훈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명쯤이라면 친분을 쌓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긴 고민을 거치지 않고 정훈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곧 수업을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수업은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정훈은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다. 운 좋게 배정받은 자리가 창문과 가까워서, 그는 수업에 집중하는 대신 창밖을 내다보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내신 성적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는 부모님이 있었기에 뒷배가 든든했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 어머니의 쾌활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정훈은 낙천을 저버리지 못했다. “마지막에 무언가를 남기려고 아등바등할 필요 없어. 세계가 얼마나 넓은데. 너도 알게 될 거야, 곧….” 정훈에게 그런 말을 할 때, 그녀의 낯은 얼마나 희멀겋고 반짝거렸던가. 정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쳤다. 창문은 꽉 다물리게 닫혀 있었다. 얇은 창문 너머로 여름 오전의 찬란한 빛이 넘실거렸다.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의 움직임을 보이는 아이들이 작았다. 선생님을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우르르 달려가기를 반복하는 검은 머리들을 보던 정훈이 고개를 틀면, 내내 그를 바라보던 짝꿍이 화들짝 놀라더니 교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맘때쯤 정훈의 마음은 그저 그런 시작에서 꽤 괜찮은 시작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복도를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정훈이 주도하지 않아도 아까 말을 걸어 온 아이가 해결해줄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만나게 되겠지. 정훈은 다시금 낙천을 머금고, 저를 내내 바라보던 옆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던진 뒤, 내내 내다보던 창문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모든 게 정훈의 예상대로였다. 전학 첫날은 그의 경험을 빗겨나간 적이 없었다. 낮으로 다가갈수록 후텁지근해지는 공기를 헤집고, 정훈은 복도를 거닐었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인사를 나눌 이가 얼마든지 있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느니 분위기를 흐려선 안 된다느니 하는 훈계를 떨어트리고 갔다. 정훈은 사람 좋게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그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어쨌든 어디에서나 미움받지 않는 싹싹함만이 그의 특기였다. 그런 그의 옆에 달라붙다시피 한 이의 이름은 소연이었다. 그녀는 정훈의 어깨보다 머리가 살짝 높이 있을 정도로 키가 컸고, 웃는 입이 시원했으며, 무용을 준비한다고 했다. “너랑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뻐.” 소연이 키득거리며 정훈의 팔을 붙잡아왔다. 시선이 단번에 쏠렸지만 정훈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 나도 그런데.” 실없이 가벼운 대답만을 툭툭 내뱉을 뿐이었다. 소연은 나름대로 발이 넓었다. 그런가 하면 의외로 교내 설명도 성실하게 해주는 탓에 정훈은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구교사는 음악실만을 사용하고 있으며, 여름 방학엔 허물 예정이었다. 또 정훈의 반이 있는 층의 남자 화장실은 수압이 유난히 약하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급식 맛이 좋아졌는데…… 그건 아마도 어떤 남자애 때문이다. 구교사까지 향하는 길에 소연은 끝도 없이 재잘거렸다. “그래?” 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남자애?” 정훈의 상상으로는 가닿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한 사람이 학교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잘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 그게.” 소연이 빙그르르 몸을 돌리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정훈과 마주 보는 위치에 뒷짐을 지고 선 그녀가 모호한 웃음을 머금었다. “여보운이라고 있어.” 소연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구교사로 이어지는 길목에 잔뜩 심어진 등나무에서 신선한 냄새가 넘어왔다. “이름이 특이하네.” 정훈이 중얼거리자, 소연이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런 말 하면 엄청 싫어한대.” 소연이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사르륵 소리를 내며 앞으로 늘어졌다. 글쎄. 누군가의 발언권을 거둘 만큼 막강한 힘이라는 게 교내에 존재할 수 있던가. 정훈은 지나왔던 학교를 떠올렸다. 주먹을 좀 쓴다든가, 집이 좀 잘 산다든가 하는 유형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정훈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드는 아이들도 정훈에게는 꽤 살갑게 대하지 않았던가. 정훈이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이자 소연이 덧붙인 바로는 이랬다. 정훈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대기업 회장의 아드님이시고, 성격이 꽤 보수적이고 벽을 치는 축이며, 어찌나 단정하고 깔끔한지 아이들이 쉽사리 다가가질 못한다고. 여보운이라는 귀여운 발음의 이름과는 딴판으로 일 년 하고도 한 학기를 다닌 아직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본 아이가 없다는 사실까지를 덧붙인 소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꽤 귀엽게 생기긴 했는데, 얼굴도 희구. 근데 엄청 깍쟁이야.” 소연이 구교사로 막 한 걸음을 더 떼려는데 다시금 종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고갯짓했다. “그만 들어가야겠다. 10분은 진짜 짧네…….” 내친김에 교실로 돌아가는 내내 정훈은 여보운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소연은 “재벌이라니 관심이 가?” 따위의 장난스러운 말로 일관하다 곧 제가 아는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1반이라고 했다. “걘 무조건 뭐든지 항상 앞이야. 