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미뉴에트의 화원
분홍색 장미 나무 아래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2024-08-14
KPC. 티아나 레이라니 · PC. 키에사 벨렌슈필

기나긴 여름도 지나고, 지지부진한 열병도 끝났다.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어언 졸업식을 앞두고 있다.
열아홉의 여름이 시작되는 날. 6월 1일.

머리 위에선 작별이 빛나고, 발아래엔 이별이 고인 어느 밤이었다.

 
 
COC 7th fanmade scenario
 
이미지4
 
2024.8.14
 
 
 
깜빡, 깜빡.
 
눈을 뜨면 완전히 익숙한 천장입니다.
 
당신의 저택, 당신의 방 안, 당신의 침대.
 
긴 시간을 보낸 장소지만, 앞으로 이곳에 올 일은 생기지 않겠죠.
 
오늘은 5월 31일.
 
19살의 봄이 끝나는 날입니다.
 
장미가 피어나는 여름의 시작,
 
6월 1일이면 우리는 졸업식을 치르고 저택을 떠납니다.
 
키에사는 봄과 여름의 경계선에서 깨어나 이별을 직감합니다.
 
10살을 넘긴 람피온이 없다고 했던가요.
 
당신이 저택 밖으로 걸어나간다면, 헛소문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겁니다.
 
키에사야말로 살아있는 증명이기에.
 
고개를 돌리면 펼쳐둔 짐가방이 눈에 들어옵니다.
 
활짝 열린 트렁크에는 양 말 몇 쌍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티아나:가져온 물건은 전부 챙겨갈거야?
 
언제 일어난 걸까요?
 
욕실에서 나온 티아나는 키에사의 가방을 내려다 봅니다.
 
옆에 나란히 놓인 가방은 텅 비어있습니다.
 
티아나의 것입니다.
 
티아나:뭘 담아야 할지 모르겠어.
 
티아나에겐 저택에서 받은 소지품이 전부입니다.
 
세계에 연고가 없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키에사:...나도 뭘 담아야 할지 모르겠어. (나란히 열린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가서 채워 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네 취향에 맞는 것들로...
 
티아나:키에사도? 가져온 것들을 넣으면 되는 거 아니야? (따라서 물끄러미 가방을 본다.) 은근히 고민이 많아.
 
키에사:(네 말대로 고민이 많다...) 하지만 하나같이 오래 쓴 것들이구. 막상 가져가려니까, 정말 내 꺼가 맞나 싶고. (옷가지를 가지런히 접는다.)
 
티아나:그럼~ 내가 키에사의 것을 담을래. (접는 옷가지를 하나하나 제 가방에 담는다.) 취향에 맞는 거.
 
키에사:그걸 가져가서 뭐하게? 쓰던 건데... (빤...)
 
티아나:내가 갖고 싶은데 뭐-? 싫은거야? (빤...)
 
키에사:그냥 궁금한 거야. 설마 내 취향이 네 취향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 (시선을 떼고 책이나 몇 권 주섬주섬 담는다...) ...네 마음대로 해.
 
티아나:내 취향은 키에사인데? 키에사의 취향은 별로..~ (책을 담는 것을 흘겨 보더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더니,)
 
티아나는 키에사의 팔을 잡아당깁니다.
 
티아나:내일 챙기고 이만 잘래~
 
피곤하더라도 슬슬 짐을 챙기지 않으면 늦겠어요.
 
졸업 전에 해야 할 일이 잔뜩 있으니까요.
 
잠시 후 티아나가 묻습니다.
 
티아나:우리도 이제 어른인데.. 키에사는 졸업 후에 뭘 하고 싶어?
 
그 말대로입니다.
 
키에사, 어떤 어른이 되고 싶나요?
 
키에사:음... (네 말에 챙기던 짐가방을 닫고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는다.) 책을 많이 읽어서, 선생님같은 어른이 되고 싶을지도. (9년 간 정성껏 우리를 보살펴준 얼굴을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의문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역시...) 존경하고 있으니까. 티아나는?
 
티아나:(네 옆 얼굴을 빤히 보다 눈을 몇 번 꿈뻑인다.) 선생님 같은 어른..? (이내 천장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나는...
(저택에서의 시간이 온 세상이었던 평생을 곱씹는지 발 끝을 까딱거렸다.)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어른?
 
키에사:흐음~... (너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저택을 나가면, 가장 처음으로 뭘 하고 싶은데?
 
티아나:음~ 키에사 가족들을 만날래. (무심하게 말하며 옆으로 돌아 누워 팔로 머리를 배곤 널 뚫어져라 본다.)
너도 보고 싶지?
 
키에사:딸기 케이크를 먹는다든가, 커피를 마신다든가 하는 걸 생각했는데. (못말린다는 듯 옆으로 돌아누운 네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응, 보고 싶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다) 나를 보고 싶어하실까?
 
티아나:그건 저택에서도 할 수 있는 걸? (머리칼이 만져지자 자연스레 눈을 가늘게 했다 뜬다.) 당연하지! .... 그런거,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키에사를 못보면 보고 싶을 거 같으니까...
 
키에사:밖에서 나가서 먹으면 더 특별할 걸? 맨날 한 개밖에 못 먹는다고 툴툴거렸으면서. 예쁜 옷을 입고, 볕이 좋은 날을 골라 테라스에서 마실 수도 있어. 물론 여기보다 예쁜 장미 정원은 없겠지만... (손에 머리카락을 가볍게 감아보다가 떼어낸다.) ...바보. (입을 꾹 다물고 너를 바라보다) 네가 있어서, 별로 외롭지 않았어.
 
티아나:정말..? 키에사는 거짓말 안 하지? 내가 밖에 나가보지 못한 애라고.. (이따금씩 거짓말을 치던 저택 친구들을 생각하며 이불을 말아 끌어안으며 중얼거린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말 좋다.. 또 말해줘, 계속.
내가 있어서 좋았지? 바보 키에사. (입꼬리가 씰룩이며 웃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보인다.)
 
키에사:내가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니? (부러 뾰족한 어투로 대꾸하며) 웃겨, 자기들도 저택에 갇혀 자랐으면서. 그 긴 시간을...... (어쩌면 그리운 목소리들. 고개를 들어올리곤) 이런 말은 귀하거든? 한 번 할 때 잘 들어. 많이 말하면 진심같지 않단 말이야. (흥)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었을 때였을까요.
 
키에사: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부스럭
 
얇고 빳빳한 재질의 무언가가 옷더미 속에서 구겨집니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종이학입니다.
 
키에사:...? (찌그러진 종이학 꺼내봄...) 이거, 네가 접은 거니?
 
티아나:(고개를 도리도리) 으응.
 
키에사:그럼 어디서 나온 거지...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펼쳐본다...)
 
종이학을 펼쳐보면 익숙한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종이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티아나는 키에사의 손을 잡습니다.
 
장미가 피어 나는 여름의 시작,
 
6월 1일이면 우리는 졸업식을 치르고 저택을 떠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해요.
 
키에사:
정신
기준치: 55/27/11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비록 성인이 된 람피온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요.
 
문득 숨이 막힙니다.
 
고작 하루가 남았을 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불안한 걸까요.
 
짐 정리가 끝나면 점심시간입니다.
 
뻐꾸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지만,
 
식사 시간을 알리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도 먹지 못했죠.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하네요.
 
티아나:(꼬르륵..)
 
키에사:선생님이 웬일로 아무 말이 없으시지? 내려가 볼까?
 
티아나:....! 우리 몰래 먹고 있는거야! (갑자기 벌떡 일어나선 방 밖으로 나간다.)
 
키에사:선생님이 뭐 때문에 그러시냐구... (말리려고 따라 나가며)
 
계단을 내려오면 따듯하고 풍족한 음식의 향이 납니다.
 
식당으로 가보면...
 
부드러워질 때까지 찐 감자,
 
마요네즈와 칠리소스로 버무린 바삭바삭한 새우튀김.
 