입학식에선 공연도 했어.” 소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질린다는 듯 말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감추기 힘든 들뜸이 묻어났다. 정훈이 파편화된 이야기에서 잡아낸 건 하나였다. 어쩌면 아침의 그 애가 여보운일 수도 있다는 직감. 소연이 말하는 여보운을 들으면 자꾸만 횡단보도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 각이 잘 잡히도록 다려진 하복 셔츠와 푸른 깃이나, 새까만 머리칼이 퐁실거리며 흐트러지던 것, 그러면서도 올곧던 걸음, 옆으로 흔들거리던 이어폰 줄…… ……. 정훈은 이런 방향으로 직감이 좋았다. 귀 뒤쪽에서 낮게 둥둥 울리는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이후 수업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마음이 들떴다.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에 걸쳐 1반을 기웃거려보았으나 여보운으로 보이는 인물을 찾을 순 없었다. 대신 계속해서 밀려드는 새로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번호를 주고받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는 말았다. 하굣길에서야 들은 말이지만 여보운은 방학을 앞두고 오후 수업을 전부 빠진다고 했다. 그럴 수가 있나? 정훈이 반문했지만, 소연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대하듯 키득거렸다. “걔, 음악 천재잖아.” 세상에는 많은 부조리가 있다. 정훈은 한 번도 그에 대해 반발을 가진 적 없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고, 높은 삶이 있으면 비탈의 삶도 있는 법이다. 정훈은 빈말로라도 아주 상위 계층에 있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그에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여보운은 달랐다. 그를 묘사하는 말만 모아놓고 본다면 감히 넘볼 수도 없이 고아한 위치에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세상 다 가졌네.” 소연과 갈라지는 길목에서 정훈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내뱉고 나니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어딘가 답답했다. 그러면서도 여보운이 무척 가깝게 여겨졌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랬다.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도,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상대에게 가지기엔 지나치게 나아간 감정이었으나……. “뭐 어때.” 여전히 정훈은 낙천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생명의 은인인데 이 정도가 과한가?” 두 번째 아침도 다를 바 없었다. 정적 이후의 짧은 햇볕, 그리고 등굣길. 정훈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길을 유심히 살폈지만 전날과 같은 차라거나 여보운처럼 보이는 이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웃거나, 어딘가 구겨진 셔츠를 입은 채였다. 평소 같은 옷을 입으면 한 무리로만 보이던 사람들을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꼽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묘한 마음으로 학교에 도착하면, 다시금 왁자한 아이들의 웃음과 인사가 이어지고, 종소리와 함께 공상으로 미끄러진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훈이 창밖을 내다보며 떠올린 이가 벌써 윤곽이 흐릿해진 여보운, 실제로 그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한 대상이었다는 점이었다. 1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정훈은 교실을 빠져나갔다. 어딜 가냐는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긴 다리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1반은 정훈의 반보다 한 층 아래에 있었고, 어제도 몇 번이나 오갔기에 아래로 난 계단의 수까지 외웠을 지경이었다. 1반 뒷문을 열고 팔을 걸친 정훈이 교실 안을 넓게 훑었다. 각자 할 일에 한창이던 눈 몇 쌍이 정훈을 향했다. 헉 대박, 8반 전학생이잖아, 말 걸어 볼까? 머리 색 진짜 예쁘다……. 낮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혹시 여기 여보운 있어?” 매끄럽게 뱉어진 목소리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던 검은 머리통이 고개를 돌렸다. “…… …….” 노오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정훈을 향했다. 길게 기른 앞머리가 흐트러지며 보다 선명한 시선이 드러났다. “졸라… 뭐야?” 살며시 찌푸려지는 미간과 흰 뺨, 비틀린 입매……. 정훈은 교문에 기대듯 걸친 팔을 움찔거렸다. 무슨 일이냐며 드문드문 들려오던 목소리가 단숨에 멀어지고, 그는 돌아본 이를 향해 전진했다. 확실했다. 횡단보도에서 정훈의 가방을 잡았던 이……. 정훈은 뒤로 훅 당겨지는 아찔한 느낌을 반추하며 보운의 자리까지 다가가 상체를 숙였다. “어제 나 도와줬잖아.” 정훈이 보운과 눈을 마주쳤다. 그를 올려다보는 눈매는 유순하게 처져 있었지만, 새초롬한 눈동자는 날카로운 빛이었다. “근데? 기억 안 나.” 보운의 목소리에 짜증이 듬뿍 묻어났다. “어…….” 이건 완전히 정훈의 예상 밖이었다. 정훈은 보운이 조금 재수 없기는 해도 대화를 거절할 이라고 상상한 적은 없었다. 냉담한 뺨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정훈에게 이렇게까지 벽을 세우는 이는 흔하지 않았다. 애초에 보운은 정훈의 존재에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정훈의 정적을 일깨우는 사건을 일으켜놓고 지나치게 무감한 얼굴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별것 아냐. 난 어제 전학왔어, 너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다. 그래? 정말 다행이네. 그럼 우리 친구할래? 그러지 뭐…… ……. 대충 상상했던 대화의 흐름에서 완전히 이탈한 상황에 서 있자니 막막함이 피어났다. 정훈은 뺨을 검지로 긁적이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보운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돌리더니 하고 있던 책상 정리로 관심을 완전히 돌려버렸다. 희고 길쭉길쭉한 손가락이 책의 키를 맞추곤 책상 밑으로 집어넣는 행동이 여유로우면서도 우아했다. 음악을 한다더니 과연, 하지 않으면 억울할 정도로 멋진 손이었다. 정훈과 보운의 심상찮은 분위기 탓인지 반 아이들도 쉽사리 그들 근처로 다가오질 못했다. 굳어 서 있던 정훈이 정신을 차린 건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 덕이었다. “안 가?” 종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보운이 매서운 투로 쏘아붙였다. “에, 어?” 정훈이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가야지……?” 이렇게까지 얼빠진 태도를 보인 게 얼마 만이던가. 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1반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딱딱하고 날카로운 말투는 과연 소연이 묘사한 보운과 흡사했다. 하지만 정훈은 그것이 내키지 않았다. 보운의 힘이 주었던 감각이 좋았고, 그것에 몰두하고 싶었다. 누군가 듣는다면 이상한 일이라고 만류할 게 빤했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보운이 어떤 사람이건 보운과 가까워지고 싶었고 섞이고 싶었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부유물의 삶을 영위하던 십 대 후반에 벼락처럼 내려온 계시였다. 유야무야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있었으나, 정훈은 적극적인 행동을 다짐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게 정훈이 그의 부모에게 배운 지혜 중 하나였으므로. 그날 이후로 정훈은 매일 같이 보운을 찾았다. 1반 아이들이 정훈에게 타박 섞인 농담을 건넬 정도로 그랬다. 내 이름은 연정훈이고, 너랑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왜냐면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거든. 영화 같은 순간이 있었다니까. 안 그러냐? 솔직히 너 그때 존나 멋있었는데? 정훈이 쉬지도 않고 주절거릴 때 보운의 표정은 그야말로 봐줄 만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은 보운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그 반응이 퍽 재밌었다.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어도 도통 질리질 않았다. 정훈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관계의 방향성을 구태여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어떠한 진전만은 확실히 바라고 있었다. 대개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놀랍다는 평을 내었으나, 그렇지 않은 이도 분명히 존재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소연의 볼멘소리에도 정훈은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이미 보운은 정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다가, 사건이 연속되자 참을 수 없어진 모양인지 짜증스러운 대답을 몇 마디인가 내뱉기도 하고, 종래에는 정훈과 눈을 마주치며 몇 가지 대화를 나누는 데까지 도달한 참이었다. “도대체 왜 이래? 미친 새끼 같이…….” 보운이 투덜거리면 정훈은 웃었다. “좋아서 그런다니까? 어? 너 친구도 없잖냐.” 정훈의 말에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보운을 보는 일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보운이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보운이 재벌가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고상한 음악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눈이 높고 깍쟁이처럼 굴기 때문이 아니라……. 보운의 입장에서도 그런 침투가 영 싫었던 건 아니리라. 정훈은 짐작했다. 보운의 성격에 정훈이 정말로 경우 없는 짓을 하는 것이라면 당장에 내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운은 그러기는커녕 점차 정훈에게 내어주는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워낙에 관심을 많이 받는 둘이어서인지 정훈의 일방적인 접근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문이 팽배해진 덕도 없잖아 있는 듯했다. 정훈에게는 마냥 좋은 일일 뿐이다. 그는 진심으로 등교가 즐거워지기 시작하는 순간에 서 있었다. 보운의 짜증으로 뒤덮인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고, 그의 옆에서 음표의 대가리를 검지로 툭툭 건드리며 얼마 없는 식견을 내보이는 일도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정훈의 말 사이사이에서 보운이 놀라울 정도로 번뜩임을 잘 잡아낸단 사실이었다. “해석을 할 줄 아네.” 처음은 비아냥이었다. 보운의 유선 이어폰에 관심을 보이던 정훈이 끝끝내 한쪽을 나누어 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 순간이었다. 제 물건에 손 대는 일을 극도로 꺼리던 보운이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선뜻, 고개를 까닥거렸다. 물론 한쪽 눈을 찡그린 채였지만 정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옥상으로 이어지는, 인적이 드물고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계단에 앉아 있었다. 보운이 앉은 자리는 정훈이 특별히 먼지를 털어내기까지 하고, 제 체육복 상의를 깔아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보운이 따라오지 않았을 테니까. 정훈은 그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운의 이어폰은 말 그대로 비싼 값을 했다. 정훈이 쓰는 무선 이어폰도 음질이라거나 가격이 어디서 뒤처지는 제품은 절대로 아니었는데, 보운의 것은 급이 다르다는 말 외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와.” 귓속을 파고드는 저음과 섬세한 소리의 결에 정훈이 눈을 빠르게 씀벅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있는 사람이, 막, 이런 기분이려나?” 제가 느끼는 것을 되는대로 주절거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 모습을 보고 보운이 한 말이 그랬다. 웃음과 찌푸림 사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해석을 할 줄 안다고. 정훈은 쉽게 으쓱해졌다. 둥둥거리는 피아노의 낮은음을 따라 심장이 뛰었다. 나란히 앉아 있자니 어깨가 자꾸만 스쳐서인 것 같았다. 보운은 멍하니 정면에 난 창문을 바라보며, 허벅다리 위에 얹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음을 헤아리고 짚어내는 움직임이었다. 새파란 하늘에 잘게 찢어져 흩어진 구름이 흘러갔다. 구름의 이동속도와 햇빛의 각도, 음악이 나아가는 박자까지 무엇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었음에도 불편한 게 하나 없었다. 정훈은 막연히 소리로 가득한 이 순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곤 했다. 고개를 살짝만 틀어도 보운의 옆얼굴이 보였다. 