가지의 속을 비우고 고기와 채소로 가득 채워 익힌 이름 모를 요리와 리코타 치즈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까지.
 
해산물을 넣고 푹 끓인 수프에서는 바다 냄새가 납니다.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스테이크까지.
 
후식으로 마련된 레몬 세미프레도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먹으라는 메모까지 남겨져 있네요.
 
꿈속 키에사의 집에서 먹었던 것처럼, 근사한 차림입니다.
 
매혹적인 향기에 다른 아이들도 홀린 듯이 주방으로 모여듭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 듯, 굶주린 아이는 먼저 앉아 포크를 들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는 먹지 않을 생각인 듯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티아나:(입을 작게 벌리고는 키에사를 빤히 쳐다본다.)
 
키에사:...먼저 먹는다고 혼내진 않으실 거야. (제 허락을 구하는듯한 모습에 그렇게 대꾸하고는) 마지막 식사자리니까... 함께 하고 싶었는데.
 
티아나:(네 허락에 신난듯이 식탁 앞 고정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어서 같이 먹자.
 
키에사:천천히 먹어. (나이프로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정갈하게 썬다.) 많이 바쁘신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선생님은 오지 않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식은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까요.
 
키에사:
지능
기준치: 65/32/13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러고 보니 요즈음, 선생님이 내내 우울한 표정을 지었던 게 생각나네요.
 
줄어든 말수, 수척하게 야윈 뺨, 어둡게 내려앉은 눈가
 
…….
 
졸업을 앞두고 이별을 준비하기 때문이었을까요?
 
키에사:(이게 빈..둥지 증후군...?)
 
음식은 평소보다 훨씬 화려할 뿐만 아니라 맛도 훌륭하기 짝이 없습니다.
 
음,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요. 최후의 만찬처럼요.
 
혀 위에 오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사르르 녹아내립니다.
 
식사하는 사이, 창밖은 차츰차츰 어두워집니다.
 
비가 올 것인지 하늘이 칙칙하기 짝이 없습니다.
 
봄의 해가 기울고, 여름의 먹구름이 찾아옵니다.
 
키에사가 식사를 마치고 레몬 세미프레도를 입에 넣으면
 
적당히 차고 달고 새콤한 것이 입안을 누비고……
 
 
달그락
 
쨍그랑
 
와장창!
 
식탁 위로 아이들이 쓰러집니다.
 
스푼과 포크, 나이프며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요란합니다.
 
엎어진 수프는 바닥을 붉게 적시며 불길히 퍼져 나갑니다.
 
졸업의 기대감으로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음식에 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하지만, 키에사와 티아나만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키에사:...이게 다 뭐야? (지푸라기 인형처럼 쓰러지는 애들을 당혹스러운 낯으로 마주했다. 허리를 숙여 아이들의 어깨를 차례로 흔들어 본다.) 얘, 얘!
 
티아나:식탁에서 낮잠을 자면 안되지! 선생님한테 혼난다? (위협이라도 하듯 입에 넣었던 포크를 쏙 빼선 테이블을 쾅 친다.)
 
식탁에 쓰러진 아이들과 접시의 음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키에사:(아이들부터 살핀다.)
 
그대로 의자에서 떨어지거나, 음식이 담긴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습니다.
 
19살.
 
퍽 자랐으니 이제 이런 예의 없는 짓은 졸업할 나이가 됐을 텐데요……
 
쓰러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색은 평온하고 숨소리가 고릅니다.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잠에 빠졌을 뿐입니다.
 
음식물이 얼룩덜룩 묻은 뺨과 소매가 더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잠든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죠.
 
키에사:...설마 음식에 뭐가 든 건, (몸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란 것을 확인하자, 이어서 음식을 살펴본다.) 하지만 우리도 먹었는데......
 
티아나:그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식곤증. (멀뚱히 키에사가 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다.)
 
겉보기에는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습니다.
 
냄새를 맡아도 특별히 이상한 구석은 없고요.
 
……아니, 딱 하나 이상한 일이 있긴 했죠.
 
평소라면 아무 자리에나 앉았잖아요.
 
네임 카드 같은 것은 없었는데.
 
음식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었던 걸까요?
 
모두가 잠든 저택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졸업식이 바로 내일인데, 선생님은 대체 무엇을 위 해 이런 짓을 한 걸까요?
 
아니, 다 떠나서, 선생님은 대체 어디에 있죠?
 
뒤바뀐 저택의 계절은 어김없이 누군가의 부재로 시작됩니다.
 
마치 저택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괴물에게 먹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키에사:...선생님을 찾아야 해.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허리를 세우고는) 우리만 깨어있게 한 이유가 있을 거야.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티아나:선생님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천진난만하게 네 옆으로 섰다.)
 
키에사:하지만 음식을 준비한 건 선생님인 걸. 지금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티아나:.... (힐끗 아이들을 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키에사:...왜 그러니?
 
티아나:네가 많이 놀랐겠구나 싶어서..
 
키에사:너는 안 놀랐고?
 
티아나:넌 안쓰러졌잖아. (키에사의 어깨를 콕 누른다.)
 
키에사:나 빼고는 다 쓰러졌는데... (이런 점은 한결같네. 생각하며) 그래도 같이 찾아줄 거지?
 
티아나:응, 선생님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먼저 걸음을 옮겨 식당을 나선다.)
 
키에사:(식당 옆 도서관부터 가본다.)
 
도서관
 
책장이 가득한 도서관입니다.
 
문 옆에는 안내대가 있고, 책장마다 분류 팻말이 붙어 있어 어렵지 않게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안내대의 책 수레 위에는 동화책영웅 람피온의 다음 권이 놓여 있습니다.
 
티아나:(선생님을 찾는다면서.. 도서관?)
 
키에사:분명 결말이 찢어져 있었는데? (전에 본 책이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가는 책벌레...)
 
티아나:(책벌레..)
 
'영웅 람피온' 핸드아웃
 
키에사:으음... (애매~...한 표정) 선생님 방으로 가보자.
 
키에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결말입니다.
 
티아나:선생님 방은 항상 잠겨 있었는 걸? 그러지 말고, 다른데 먼저 가자. (선생님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닌, 키에사와 어릴적처럼 보물찾기를 하는 모양새다.)
 
키에사:그럼 창고?
 
티아나:창고? (눈 반짝)
 
키에사: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티아나:거기엔 비밀의 방이 있잖아. (키득거리며 네 손을 잡는다.)
 
키에사:흐음~... 거기 키에사랑도 안녕이네. (창고로 가본다.)
 
창고의 문을 열면 역시나 선생님은 없습니다.
 
익숙한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입니다.
 
키에사:(이제는 올려두지도 않으시는군... 주섬주섬 올라간다.)
 
말린 장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거울 속 키에사는 텅 빈 등을 들고 있었으나…….
 
눈이 마주친 순간 바닥에 내던집니다.
 
소리 없이 박살 난 등이 바닥에 흩어진 가운데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핏방울이 닿은 바닥은 새까맣게 부식되며 흐린 연기를 피워올립니다.
 
키에사:...?
다쳤잖아! (당황) 갑자기 왜 물건을 집어던지느냐구.
 
거울 속 키에사는 대답 없이 창밖을 가리킵니다.
 
키에사:(의아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본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분수대가 있습니다.
 
봄의 가뭄은 분 수대의 물을 전부 말려, 바닥이 드러난 상태입니다.
 
키에사:...저게 왜?
가보라는 거니?
 
티아나:키에사는 키에사에 대해 뭐든지 아나봐. (네 옆에서 귓가에 속닥인다.)
 
키에사:그럼 뭐해. 나는 저 애에 대해 하나도 모르겠는데... (볼멘소리)
 
티아나:그거야말로 키에사가 모르는 거 아니야? (작게 웃으며)
 
키에사:...놀리는 거야? (창고를 나서며) 분수대 쪽으로 가보자. 그래도 저 애가 도움을 안 준 적은 없었던 것 같애.
 