빛이 번져 섬세하게 빛나는 속눈썹과 코끝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 순간이 몇 번이고 있었다. 보운은 그 첫 비아냥을 기점으로 정훈에게 꽤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먼저 건네는 법은 없었지만, 정훈이 다가가면 반드시 그 값을 냈다. 그중 한 예가 구교사의 음악실이었다. 교과 과목의 비중이 커지면서 음악실의 존재는 자연히 잊히기 마련이었다. 아이들은 구태여 그곳을 찾지 않았고, 구교사의 으슥함이 그에 한 몫을 더했다. 그런 곳을 보운은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이따금 오후 레슨이 없는 날에도 눈치껏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정훈은 그의 기지에 발을 들인 첫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워했다. 여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정훈과 보운은 음악실에서 자주 만났다. 정확하게는 보운이 그곳에 있으면, 정훈이 찾아오는 식이었다. 보운은 매번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정훈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 줘봐야 벽만 두꺼워질 뿐이라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으로 몸에 익힌 바 있었다. “그 키 큰 여자애가 너 찾던데.” 그래서 들어서자마자 보운이 툭 내뱉은 말에도 정훈은 흔들리지 않았다. “집에 매일 같이 가니까.” 정훈이 피아노 옆으로 부드럽게 기댔다. 검은 그랜드피아노는 손으로 쓸어보면 매끄럽고 따뜻했다. 이런 학교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물건이었다. 아마 보운의 입김이 있었으리라. 정훈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연에까지 생각이 닿자, 그녀가 말했던 입학 공연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워지기도 했다. 보운은 지금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니 어쩌면 한숨과 같은 웃음을 어정쩡하게 머금으며 강당 무대에 올랐을 것이다. 제 또래의 아이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전혀 다른 호흡과 박자로 행동했겠지. 역시 아쉽다. “너 이 새끼… 이러는 거 졸라, 이상한 거 알지?” 보운이 짜증스레 중얼거림으로 상상은 끊어졌다. “뭐가? 다른 놈들은 잘생겼다고만 하던데. 이상한 건 너 아니냐?” 정훈이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그는 피아노 의자 귀퉁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보운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걸 요령 좋게 피한 보운이 처진 눈을 치떴다. “죽고 싶어?” 분명한 위협의 말이었지만, 한편으로, 정훈은 그것이 저를 편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았다. 보운은 거의 모두에게 평등한 무관심을 내뿜었다.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가시 돋친 말을 하는 것도 안정에서 오는 행동이라는 게 정훈의 결론이었다. 물론 보운이 듣는다면 뭐가 날아올지 모를 일이었지만. “뭐가 이상한데, 여보운.” 여보, 에 강세를 주었다가 느슨히 운, 하는 발음이 따라붙는다. 보운이 화를 내기 전에 능청스럽게 문장을 마무리한 정훈이 다시금 팔을 뻗었다. 이번엔 보운 쪽이 아니라 건반을 향해서였다. 이어지지 않는 음 몇 개가 뚱땅거리며 튄다. 보운은 찝찝한 기색으로 정훈을 힐끗거렸다.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들은 어쩌고 왜 맨날 여기서 이러느냔 말이야?” 흥분한 것이 역력하게도 보운의 목소리가 살짝 뒤틀렸다. 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야……. 그조차도 대답을 모르는 질문인 탓이었다. 정훈이 묵묵하게 건반을 두들기자 보운이 어금니가 꽉 맞물리도록 턱에 힘을 주었다. 정말로 이상하다. 정훈과 함께 있노라면 휘말리는 기분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화를 내고 펄펄 뛰어도 정훈은 잘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이따금 선을 넘는 발언에 한쪽 눈을 찌푸리는 정도였지, 보운을 강하게 압박해오거나 훌쩍 떠나는 법이 없었다. 보운은 그의 이상행동이 어려웠다. 보통 보운에게 다가오려던 사람들은 목적성을 강하게 쥐고 있었다. 보운의 삶에는 소리가 너무 많았다. 보운아, 여보운, 여보, 보운아……. 끊임없이 저를 불러대는 목소리에 호명하지 않는 방법은 단 두 가지였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날을 세우는 것. 제게 무어라도 거저 얻기 위해 알랑거리는 입을 닫게 만들 수만 있다면, 어떤 평이 내려져도 좋았다. 거북함을 안고 실실거리는 것보다야 손해도 보지 않으면서 압도적으로 어려운 대상이 되는 쪽이 훨씬 나았다. 그들에 둘러싸이지 않으려면 음악으로의 도피뿐이다. 이어폰을 고집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귀에 무언갈 꽂고 있다는 표가 난다면 적어도 고의로 귀찮게 굴지는 않으니까. 정훈만이 그 예외였다. 자꾸만 비집고 들어와 무언가를 세우려고 한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조차 없다. 보운은 제가 서 있는 위치가 위치인 만큼 궁색의 냄새를 잘 맡았다. 정훈에게선 비릿하고 매캐한 그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보운의 뒤가 아니라 보운 그 자체를 헤집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음악에는 언제나 명쾌한 답이 있다.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든, 재단된 장면이든. 그러나 정훈에겐 답이 없었다. 보운에겐 그의 그런 점이 연주 도중 갑자기 시작되는 정적처럼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손을 움직일 수 없어지는 때의 느낌이…… 정훈과 함께할 때면 자주 다가왔다. 이제는 기억조차 아득할 정도의 옛일이었지만, 보운은 아직도 몸서리칠 정도로 역겨움을 느꼈다. 모두가 보운 하나만을 주목하면서, 웅성거리는 것조차 제한당한 채로, 눈짓만을 주고받는 그 순간…… ……. 그런 정적 속에서 보운은 터질 듯한 심장 소리를 들었다. 눈앞이 희게 번지고 손이 떨렸다. 건반을 눌러야 하는데 흰 것인지, 검은 것인지, 또 어느 옥타브의 어떤 음이었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명색이 여씨 가문의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장남, 여보운이……. 그게 보운이 기억하는 한 입상하지 못한 유일한 콩쿨이었다. 정훈을 볼 때마다 그런 감각이 되살아난다는 건 유쾌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소음의 폭풍 안도 싫었지만, 그 한가운데의 풍속이 느껴지지 않는 적막도 싫었다. 보운이 이런 심란함을 느끼거나 말거나 정훈이 제 행동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특히 최악이었다. 