티아나:선생님은 안 찾고? (고개 갸웃..)
 
키에사:뭔가 있으니까 가리킨 거 아닐까? (곰곰...) 좀만 더 보다 갈까?
 
티아나:키에사는 하나에 꽂히면 다 까먹는거지? 난 키에사만 따라 다닐거니까 상관 없는 걸~
 
키에사:그래 뭐어... 몇 군데 안 남았으니까. (창고 옆 화장실 들어가본다. 게일은 장갑을 흘렸었는데...)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가는 모양이에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진 않습니다.
 
키에사:(빈방은? 저벅저벅)
 
빈 방은 말그대로 비어져 있네요.
 
키에사:(놀이...방?)
 
어렸을 적 자주 놀던 곳.
 
바닥에는 두꺼운 매트가 깔려있어 발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벽을 따라 2층 짜리 수납장이 설치되어 있고, 칸마다 다른 장난감이 들어있었는데…….
 
티아나:이제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아리아가 그랬는데.
 
키에사:맞는 말이야. 여기도 들어와본지 한참 됐네... (선생님은 없나? 두리번)
 
선생님은 커녕 장난감도 보이질 않습니다.
 
한동안 안들어오긴 했지만, 언제부터 없었던 걸까요?
 
키에사:(윗층으로 올라간다...) 2층은 우리들 방 뿐이고... 활동실에는 없을까?
 
티아나:선생님 정말 꼭꼭 숨었잖아? (부러 큰 소리로 계단을 향해 말한다.)
 
활동실로 가볼까요?
 
키에사:(가보자!)
 
티아나:(가자!)
 
초능력 개발/제어 활동실.
 
벽을 아주 두껍게 발라 방음 처리가 확실하고, 모든 마감재는 방수, 방염 처리가 되어있습니다.
 
바닥은 떨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우레탄을 사용해 푹신푹신하고요.
 
퀴즈룸, 트레이닝룸, 리커버리룸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티아나:저택이 전부 멈춘 것 같아.
 
키에사:안 그래도 조용한데, 다들 잠들었으니...
여기도 아닌가봐. 어디에 계신 걸까? (교실로 총총...)
 
게일 : 선생님! 키에사 저기 있어요!
 
문을 열자마자 티아나 때문에 땡땡이쳤던 짝꿍을 일러바치는 게일의 얄미운 목소리가 왱왱거리며 울립니다.
 
교실에 있던 모든 아이의 시선이 집중된다고 느꼈을 때,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뜨면 평범하게 빈 교실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게일은 결국 빈 교실에서 눈을 감았고, 이건 환청일 뿐이니까.
 
19살이 되지 못해 스러진 람피온의 망령이 교실에 남기라도 한 걸까요.
 
아무리 교실에 있어도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은 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올 것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졸업식인걸요.
 
키에사:(어쩐지 침울...해짐)
 
티아나:왜 그래?
 
키에사:옛날 생각이 나서...
 
티아나:아쉬운거야?
 
키에사:그리운... 거겠지? 너는 그런 적 없니?
 
티아나:응, 없어. 아직 모르겠어.
 
키에사:괜찮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네 손을 잡고 방을 나선다.) 선생님 방에 가볼까? 계실지도 몰라.
 
과거의 어떤 날과 반대로, 당신은 손을 잡습니다.
 
여전히 유령의 손을 잡은 것처럼 서늘한 체온이 손끝에 닿습니다.
 
그림자가 드리운 복도를 거니노라면,
 
조용한 저택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티아나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연스러운 형태로 당신의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미뉴에트는 람피온의 일상이라는 잔잔한 수면 위에 떨어져,
 
그 안으로 가라앉아 일부가 되었습니다.
 
울새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시선이 창틀에 내려앉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키에사와 티아나 모두, 이 저택에 매여 있기 때문일까요.
 
키에사와 티아나가 저택을 살피고 1층 거실로 내려오면,
 
방문이 살짝 열린 방을 발견합니다.
 
저택의 유일한 어른, 선생님의 방입니다.
 
원래 열려 있었던가?
 
티아나:열려 있어.
 
키에사:...! 돌아오신 걸까?
(선생님 방으로 조심스레 향한다... 문 빼꼼)
 
문고리를 돌리면 가볍게 열립니다.
 
키에사의 방보다 조금 넓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책상책장침대를 볼 수 있습니다.
 
키에사:선생님은 안 계시네... (방안으로 들어가 책상을 살펴본다.)
 
티아나:정말 어디로 사라진거야-.
 
책상 위에는 편지 더미가 쌓여있습니다.
 
키에사:(편지를 슬쩍 들춰본다...)
 
람피온들에게 온 편지입니다
 
키에사나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수십, 수백 통의 편지가
 
어딘가에 쌓여있다 쏟아낸 것처럼 말 그대로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편지라뇨?
 
이런 편지는 전해 받은 적이 없는데요?
 
집에서부터 오는 편지가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이미 도착한 편지를 전해주지 않다뇨. …….
 
이상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하나씩 검열하고 있던 거지.
 
키에사:...어째서? (제 이름이 정갈한 필체로 적힌 편지를 손끝으로 쓸어본다.) 선생님......
 
티아나:(아직 드문드문 글씨를 읽을 수 있었지만, 키에사의 이름만큼은 확실하게 눈에 새겨져 있었다.)
 
키에사의 앞으로 도착한 편지, 핸드아웃
 
키에사:...안 보내신 게 아니었어.
 
다른 편지도 대체로 비슷한 내용입니다.
 
람피온의 저택을 찾을 수 없다,
 
Rose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네가 잘 살아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걱정된다…….
 
그렇게 쏟아지던 편지는 올해 봄이 시작되던 시기부터 끊어졌습니다.
 
티아나:엄청 많아.
키에사를 보고 싶어 하는 목소리가.. (편지에 대한 의미는 잘 몰라도 손 끝으로 종이의 윗면을 쓸어본다.)
 
키에사:왜, 숨기신 거지? 애들이 속상해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님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 갈림길 앞에 섰던 순간이 떠오른다.) 정말로... 우리 편이 아니었던 걸까.
 
티아나:선생님은... (너에게 어떤 존재길래..? 문득 고개를 들어 네 표정을 읽으려 한다.) 키에사의 편이야. 내가 알아.
 
키에사:...하지만 나에게 거짓말을 했는 걸. 그 오랜 시간 동안. (네가 표정을 보려는 것을 피하듯 살짝 고개를 돌리곤) 내 편이면 나를 속여서는 안 되는 거잖아...
 
티아나:그런거겠지..? 키에사의 편이니까..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눈썹의 끝이 내려가서는 다시 책상에 시선을 둔다.)
 
키에사: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선생님은 도대체 왜 우릴 속인걸까요?
 
생각할수록 마음 한 켠이 지끈거리는 것 같습니다.
 
이성 1 감소
 
키에사: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한 장의 편지 봉투만 유독 낡았습니다.
 
누렇게 바랜 색이 흘러간 시간을 알려주는 것 같아요.
 
키에사:(낡은 편지봉투를 집어본다.)
 
낡은 편지지, 핸드아웃
 
편지는 드문드문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습니다.
 
키에사:...라이아?
 
티아나:선생님의 편지인걸까?
 
키에사:그런가 봐.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책장으로 가본다.)
 
빼곡한 책장에는 천문학과 과학에 관련된 책이 자주 보입니다.
 
물고기자리의 주기, 가을 별자리 포말하우트, 절대영도의 존재, 기상 이변과 기후 변화……
 
키에사:
자료조사
기준치: 65/32/13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자료조사
기준치: 65/32/13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두꺼운 책들 사이에 구겨지듯 끼워진 서류 봉투 를 발견합니다.
 
키에사:(서류 봉투를 꺼낸다.)
 