그를 제대로 밀어낼 수가 없었다. 밀린 만큼 앞으로 훅훅 다가오는 통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얼굴이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색이 옅은 낯 전반에 사르르 내려앉은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무의식중에 그에게 긍정적이고 인간적인 호감을 떠올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 말도 안 돼. 보운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여전히 음을 뚱땅거리던 정훈이 흠칫 놀라며 보운을 바라보았다. “그만해.” 정훈의 손등을 가볍게 때린 보운이 혀를 차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 맞다.” 그런 보운을 목소리로 잡아 챈 정훈이 눈을 맞춰 온다. “이번엔 너희 집 가 봐도 되냐?” 영역이 넓어지고 있었다. 보운은 등으로 주르륵 흐르는 땀을 느꼈다. 안 돼,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또다시 주도권을 빼앗긴다. 적막이 귀를 꽉 채우고 들어온다. 손가락을 더 움직일 수가 없다. 흰 건반인가, 검은 건반인가, 선택해야 하지만 불가하다. 정훈은 마치 그걸 전부 파헤친 사람처럼 씩 웃었다. “좆 까.” 보운이 그 낯에 대고 할 수 있는 말이란 대개 한정적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언젠가 다시 전학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던 정훈은 일 년을 꼬박 등교했다. 빠지는 날도 없이 하루하루를 성실히 채워 나가며 보운과의 관계에 열을 올렸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여름이 찾아왔을 때, 소연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단 식으로 웃었고, 정훈은 그녀에게 나중을 기약했다.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질 수는 없음을 또렷하게 내뱉자 마음이 이상했다. 한 번도 다가오는 이를 강하게 내친 적 없는 정훈이었기에 특히 그랬다. “네가 친구에 더 마음 쓰는 사람이라는 거 알아.” 소연은 애써 서운하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시작조차 못 해본 건 좀 황당하긴 한데…….” 그녀가 타박하듯 정훈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나도 차이는 건 처음이라서. 축하한다?” 정훈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와 교제할 수도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하교를 함께하는 마당에 찢어지는 쪽이 훨씬 새삼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소연의 입에서 사귀자, 라거나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라는 결론이 내려졌을 땐, 눈앞이 일순 새까맣게 죽었다가 돌아왔다. 정수리를 쪼갤 것처럼 내리쬐는 태양 빛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뒷덜미로도 팔이 접히는 안쪽으로도 땀이 끈끈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건 조금 결이 달랐다. 정적이 없었다. 소연은 어떤 준비 과정도 없이 냅다 도약해 정훈을 건드리고자 했다. 그녀가 내내 보내왔던 신호를 무시한 벌을 받는 셈이었다. 정훈은 사과하지 않았다. 소연의 마음을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미움을 사고 싶은 건 아니었다. 또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를 거절할 남자는, 더 이상 없으리라. 소연이 돌아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정훈은 뒷머리에 두 손을 교차해 가져다 댔다. 무심코 올려다본 새파란 하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보운과 부평에 들러 음반을 몇 장 사겠노라 약속한 바가 있었고, 그러니 꿉꿉한 기분을 오래 끌고 갈 이유가 없었다. 정훈은 소연과의 일을 보운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보운에게 사소한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쏟아내며 그의 반응을 살피던 지난날과는 조금 궤가 달랐다.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속이 조금 불편했다. 보운의 눈동자, 늦은 오후의 빛이 고이면 놀라운 색으로 반짝거리는 그 눈동자를 오래 보는 것도 어려웠다. “야, 너 뭐 훔쳐 갔냐?” 보운이 가방을 고쳐 매며 물었다. “왜 난리야? 존나….” 그는 영 초조하게만 보이는 정훈의 행동이 황당하다는 뜻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뭐.” 정훈이 낮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공기는 후텁지근했고, 시내로 뻗은 길목은 요란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그런 와중 정훈은 어딘가 얼이 빠진 채였다. 눈치를 보질 않나, 다른 데 신경이 팔려있질 않나……. 정훈과의 약속 때문에 대기 중이었던 차까지 물린 보운으로선 짜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운이 하복 셔츠의 깃을 잡아 펄럭거리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말을 해, 존나……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씨근덕거리는 숨이 많이 섞인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정훈은 순간 억울함을 느꼈다. 저조차도 다 헤아리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는데, 보운은 늘 한결같이 정훈의 탓으로 모든 문제의 해답을 돌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보운과 전혀 관계없는 상황에서까지 그랬다. 보운은 늘 자신이 수세에 몰린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나 고백받았거든, 오늘.” 정훈이 홧김에 내뱉었다. 정말로, 단언컨대, 보운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기분이지? 정훈이 뜨끈하고 습윤한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꾹꾹 눌러 짚었다. 정적이 흘렀다. 보운은 입을 다문 채 가방끈을 꾹 쥐고 정면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교차로였고, 차가 많이 오갔다. 보운이 처음 정훈의 가방을 잡아 저지한 바로 그곳이었다. 사고를 막은 날,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오갔던 그 공간. 정훈은 손가락 틈을 벌려 보운을 바라보았다. 보운의 뺨에 희미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래서?” 한참의 정적 끝에 보운이 말했다. 