서류봉투 안에는 보고서가 들어있습니다.
 
키에사:... (잠시 말이 없다.)
 
서류의 끝에는 익숙한 실링이 찍혀 있습니다.
 
티아나:어려운 말 밖에 없잖아-..
(그러나 몇 가지는 읽을 수 있다.) 미뉴에트, 람피온.
 
키에사:......너... (보고서를 더듬더듬 읽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선생님과 연구...에 대한 이야기, 한 적 있니?
 
티아나:연구? 으응, 몰라. (고개를 살풋 젓고는) 키에사 심각한 얼굴이 됐어. (네 양 뺨을 손으로 가볍게 포갰다.)
 
키에사:...티아나. (네 손목을 천천히 감싸쥔다.) 이건 네가 알아야 해. 로즈가, 네 유전자 샘플을 확보하고 있대, 너를, 람피온을 구하는 데 '활용'하려고. (그 단어를 발음할 때에는 약간 힘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인권 보호 단체라는 이름으로 이런 일을, ...
 
티아나:....응. 음... (감싸진 손목을 약하게 움찔거렸다.) 내가..? 하지만 난 로즈에게 뺏긴 게 없어. 그리고... 키에사가 살면 잘된 일 아니야?
 
키에사:네가 몰라도 분명 있을 거야. 머리카락이나, 혈액이나... 사소한 거라도. (작게 입술을 깨물더니) 그리고 이게 생명을 구하는 좋은 일이라고 해도, 네게 먼저 동의를 구했어야 하는 일이었어. 양산이고, 복제고, 전부 제멋대로...!
 
티아나:키에사, 나는 괜찮아. 오히려 기쁠걸. (잡힌 손목을 밀어 네 허리를 안는다.) 람피온은 수명이 짧다고들 하잖아. 정말로 다들 죽어버렸어. ....그럼, 로즈는 실패한 걸까?
 
키에사:이런 걸 몰래 했다는 건, 떳떳하지 못하다는 거야. 티아나... 나는 불안한 걸. (제 허리를 감는 행동에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난다.) ......그건 모르겠어. 오늘 선생님이 모두를 재운 것도, 이 연구와 관련이 있는 걸까?
 
티아나:키에사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밀리는 몸을 따라 어깨에 머리를 옆으로 기댄다.) 키에사는 어려운 말만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겠어. 선생님이 내 편은 아니라는 걸.
 
키에사:그런 게 아니야... 너는 누구보다 너를 우선시해야 해. ...전에 가르쳐줬잖아. (어깨에 비벼지는 머리를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보다 제 목께의 상처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바보 티아나. '우리'의 편이 아니라면 선생님은 내 편도 아닌 거야.
 
티아나:..... (조용히 행동을 멈추고 눈을 떠 허공을 바라봤다.) 키에사가 바보야. 너도 너를 안챙기면서.
지금도 봐, 선생님을 좋아하고. 마음 아프면서...
(곧 몸을 떼어 떨어진다.) 그래도 선생님을 찾을거야?
 
키에사:...다른 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만 그렇게 꿰뚫어 보는구나. (네가 몸을 떼어내자 무언가를 생각하듯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침대쪽을 본다.)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선생님을 믿지는 못했던 거야. 그랬다면 그날 내가 본 것을 숨기지도 않았겠지...
 
티아나:람피온은 위한다 해도? 키에사를 다 아는 것 같은데, 복잡해.
 
흰 국화 몇 송이가 침대 위에 얼기설기 떨어져 있습니다.
 
이미 혼수상태이던 아이들은 죽었고, 더는 추모할 일이라곤 없는데
 
어째서 흰 국화를 준비해 둔 걸까요?
 
국화 사이에 얇은 메모지가 한 장 섞여 있습니다.
 
키에사: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시니까. 지금까지도. (그렇게 말하며 메모지를 펼쳐본다.)
 
메모지, 핸드아웃
 
「등을 회수할 시간입니다. 기름을 옮겨 담으세요.」
 
꽃의 수를 세어본다면, 남은 람피온의 수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만 없는 방에는 기묘한 꽃향기만 가득합니다.
 
키에사:...그 애가 빈 등을 깼었는데. (거울 속의 키에사를 생각하듯) 선생님은 결국 못 찾았네.
 
티아나:...그 애.
정말 그 애가 가리키는 곳에 선생님이 있는 걸까?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치만 아무것도 없었는 걸, 물 까지도.
 
키에사:선생님은 없었어도, 다른 건 있을지도 모르지. 이 저택에 관한 비밀이라든가... 나가볼까?
 
티아나:좋아. (그날의 밤처럼 네게 손을 내민다.) 나가볼래.
 
키에사:(그날의 밤처럼 마주잡았다.) ...나가자.
 
.
 
.
 
.
 
키에사는 어디로 향하나요?
 
키에사:(분수대로 향한다.)
 
선생님을 찾아 저택을 헤맨 후 남은 것은 정원뿐입니다.
 
정원의 구조는 예전과 같습니다.
 
바짝 건조한 봄 공기, 생생하니 선명한 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지나갑니다.
 
계절이 바뀌며 가뭄이 시작된 것처럼 비 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죠.
 
세계에 둘만 남겨진 기분입니다.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은 탓일까요?
 
정원의 분수대는 어느새 물이라곤 온데 간데없고,
 
바닥을 채운 조약돌과 동전들만 반질반질합니다.
 
여느 때의 물소리 대신, 낮게 울리는 소리가 조각된 고래의 숨구멍을 타고 바깥으로 빠져나옵니다.
 
얼핏 들으면 고래가 우는 것 같기도 하네요.
 
키에사: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분수대의 둘레를 따라 고래가 헤엄치는 바다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너울 치는 파도는 꼭 계단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층이 나눠진 상태입니다.
 
……꼭 계단처럼?
 
소문 중에 아마, 36번째 계단을 밟으면 죽는다고 했었죠.
 
키에사:...계단? (파도를 밟고 올라가본다.)
 
제일 높은 곳에서부터 제일 낮은 곳까지.
 
파도의 개수를 세면 정확히 36개 입니다.
 
마지막 파도가 새겨진 대리석은 반질반질하니 표면이 닳아있습니다.
 
자주 밟거나…… 누른 것처럼.
 
키에사:(정말 무언가 숨겨져 있는 건지... 발로 밟아본다.)
 
계단을, 아니. 파도의 36번째 칸을 밟자,
 
움푹.
 
파도가 안으로 들어가고……
 
무거운 소리와 함께 분수대의 기둥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모세가 갈랐다던 홍해 대신 고래의 배가 좌우로 나뉘고,
 
조약돌과 동전들이 이리저리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분수대의 벌어진 틈 사이로는 계단이 보입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통로는 사람 하나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데다 퍽 어둡습니다.
 
어떤 광원도 존재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조약돌만 햇볕에 희미하게 반짝입니다.
 
저택에 이런 비밀스러운 입구가 존재할 일이 무에 있을까요.
 
우웅, 우우웅.
 
문이 열리자 고래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선명해집니다.
 
정확히는……
 
키에사: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29
판정결과: 보통 성공
 
기계,
 
컴퓨터 따위가 웅웅거리는 구동음 같습니다.
 
계단 아래에서부터.
 
티아나:.... (계단 아래를 빤히 본다.)
 
키에사:...선생님이 이 아래에 계실까? (조금 머뭇거린다.)
 
티아나:무서워? (키에사의 손을 꼭 잡는다.)
 
키에사:만나러 여기까지 파헤친 건데, ...무서워하면 이상해?
 
티아나:이상하지 않아. 그치만...선생님을 만나는 게 무서운거야? (고개를 갸웃거린다.)
 
키에사:......내가 아는 선생님이 아닐까 봐. 이보다 실망하면 어쩌지 싶어.
 
티아나:키에사가 선택하면 돼.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덤덤히 어두운 공간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에사:너한테 그랬던 것처럼?
 