그러자 이어폰을 빼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금 도로의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정훈은 턱 막히는 숨을 억지로 쪼개어 뱉어냈다. “그냥 그랬다고.” 처음보다 확연히 작아진 목소리로 정훈이 대꾸했다. 보운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치기 어린 마음에 뱉기는 했으나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정훈은 인터넷에서 읽은 졸작 감독의 특징 따위를 떠올렸다.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레코드 가게에서의 시간은 시시했다. 적어도 사귀기로 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정도는 물을 줄 알았건만, 보운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담긴 음반 몇 개를 골라 담았다. 정훈으로서는 읽는 법도 생소한 음악가들의 긴 이름이 찍혀 있었다. 평소라면 발음을 배배 꼬며 장난이라도 쳤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쩐지 도서관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가게를 이리저리 의미 없이 누비기만 하던 정훈이 슬그머니 보운의 옆으로 돌아왔다. 보운은 사뭇 진지한 시선으로 음반의 트랙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정훈은 그 옆에서 영화 OST를 의미 없이 뒤적거리다가, 결국엔 빈손으로 가게를 나서게 되었다. 못할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지. 정훈은 끊임없이 생각했으나, 그게 이 미묘한 기류의 해답이 되지는 못했다. 심지어 보운조차도 불편함을 느끼는 부위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막연히 아주 가늘고 작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사람처럼 입매를 실룩거리기만 하는 것을 보니 꼭 그랬다. 그래서 정훈으로서도 평소처럼 보운에게 들러붙을 수 없었다. 그들은 교차로에서 헤어졌다. 보운을 기다리던 세단이 그를 태우고 빠르게 사라졌다. 정훈은 그 뒤꽁무니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한숨을 푹 뱉으며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종종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대개 정훈의 주도였다. 그야 얼굴로 이미 교내에서 유명 인사가 된 몸이었으므로, 그런 쪽의 이야기를 거리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종종 과시하기도 했다. 어쩐지 관계에는 지나치리만큼 담백한 보운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보운은 매번 “관심 없거든?” 같은 새치름한 말로 일갈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정훈은 과연 보운의 마음에 차는 여자가 어떤 생김새를 가져야 하는지, 어떤 집안이 받쳐줘야 하는지를 떠올려 보고는 했다. 끝은 항상 입이 찝찝했다. “난 너한테 들러붙느라 다들 잘생겼다고 하면서도 도통 사귀자고는 안 한단 말이야. 아오, 또, 또. 눈 치뜨는 거 봐라.” 마른 입맛을 다시며 정훈이 말하면, 보운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왜 내 탓이야? 존나… 아 그럼, 저리 꺼져!” 그때, 무언가 옮겨붙어 왔었나? 조금씩 세워지고 있는 것이…… 있었던가? 정훈은 가방을 내려두고 땀에 젖은 몸을 미지근한 물로 씻으면서도 줄곧 생각했다. 한여름 부평 시내를 돌아다닌 몸은 피곤에 절어 있었다. 그답지 않게 보운 쪽으로 잔뜩 곤두세웠던 신경 때문일는지도 몰랐다. 젖은 몸을 대충 닦아낸 정훈이 침대 위로 무너지듯 누웠다. 보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들기 전 이야기라도 나누어 볼까 했던 계획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메신저도 묵묵부답이었다. 기실 그렇게까지 행동할 이유가 있나? 정훈은 불을 꺼 새까맣게 죽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요즘엔 꽤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여보운 집에도 자주 들르고, 개랑도 친해지고, 부평까지 같이 다녀올 사이면……. 그래도 친구라고 부를 만한 거 아닌가? 내가 오늘 좀 이상하게 굴긴 했지만, 그건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본인도 아리송한 기색이었으면서. 참…… ……. 정훈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갔다. 눅눅한 더위가 막 씻고 나온 몸을 다시금 훑으며 잠을 향해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그곳은, 그러니까, 음악실이었다. 보운은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정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창문이 열려 반투명한 흰 커튼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강렬한 뙤약볕이 바닥에 밝은 점을 찍어내는 와중, 정훈은 보운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침대 위였다. 정훈은 어리둥절했다. 보운이 그의 옆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보운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던 적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그럴 상대도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나 보운은 가만히 누워 눈을 감은 채 규칙적으로 호흡했다. 보운의 가슴팍이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운이 너무 선명했다. 정훈은 홀린 것처럼 손을 뻗었다. 건반을 두드리던 힘으로 보운의 어깨를 건드리자, 보운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정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단정하게 다물린 보운의 입술은 어두운 와중에도 발간빛이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멍한 보운의 눈빛이 이상했다. 가슴이 간질거린다고나 할까. 정훈은 제가 왜 이러는지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 이전에, 손을 옮겨 보운의 뺨을 쓰다듬었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둔했다. 그런데 감각은 전혀 딴판이었다. 지금 보운이 명확하게 보이는 만큼 그에 대한 감각 또한 또렷했다.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거리고, 그 움직임을 향해 보운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정훈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고요가 너무 길었다. 입을 뻐끔거리는데 보운이 상체를 일으켰다. 하복 셔츠가 흘러내리며 보운의 어깨를 드러냈다. 