티아나:응. 키에사는 늘 선택했는 걸.
 
키에사:그랬지. ... (작게 호흡했다.) 여기까지 와버렸다는 건, 내가 이 밑을 궁금해했다는 거야. 선생님의 의중도... 저택의 비밀도 여전히 궁금해. 지금 돌아서면 평생 알 수 없겠지...... (호기심, 지적 탐구심, 알량한 정의감, 객기... 어떤 것으로 불려도 상관 없다.) 들어갈래. 따라와 줄 거니?
 
티아나:갈거야, 키에사가 가면 나도 가. (한 몸처럼 붙어다니던 것에 변함은 없다. 너와 달리 나는 고래의 숨을 내뱉는 구멍 아래에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으므로, 오로지 발을 맞춰 나란히 옆에 서 있을 뿐이다.)
 
키에사:그래... (선택 하나에 얹어지는 무게는 고스란히 두 명 분이 된다. 이 묵직함 역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겠지.) 고마워, 티아나. (고래의 뱃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두 사람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금세 빛이 닿는 곳은 끝나고 사위로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벽에 기대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납니다.
 
오래도록 관리되지 않은 곳임이 분명합니다.
 
다리가 여럿 달린 벌레들이 샤샤샥, 벽을 타고 기어 다니는 소리가 납니다.
 
목덜미에 부드러운 실이 닿습니다.
 
희게 떨어진 거미줄입니다.
 
돌을 깎아 만든 계단은 꽤 투박합니다.
 
지하실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벌레와 먼지, 곰팡내에 쌓여 셀 수 없이 많은 계단을 내려오면……
 
차가운 벽이 길을 막고 딱 세워져 있습니다.
 
탁.
 
키에사와 티아나가 마지막 걸음을 딛는 순간 소리소문없이 벽 좌우에 걸린 전구에 불이 들어옵니다.
 
벽에는 키패드가 함께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빈칸에 들어갈 글자가 암호인 것 같습니다만…
 
뭐라고 입력해야 하지?
 
키에사:(등과 기름을 입력해본다.)
 
키패드에 등과 기름을 입력하자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립니다.
 
문 너머로 펼쳐지는 것은……
 
연구실이라고 불릴 법한 공간이에요.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의자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이면지.
 
곳곳에 소복하게 쌓인 먼지까지. 쓰인 흔적이 없군요.
 
꼭꼭 숨겨 두고선, 결국 버린 걸까요?
 
하지만 전기 공급만은 끊이지 않았는지, 천장과 바닥이 배선으로 어지럽습니다.
 
웅웅,
 
땅을 울리던 고래의 울음소리는 아마 분수대의 배관을 타고 올라 온 기계의 구동음이었던 모양입니다.
 
양편에 꽂힌 책장은 거의 비어있고,
 
책상마다 컴퓨터를 들어냈는지 위가 휑합니다.
 
가장 안쪽에 커다란 스크린이 흘러 내려와 있습니다.
 
화이트보드에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휘갈기다시피 한 글씨체로 쓰여 있고요.
 
키에사:(책장부터 천천히 살펴본다.)
 
그다지 쓸모는 없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무엇이라도 건질 수 있겠죠.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표지가 상당히 낡은 책.
 
양피지를 엮어 만든 것으로 제대로 된 제목도 없습니다.
 
그러나 키에사에겐 분명히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이 지은 모든 것들을 이리 쉽게 버리시나이까?”
 
“내가 너희에게 이미 불을 주었노라.”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와 열린 입이 없어 불을 불인즉 깨닫지 못하니 내가 그에게 이적과 기사를 주리라.”
 
“그 이적과 기사를 깨달은즉 고개를 들어 향기로운 나무를 보라. 불타는 이름으로 가득하도다.”
 
“신이 우리에게 보낸 불씨가 거기 있구나!”
 
“그를 하늘에 매달아 땅을 밝히고 바다를 녹이자!”
 
“그를 매달아 우리를 구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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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네 할 일을 다 하였음이니 이곳에서 영원히 쉴 것이다.”
 
꿈속의 비석에서 읽은 이야기와 같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남겨져 있습니다.
 
키에사:......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이름까지 눈에 새긴 뒤 잠시 숨을 골랐다.)
(안쪽의 커다란 스크린을 확인한다.)
 
영사기에서는 끊임없이 빛이 뿜어져 나옵니다.
 
빛의 범위를 따라 흔들리는 먼지와 작은 알갱이들이 꼭 반짝이는 것 같습니다.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맺혀 있지 않지만,
 
재생 버튼이 보이네요.
 
키에사:(재생 버튼을 누른다.)
 
This message has been hidden.
 
재생 버튼을 누르면 영상이 시작됩니다.
 
「Ph'nglui mglw'nafh Cthugha Fomalhaut n'gha-ghaa naf'lthagn Ia! Ia! Cthugha!」
 
재생하는 순간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모독적인 찬송가.
 
제대로 발음할 수 조차 없는 주문 따위. 영상 속에 어떤 남자가 묻습니다.
 
“이렇게 외우면 돼?”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응, 포말하우트에 사시는 분이니까 꼭 그 별이 나무들의 가지 끝에서 빛날 때 외워야 해.”
 
아, 익숙한 얼굴이에요.
 
라이아입니다.
 
지금보다 천진난만하게 웃던 선생님이 말꼬리를 흐립니다.
 
“역시 나도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신도인 당신이 부르면 지나친 권능이 임할지도 모른다면서.”
 
“그래도. 그분을 소환하는 의식을 치른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불안해.”
 
“괜찮을 거야, 금방 돌아올게.”
 
선생님은 남자에게 작은 주머니 부적을 건넵니다.
 
몸 조심히 돌아오라고,
 
그 분을 영접하더라도 미치지 않도록 주문을 걸어뒀으니 꼭 가지고 다니라고…….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선생님의 뺨에 입을 맞추곤 떠났습니다.
 
영상 속에 선 분주히 열 명 남짓의 연구원들이 짐을 챙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릭 호수, 은가이 숲으로 갑시다.”
 
영상은 금세 끝납니다.
 
화면 끄트머리에 날짜가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릭 호수
 
익숙한 날짜와 지명이에요.
 
키에사:...선생님의, 소중한 사람... 무언가를 소환하려고 한 걸까? 왜... (중얼거리며 화이트보드를 본다.)
 
티아나:(키에사를 따라다니며 똑같은 것을 본다.)
 
글씨는 드문드문 지워진 데다 휘갈겨 쓴 탓에 제대로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커다란 지도가 한쪽에 붙어 있습니다.
 
키에사:
언어(모국어)
기준치: 55/27/11
굴림: 5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얼어붙은 세계, 멸망, 크투가 소환, 은가이 숲, 릭 호수, 1941. 6. 1…….
 
나열된 글씨를 차근차근 읽어도 정확히 무엇을 위함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키에사:(옆의 지도도 보자)
 
미국의 지역을 그려둔 지도.
 
은가이 숲과 릭 호수에 커다랗게 붉은 동그라미가 매겨져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X자가 보이고요.
 
……아마도 X자는 출발 지역일 테니,
 
람피온의 저택이겠죠.
 
이렇게 가까웠던 걸까요?
 
걸어서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키에사:이곳에서 누군가를 부르려고 했나 봐.
 
티아나:선생님도 누군가가 그리웠을까? (키에사를 빤히 본다.)
 
키에사:아마도. 이 사람은 돌아오지 않은 걸까...
 
5월 29일에 떠난 남자.
 
5월 30일에 찍은 호수의 사진.
 
그리고 6월 1일 이후로 남지 않은 기록.
 
선생님이 어디로 갔을지 알 것 같습니다.
 
키에사:계실만한 곳이... 이 호수밖에 없네.
 
티아나:응. 갈거야?
 
키에사:그래야겠지. 올라가자...
 