확실한 상아색이었다. 그랜드피아노의 흰 건반과 꼭 같은 그런 색. 정훈이 어떤 반응을 내보이기도 전에 보운이 앞섰다. 그는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정훈의 허벅다리를 찾아 올랐다. 가뿐한 움직임에 정훈이 숨을 크게 삼켰다. 허벅지에 얹어진 보운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빛이 허벅지를 적실 때처럼 따뜻하고 투명했다. 정훈은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흐르는 음악처럼 꼭 맞물려 돌아갔다. 보운은 흘러내린 셔츠를 그대로 벗어 몸을 드러냈다. 희게 반짝이는 살결을 더 보고 싶었는데, 예의 그 노란 눈동자가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몸이 떨렸다. 배 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훈은 그만 보운의 어깨를 잡아 뒤로 눕히고자 하는 욕망을 거두지 못했다. 두 몸이 침대 위로 쓰러지는 데에도 적막이 유구했다. 정훈은 보운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보운의 순순함이 좋았다. 입술은 달았고, 뜨거웠고, 젖어 있었다. 입안을 파고드는 혓바닥이 어찌나 버르장머리 없이 움직이는지 보운의 몸이 퍼르르 떨려왔다. 정훈은 그의 입안을 마구잡이로 들쑤시며 허기를 채웠다. 침대 시트에 비벼지는 몸을 잡아 누르며 남은 옷가지를 벗겨 나갔다. 보운은 조금의 반항도 없이 정훈의 모든 행동을 감내했다. 경험이 없을 텐데도. 정훈의 손이 보운의 다리 사이를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손바닥에 닿아 왔다. 훅훅 터지는 더운 숨을 그대로 받아 삼키며, 보운이 어깨를 떨었다. 질척한 액체가 방울져 떨어지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정훈은 집착적으로 보운의 입술을 삼키며 제 성기와 그의 것을 바짝 맞붙였다. 단단하게 굳어진 두 성기가 마찰할 때 순간적으로 눈앞에 폭력적인 흰빛이 튀어 올랐다. 목에 힘을 주며 숨을 몰아쉬어도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보운의 입이 열리는 일도 없었다. 정훈은 손바닥 안에 맞댄 성기 두 개를 잡아 비비며 눈에 힘을 주었다. 조금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거대하게 몸을 부풀렸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저를 올려다보는 보운의 뺨이 붉었다. 입을 다문 채 젖은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 절정이 곧, 곧……. “…… …….” 정훈은 눈을 떴다. 서늘함과 축축함, 그리고 찝찝함이 느껴졌다. 서걱거리는 얇은 이불 아래 하반신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랫배에 응어리진 흥분이 여전했다. 더듬더듬 어둠 속을 눈으로 짚어 보아도 무엇 하나 잡히는 게 없었다. 손을 내려 아랫배와 다리 사이를 쓸면 축축하고 미끈한 액체가 느껴졌다. “아…….” 가느다란 소성이 터졌다. 귀에 쿡 박혀 들어왔다. 꿈이었구나. 그렇게 넘어가기 어려운 구석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상대가 보운이지 않은가. 껄끄러운 오후를 보내고 돌아와 한다는 일이, 친구 얼굴을 보면서 몽정……? 정훈은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흘렸다. 아래가 아렸다. 해소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순간에도, 정훈은 비극적으로 낙천적이었다. “이왕 고분고분할 거면 끝까지 가지…….” 깨끗한 손을 들어 제 눈 위를 덮은 정훈이 웅얼거렸다. 보운을 두고 몹쓸 짓을 했다는 감상보다는, 제가 겪은 어떤 순간보다도 짜릿했다는 사실이 훨씬 큰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미치겠네.” 정훈의 목소리가 먹먹한 어둠에 먹혀 들어갔다. 몽정은 다시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딱 그날 한 번이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정훈은 미칠 노릇이었다. 어떤 경계만 넘어가면 환상적이고 끝내주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듯한데, 그 정적을 매달고 도약할 수 있을 듯한데, 그런 찬스가 도무지 오질 않았다. 그날 이후로 보운의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는 것도 조바심의 한 축을 담당했다. 보운은 자신이 지나치게 냉담했다고 생각했는지, 정훈에게 보다 너그러워졌다. 정훈이 일부러 그 밤의 열기로부터 떨어진 파편을 느끼기 위해 보운의 어깨에 팔을 둘러도, 허리를 더듬어도, 심지어는 목덜미에 코를 파묻어도 인내했다. 그 여보운이! 그러니까 더 괘씸했다는 말이다. 정훈은 제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충동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나,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한여름의 온도가 문제일는지도 몰랐다. 몽정 이후로 정훈은 보운을 바라볼 때 머릿속이 팽팽 돈다는 게 뭔지를 직접 경험하곤 했다. “열사병이라도 걸린 거 아냐?” 정훈이 도통 맥을 추리지 못하자 보다 못한 보운이 툭 내뱉었다. 그게 정훈에겐 마치 끊어진 현처럼 다가왔다. 반사적인 힘으로 허공에 흩날린 현이 가슴을 날카롭게 긋고 지나간 것이다. 정훈이 눈을 부릅떴다. “사실, 씹…… 뭐랄까. 좀 그런 일이 있었거든?” 천천히 열리는 문장의 빛에 놀라 달아나지 않도록, 정훈은 보운의 팔을 느슨하게 붙잡았다. “너랑 같이 딸 치는 꿈꾼 뒤로 더위 먹은 거 같긴 해.” 열기로 지글거리는 목소리가 잇새로 줄줄 흘러내렸다. 보운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뭘 쳐? 미친 새끼야?” 음성 끝이 파르르 떨렸다. 모욕적이라고 느껴야 하는 일에 멍청하게 되묻고 있는 꼴이라니, 납득가질 않았다. 이게 도대체 뭐지? 말을 막 끝맺은 정훈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으면서도, 아주 흡족한 빛이었다. “…… …….” 보운은 대답 대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돌았구나…… 돌았어.” 낯이 무척 뜨거웠다. 정훈의 입가에 싱글거리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왕왕 벌어진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보운으로선 이해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한창때 남자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선 음담패설이 툭툭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몇 번은 보운의 눈치를 보며 말을 삼가던 놈들도 보운이 아예 이어폰을 꽂고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점점 노골적인 언사를 사용하곤 했는데, 개중에 분명히 정훈이 말한 상황도 끼어 있었다. 노래를 더 크게 틀 걸 그랬지. 보운이 숨을 푹 내뱉으며 악보를 펼쳤다. “좆 같은 말 그만하고 방해할 거면 꺼지랬어 내가.” 