정원의 대문은 선생님의 방문과 마찬가지로 약간 열려 있습니다.
 
억지로 연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안에서부터 열쇠를 사용해 열었단 뜻이겠죠.
 
키에사가 미뉴에트 나무를 뿌리째 불살랐으니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직…….
 
검은 나무가 춤추는 숲.
 
하나의 발자국이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어간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태는 검은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탄내가 지독하게 느껴집니다.
 
색이 검은 것이 아니라 모조리 타고 남은 잔해처럼.
 
티아나:키에사, 잠깐. (잡은 손과 함께 우뚝 멈춰선다.)
 
키에사:...응?
 
티아나:담요. 챙겨가자. (되려 저택 쪽으로 팔을 이끈다.)
 
키에사:춥니? (여름에 가까운 날씨지만... 완전히 여름은 아니니까. 네 뒤를 따라간다.)
 
저택에 들어가 담요나 외투를 챙겨나옵니다.
 
지도는 챙겨왔나요?
 
키에사:(챙겨왔다!)
 
왼쪽으로 한 바퀴,
 
오른쪽으로 두 번 돌고,
 
직진해서 몇 분 더.
 
숲은 깊고 어느새 시간은 밤을 향합니다.
 
하지만 숲에는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보라색으로 저무는 붉은 하늘만이 세계의 유일한 색채입니다.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탄내가 납니다.
 
검은 나무는 멀쩡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이파리 없는 앙상한 가지에 하늘이 조각조각 걸려있습니다.
 
키에사: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 숲은.. 꿈에서 본 그 숲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검은 숲을 가로지르다 보면, 날이 점점 차가워집니다.
 
5월 31일. 봄의 끝물과 여름의 초입.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찬 공기가 확 밀려옵니다.
 
람피온의 저택은 숲속에 있어 여름에도 서늘했습니다만,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이가 부딪히는 딱딱한 소리가 납니다.
 
티아나는 의연하게 외투나 담요 등을 키에사에게 덮어줍니다.
 
언제 챙겨온 건지 모를 등롱에 불을 붙이자 한결 온기가 돕니다.
 
어둠이 내려앉는 겨울의 숲.
 
티아나와 키에사는 작은 등롱에 의지한 채 천천히 걷습니다.
 
……이런 적이 또 있었던 것 같아요.
 
10살의 여름에도 세상을 메꾼 어둠을 둘이서 나란히 가로지르고 있었죠.
 
티아나:추워?
 
키에사:봄 다음이 언제부터 겨울이었지? (오들...)
 
심해의 지저를 밝히는 아귀의 초롱처럼 작은 불빛이 아롱거립니다.
 
파도 대신 거센 바람이 치면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몸을 흔들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등을 떠미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이끌 리는 기분이에요.
 
키에사는 티아나와 함께, 걷고 걷습니다.
 
완전히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을 때……
 
두 사람은 호수에 도착합니다.
 
주위로 검은 나무들이 산재한 가운데 바닥에는 검붉은 꽃들이 버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선생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키에사:(달빛이 비추는 호수를 멍하니 바라본다.)
 
완전히 얼어붙은 호수는 유리 같기도 하고 거울 같기도 합니다.
 
키에사는 이제 이 호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릭 호수입니다.
 
1941년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어느 숲의 그 호수 말이에요.
 
짙은 물색,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달빛에 반사되는 물의 표면.
 
호수는 깊고 넓어 도저히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어둠, 무저갱, 심연.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을 뿐.
 
키에사:(그럼... 저 나무들은 화재 때문에 이렇게 까만 걸까? 검은 나무들로 시선을 옮겼다.)
 
빛을 통과시키지 않을 듯 빽빽하던 나무들은 호숫가에 다다르자 마르고 앙상해선 듬성듬성 구색을 갖춘 게 전부입니다.
 
헐벗은 가지에는 새하얗게 눈발이 쌓여있습니다.
 
죽을 때를 앞둔 노인의 머리카락처럼 희끗희끗하군요.
 
키에사가 나무를 살펴보면 가지마다 등롱이 하나씩 걸려있습니다.
 
키에사:......(가지에 쌓은 눈을 손으로 훔쳐보더니, 이내 등롱을 들여다본다.)
 
검은 등롱에는 불꽃의 너울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유리 너머에서 끊임없이 환한 빛을 품은 채 타오르는 것은, 다름 아니라
 
……
 
람피온입니다.
 
람피온, 당신의 또 다른 이름.
 
저택의 정원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하나 전혀 다른 꽃입니다.
 
겹겹이 쌓인 꽃잎은 안에서부터 불을 켠 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내부의 금술은 떨어지는 노을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아. 키에사는 이 색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 정오의 태양,
 
꺼지지 않는 불꽃, 가장 밝고 위험한 색.
 
람피온의 씨앗과 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잖아요.
 
불타는 광경처럼, 떨어지는 노을처럼!
 
이런 꽃은 생전 본 적이 없습니다.
 
등롱 근처에만 다가가도 열기가 느껴집니다.
 
열다섯의 꿈,
 
부쩍 가까워졌던 태양도 이보다는 덜 뜨거웠던 것 같아요.
 
그러나 등롱에 손을 대면 딱 좋은 온도가 느껴집니다.
 
사람의 피부처럼 적당하고 부드러운 온도……
 
정확히 37.5℃,
 
람피온의 체온입니다.
 
호수를 둘러싼 테두리마다 같은 형태의 등롱이 걸려있습니다.
 
안에는 모두 람피온이 만개했고요.
 
완전히 펼쳐졌으니 이제 남은 건 시드는 일뿐이겠죠.
 
키에사:... (람피온을 꺼낼 수 있나?)
 
직접 꺼내다간 다칠 것 같습니다.
 
티아나:(조용히 등롱에 손을 대고 있다.)
 
키에사:...이건... 진짜 람피온이겠지. ......
 
티아나:키에사랑 같은 따뜻함이야. 이게 람피온이구나...
 
키에사:(검은 꽃들에 시선을 내린다.)
 
어느덧 노을은 다 지고, 밤이 찾아온 탓에 바닥에 떨어진 꽃은 색을 알아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검붉다기보단…… 검다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하지만 꽃의 이름만은 모를 수 없습니다.
 
람피온입니다.
 
시들고 말라, 빛이 꺼진 꽃.
 
다락방에서 보았던 그 꽃무더기에 쌓여있던 것들이 지금 이 차고 마른 숲에 버려져 있습니다.
 
숲의 정경을 보자니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얼어붙은 세계, 멸망, 크투가 소환,
 
은가이 숲, 릭 호수, 1941. 6. 1,
 
영웅의 신화와 열살을 넘긴 람피온을 찾아볼 수 없는 거리.
 
티아나:이 호수 너머에는 겨울이 있어.
 
키에사:...갑자기 무슨 소리니?
 
추상적인 표현입니다.
 
티아나는 키에사를 바라보지 않고 비스듬하게 시선을 피한 채입니다.
 
숲의 너머를 노려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이질적인 분홍색.
 
티아나:세계가 얼어붙기 시작한 지점이야.
1941년보다 훨씬 전부터, 해가 뜨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더니 바람이 차게 변하고...
기온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거야.
끝나지 않는 겨울이 시작될 조짐이었대.
 
이야기를 마친 티아나는 웃으며 키에사를 돌아봅니다.
 
심리학 판정 따위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웃기 위해 티아나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티아나:너는 오늘 죽어, 키에사.
 
티아나는 눈물 대신 고개를 떨군 채 얼어붙은 호수의 깊은 곳을 노려봅니다.
 
키에사:......내가 람피온이라서?
 
티아나:(천천히 고개를 든다.) .....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수많은 과학자와 연구원이 달라붙었대.
하지만 해결방법을 찾지 못한거야. 다가오는 계절 앞에서 무력하게.
그때... 크투가를 알게 됐대.
크투가를 소환해서, 호수 너머의 끝없는 겨울을 저지하려던 거야.
 