애써 침착한 척을 하고 말을 끝맺었지만, 몸의 미약한 떨림까지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정훈은 늘 그랬다. 보운을 골탕 먹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도 되는 양 굴었다. 갑자기 고백이라느니 하는 말로 기분을 잡치게 하더니 오늘은…… ……. 물론 그가 고백받은 것과 보운의 처지는 조금도 관련이 없었다지만, 눈치를 살살 보며 어떤 반응이라도 하길 기다리는 듯 보이는 낯짝이 얄밉기 그지없었지. 보운은 결국 계속해서 웃어대는 정훈을 두고 음악실을 빠져나오면서도, 레슨 중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엉망인 기분을 안고 있어야만 했다. 정훈의 평소 행실을 떠올려 보면 그의 폭탄 발언은 보운의 기분을 나쁘게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어떤 해소에 가까웠을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보운을 견딜 수 없게 했다. 하여간 이상한 놈. 보운은 그렇게 치부하려 애썼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정이나 키스도 못 해본 놈, 혹은 딸이라는 말만 들어도 벼락 맞은 것처럼 몸을 떨어대는 놈이라는 이죽거림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 내일이고 언제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주하는 것이다. 보운은 그렇게 다짐했다. 넓은 방에 유난히 쪼그라든 몸을 가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덜컥 드는 밤이었지만, 침대 위에서 몸을 말고 누워 눈을 꾹 감기까지 했다. 아침이 오면 이 불쾌감이 전부 씻겨져 있기를 바라면서. “하아…… 개자식.” 중얼거림의 끝이 흐릿하게 번졌다. 쾌적하기 그지없는, 무풍 에어컨이 갠 고운 공기의 입자가 뺨을 쓰다듬었다. 서늘함에 어깨를 떨면 점차 몸이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분명한 잠의 파도가 보운의 몸을 조금씩 적셨다. 한창 열을 올리며 잠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기분이 무척 좋았다. 사락거리며 천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마침내 완전한 진공과 무음의 상태로 빠져들었을 때, 보운은 타의에 의해 눈을 떴다. 세상이 온통 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입이 축축하고 뜨거운 것으로 막혀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이게 뭐지? 판단을 끝마치기도 전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제 앞의 얼굴을 빨아들였다. “…… …….” 정훈이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집중하는 표정을 지은 정훈. 그가 지나치게 가까웠는데, 보운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입술과 제 것이 맞물려 있음을 깨달았다. 혀가 빨리고 입안의 점막이 문질러진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엉덩이에 닿는 뜨겁고 묵직한 압박감이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가로막듯, 정훈의 손이 보운의 허리며 등을 쓰다듬고 문질렀다. 이런 것을 허락한 적 없었다. 애초에 나는 지금 자고 있었는데…… ……. 보운이 허리를 살짝 비틀자, 정훈이 눈을 살짝 휘었다. 흰 뺨이 홍조로 물들고, 애틋한 색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어둠 속이었는데도 그런 것이 너무 잘 보였다. 정훈이 보운의 몸을 밀어 눕힌 것은 순식간이었다. 우윽, 하는 소리를 낸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들리질 않았다. 뜨거운 정훈의 손이 몸 곳곳에서 느껴졌다. 바지가 벗겨진 뒤의 서늘함도 잠시, 곧 위로 얹어지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보운은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정훈의 손이 주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반론이 고개를 들고자 하면, 어김없이 정훈의 손은 예민한 부위를 파고들었다. 성기가 쥐어 잡힌다. 눈앞이 어찔하게 멀었다가 돌아왔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손을 탄 적이 없는 곳이었다. 정훈은 요령 좋게 너른 손바닥으로 기둥을 문지르며 쓸어주는가 싶더니, 곧 하체끼리를 바짝 맞붙였다. 정훈의 뜨거운 숨이 귓가에 닿았다. 시선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입을 벌려도 숨만이 터져 나오고,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보운의 몸을 짚어 누른 정훈이 손아귀 안으로 두 개의 성기를 잡아 쥐었다. 미끄덩거리는 귀두끼리가 마찰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을 만들었다. 보운의 허리가 살짝 들리자, 그 힘에 자신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정훈의 움직임이 보다 집요하고 빨라졌다. 적색 경보가 울렸다. 머릿속에서. 그만, 그만. 보운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발가락 끝이 확 움츠러들었다. 아랫배를 첨예하게 꿰뚫는 날카로운 쾌감이 쉼 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노골적인 쾌감은 처음이었다. 방황하던 팔이 정훈의 머리를 어쩔 수 없이 끌어안았을 때, 눈앞이 희게 번졌다. 보운은 제가 눈을 감고 흐느끼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까…… ……. 보운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정훈이 헐떡이는 움직임이 닿았다. 그의 성기는 아직도 단단했다. 보운이 정액을 울컥울컥 흘리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눈앞에 빛이 퍽퍽 튀는 것만 같은 감각에 보운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쉬고 싶었다. 한 번이면 족하잖아……. 입을 마구 뻐끔거려도, 소리는 들리지……. “왜.” 않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싫었어…?” 정훈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핥으며 올라왔다. 보운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가슴에 내내 파묻혀 있던 정훈이 고개를 들었다. 선명하고 맑은 눈동자가 보운을 잡아챘다. 아, 보운이 숨을 크게 삼켰다. “아닌 것 같은데.” 소리가 너무 뚜렷했다. 이전까지의 정적은 전부 거짓인 것 같았다. 보운이 아랫배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분명히 날 좋아하는 심장 소리가 들린 것 같았거든.” 정훈이 말했다. 그는 음성만큼이나 확실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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