영상 속 사람들의 얼굴이 스칩니다.
 
선생님과 주고받던 대화들도.
 
티아나:Rose는 겨울이 임하는 근원지, 은가이 숲으로 향했고 크투가를 불렀어.
의식은 성공했어. 대신....
크투가는 기꺼이 부름에 응답하는 대신, 숲을 전부 태워버렸대.
람피온은 그날 이후, 크투가가 지구에 남긴 계약의 증표야. 겨울을 물리치기 위해, 하지만 모든 것을 태워버리지 않게끔 얇은 껍질 속에 가둬진 채 태어나서......
10살에 개화해 19살에 죽은 불꽃이 되어 세상을 지피는 식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 등롱 안에선 아직도 람피온이 타들어 갑니다.
 
자신의 본질과 결말을 본 키에사,
 
키에사:
SAN Roll
기준치: 54/27/10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이성 1d3 감소
 
키에사:1
 
호 (GM) : 핸드아웃 얼어붙은 세계.를 공개합니다.
 
키에사:......그런 걸 들어봤자, 난... (말이 나오지 못하고 목이 막힌다. 고개를 숙이면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쏟아져 내렸다. 등에 갇혀진 불꽃과 같은 빛깔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20년을 채 못 다 피고 죽는 꽃. 그런 운명에 저항하듯 꾹 쥔 주먹이 조금씩 떨려왔다.) ...모르겠단 말이야......
 
티아나:..... (서로의 발이 마주보는 거리가 가까워져선 양 팔을 잡고, 얼굴을 깊게 마주했다. 은가이의 호수가 그러했듯 널 보는 것을 거울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티아나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요?
 
어떻게?
 
혼란 속에서도 이상했던 순간들이 스칩니다.
 
무엇을 보고도 놀라지 않던 눈.
 
숲에 오기 전 담요를 챙기던,
 
마치 겨울을 예감한 모습…….
 
티아나:키에사가 찾던 선생님은 안 오실거야. 자리를 비켜주겠다고 하셨거든.
내가 이곳으로 키에사를 부른거야.
 
키에사:...나를 속였구나. 티아나.
 
티아나:...그럴지도 몰라. 아니, 맞아.
 
티아나가 들고 있던 등이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얼어붙은 땅에 떨어지며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파란을 일으킵니다.
 
티아나:키에사, 부탁이야.
 
가까이 다가온 몸은 평소보다 더 서늘하고 향기롭습니다.
 
미뉴에트 특유의 단내.
 
정신을 흔들어 놓고 마음을 잡아당기는 매혹.
 
티아나는 언제나 키에사와 함께 있었습니다.
 
이 좁은 저택, 짧은 하루에서 공백이라곤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숨겨왔던 비밀인지 모르겠습니다.
 
키에사가 모르는 사이,
 
티아나가, 이런 걸 알게 될 틈 따윈……
 
티아나:살고 싶다고 말해줘.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키에사는 이레의 열병을 떠올립니다.
 
유일하게 티아나와 헤어져 있던 나날.
 
사흘을 들여 키에사를 구하러 왔던 티아나.
 
그때 티아나는 분명히,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이미지 설명
 
티아나:곧 깨어나겠죠?
 
선생님:…….
 
티아나:왜 대답을 안 하세요?
아마, 키에사는 건강했으니까, 아마도…….
 
선생님:키에사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어요?
 
선생님:람피온은 어른이 될 수 없어요.
 
선생님:키에사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신을 모시는 마녀예요.
람피온의 탄생과 동시에 어떤 미래를 읽었죠.
은가이 숲을 잃은 기어드는 혼돈이 원한을 품고, 불꽃을 훔치기 위한 어떤 수단을 만들어낼 거라고.
그리고 그건……
단 한 번뿐인 기회란 걸.
 
선생님:크투가는 세계를 구하는 대가로 은가이 숲을 잡아먹고, 람피온을 낳았어요.
그리고 이 숲 전체를 계승자들을 가둬두기 위한 저택으로 삼았죠.
 
선생님:내가 왜 수상쩍은 당신을 내내 키에사의 곁에 뒀다고 생각해요?
유일한…… 생존수단이라서예요.
미뉴에트는 람피온의 능력을 완전히 훔칠 수 있어요.
그러면 적어도, 키에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선생님:당신의 생명이, 키에사가 죽은 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티아나:그동안 네 옆에서, 나는……
 
티아나가 키에사의 입가에 입을 맞추자 파도처럼 기억이 밀려듭니다.
 
쓸쓸해 보이던 선생님의 옆얼굴,
 
열에 들떠 깨어나지 못하던 키에사,
 
나날이 죽어가던 람피온들,
 
그리고……
 
열다섯부터 열아홉까지.
 
하나의 미래를 삼킨 채 키에사를 지켜보던 티아나.
 
타인의 기억과 감정이 분명한데도
 
원래 키에사의 일부인 것처럼 끊임없이 밀려오고, 스며들고, 흘러듭니다.
 
아, 그래요……
 
티아나의 근원은 키에사이기에, 모든 것은 결국 키에사에게 돌아올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티아나에게 내일은 없을 겁니다.
 
허락되는 것은 티아나의 목숨을 대가로 한 키에사의 내일뿐.
 
혼자 살아갈지언정, 혼자 죽지 않게 하소서.
 
이건 누구의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 실패의 기록.
 
언젠가 들었던 노랫말이 머릿속을 뒤흔듭니다.
 
장미 향기가 진동하는 숲속,
 
탄내도 불티도 없건만 한여름의 장미는 이토록 강렬하게 존재를 증명합니다.
 
티아나는 그저 담담한 얼굴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한 떨기 꽃으로 바꾸어 놓는 것에,
 
어떤 부당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이별을 오래도록 준비한 사람 특유의 초연함이 베어있습니다.
 
키에사:살고 싶어. ...... (의연한 얼굴로 끈질기게 자신에게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진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에 담겠다는 것처럼. 마주하는 눈은 흔들리고, 이별을 머금은 네 티 없는 웃음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너와 함께... (미련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서투른 투정 같기도 했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 불꽃은 속에만 가둬두자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새어나와, 너까지 집어삼키는구나. 이 지독한 장미의 향기를 없앨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의 끝에는 재가 남게 되는 걸까.)
 
티아나:...... (예상했던 대답에도 직면하는 너의 모습 앞에선 심장이 욱씬거린다.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네가 어떤 상처를 받을지 알고 있었음에도... 필연적인 이별이라 명명했다. 계절이 돌고, 달이 태양을 쫓아 다시 제자리에 오기를 무력하게 기다리며. 서로를 마주봤던 너 또한 나를 이해할 것이다. 내가 산산이 조각나도 너만큼은 돌아서서 살아가 주기를. ) ... 나도.
그러니까, ...부탁하는거야.
 
키에사:그런데도, ...이런 부탁을 하니? 그러지 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는 자그마치 몇 년의 시간을 삼켜가며 오늘을 준비해왔던 걸까. 티아나 레이라니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자신이 가르쳐준 것,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니까. 이해와 그리움, 미움과 질투까지도. 하지만 단 하나 간과했던 것이 있다면, ...사랑만큼은 언제나 너보다 서툴렀다. 맹목은 너를 통해서 배웠다. 외로움은 너로 인해 잊었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거울, ...그림자.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의 미뉴에트.) 혼자는 너무, 외롭잖아... (우리는 너무 긴 시간을 함께 했다.)
 
티아나:나로 인해 네가 스무살을 넘길 수 있다면, 몇 번의 이별을 겪은다 해도 괜찮아. ....키에사.
(긴 시간을 속여왔다, 너를. 마음속에 뿌리잡은 아픔을 숨기면서도 타오르는 빛에 시선을 쫓길 멈추지 않으면서. 나는 이 세상을 너로 인해 알았고, 너를 통해 알았어. 하지만..
인간의 망설임 까지는 이해하지 못해. 세상에 남은 것, 세상에 남겨질 것. 그것에 대한 미련을.)
앞으로 나는 널 외롭게 할 거야.
...키에사는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지. 이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야. 살아가면, 앞으로 뭘 하며 살아갈지 생각해둬.
 
티아나:(긴 시간 동안 생각했어, 널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이쪽은 보지마. 나를, 놓아줘.
 
키에사:
정신
기준치: 55/27/11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
 
.
 
.
 
의식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익숙한 암전.
 
깜빡, 깜빡.
 
키에사는 거실,
 
자신의 방, 그도 아니라면 교실,
 
다락방, 아무튼 저택의 어딘가에서 눈을 뜹니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호흡이 들뜹니다.
 
목구멍 안쪽은 말라붙은 것처럼 뻑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티아나:일어났구나.
 
티아나입니다.
 
분홍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지나간 일들을 떠올립니다.
 
짐을 싸며 나누던 이야기,
 
화려하던 만찬, 쓰러져 잠든 아이들과……
 
적막하게 내려앉은 공기는 비단 다른 아이들이 잠들었기 때문은 아니겠죠.
 
티아나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유난히 키에사의 머릿속을 들쑤십니다.
 
그러나 생각을 더 하기엔 열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티아나는 잠자코 열을 식히기 위해 물수건을 갈아주다가,
 
티아나:...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열이 올라서 쓰러졌어.
키에사 은근 무겁다니까? 데려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저택에 키에사를 끌고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투덜거립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모든 이야기가 헛것이었던 것처럼…….
 
가물가물한 시야로 창밖이 보입니다.
 
어느새 보라색을 지나 남색으로 어둑하게 내려앉았습니다.
 
밤이 완연합니다……
 
따라 창밖을 보던 티아나가 말하길,
 
티아나:지금은 5월 31일의 저녁 11시야.
 
이제 한 시간이 막 남았다고 선고합니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기까지.
 
티아나:(몸을 숙여 깨끗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네가 죽으면 함께 죽게 될 거야. 내 생명의 근원은 너니까.
네 능력을 전부 훔치면....... 나 하나면 죽으면 되고.
어떻게 할래?
 
키에사:...그런 식으로 못되게 말하지 마. (몸을 숙인 네 목을 끌어 안았다. 불에 차가운 물을 한 움큼 들이붓듯,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밀려온다. 식은 땀에 쩔쩔 매면서도 팔에 힘을 풀지 않은 채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냥 안아줘, 티아나.
 
티아나:.... (눈썹이 얕게 구겨지다 다시 평온하게 널 바라본다. 끌어 안겨진 몸에 힘을 풀고 그대로 품에 안는다. 귓가에 작은 신음조차 흘러가선 안됐다.) 바보 키에사.
 
열아홉의 마지막 장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흐르고, 시곗바늘은 멈추는 법이 없이 나아가니까요.
 
저택과 선택은 발음이 비슷합니다.
 
람피온의 저택을 선택이라고 고쳐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밤이 저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그저 야속합니다.
 
곧 여름이 시작될 거예요.
 
우리는 오늘, 나란히 여름을 맞이할 겁니다.
 
찾아오는 계절 앞에 사람이란 얼마나 무력한가요?
 
기어코 나그네의 옷을 벗겨내고 승리를 거머쥐었던 더위란 누구도 견딜 수 없었겠죠.
 
내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은 사람을 미치게 하기 딱 좋았습니다.
 
람피온의 양 뺨이 홧홧하니 붉습니다.
 
저택의 장미보다 곧 붉어질 그 색이 시작이자 마지막의 ⑨조입니다.
 
자, 우리의 마지막을 위하여, 계절의 페이지를 넘길까요.
 
키에사:많이 자랐구나. 조금은 어른 같아. (네가 투정을 부리면 내가 받아주고. 우리는 언제나 반대였는데. 그런 생각에 실실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 여름에 진다면, 외로움에서 도망간다면. 너는 나를 미워할까? (긴 시간 많은 것을 책으로 익혔다. 그곳에는 초록빛 들판도, 노오란 갈대밭도, 푸른 바다도 있었다. 장미가 아닌 저마다의 이름을 가진 수천의 꽃들과, 세상의 다양한 진미를 맛보는 이야기. 실은 그런 것들을 너와 함께 하고 싶었다고 조곤조곤 전했다.) 선생님을 닮고 싶지만... 같은 후회를 남기고 싶진 않아.
 
티아나:(그게 아니야. 그 대답을 바라지 않아. 무턱대고 뱉어버리고 싶은 문장들을 겨우 삼켜냈다. 왜, 너마저도 우린 서로에게 맹목적이게 되었을까. 너는 훨씬 더 너른 세상을 알고 있어서 좁게 느껴질 나의 세상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 저택에 떠도는 유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언제나 '함께'.... 라는 건 좋지 않아. 키에사는 지금 아픈거야. 책을 그렇게 읽어도 바보 같은 생각만 해. 그러니까.
....너마저 저버리면, 나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키에사는 나를 세상과 이어줬어. 키에사의 부모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야.
나는 영웅 람피온처럼 '이야기'로 살아남아, 네가 늙어 죽는 날 까지도 네 귀에 흘러오겠지. 그러니까 살아.
이건 정말... 너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티아나:....이기적인 키에사. (이름 모를 감정에 가슴이 아파왔다.)
 
키에사:...응, 너무 아파.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인 걸. (서서히 입안이 말라간다. 시들어가는 꽃처럼. 너를 껴안고 있던 팔에도 조금씩 힘이 풀리고, 옷자락을 쥐는 손끝은 볼품 없이 갈라졌다. 바스라진다... 분명 그런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함께라는 걸 알려줘 놓고, 이제 와서 나를 남기고 가는 거야? (너는 죽음이라는 걸 모른다. 그걸 아는 건, 단절을 두려워 하는 건 남겨진 사람들 뿐이지. ...네 이름을 알아도 부를 수 없고, 편지를 써도 부치지 못한다. 목소리고 얼굴이고, 노력하지 않으면 잊혀질 거고, 잊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마주해야 하는, 막연하고 아득한 감각.) 그리움이라는 건 결국, 나만 아는 거였어......
티아나. 내가 같이 있어주지 않아도 정말 괜찮니?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그냥 이곳에 남아 피어있기만 하는 걸로도... 너는 괜찮아?
 
티아나:(해가 완전한 저편으로 저물고 달은 머리 위로 떠올라 변변한 볕조차 주지 못하는 어스름한 온기로 우릴 비춘다. 빠진 열을 채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끓어오르는 람피온의 체온. 손이 닿기만 해도 뜨겁고, 활활 타오를 것 처럼 강렬하다. 그것을 식혀줄 수 있는 건, 미뉴에트인 자신 뿐이었다.)
함께일거야. 람피온의 씨앗을 삼킨 미뉴에트로 남아 언제나 네 열병을 식혀줄게. ...키에사가 살아있다는 건, 나. 티아나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
(땀에 젖은 앞머리를 걷어내 제 이마를 기꺼이 대었다. 서늘한 체온이 너무 차가워서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눈을 감는다.) 그리뭉은 따듯함의 증거. 키에사를 그리워 했던 엄마도, 연인을 그리워 하던 선생님도, 친구들을 생각했던 키에사도. ...모두 사랑이 씨앗이 되어 움튼거지?
(곧 눈을 떠 찬 숨을 뱉었다. 침묵은 대답이 되었다.) ...
날 그리워해 줄래? 키에사.
 
키에사:(기어코 네 고집은 꺾지 못하는구나. 하기사, 나는 늘 너에게 약했지. 몸을 조금 뒤척이다 상체를 일으켰다. 창백한 달빛이 주는 부족함을 가까이서 채우기 위해.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눈을 감고 간절하게 염원해봤자, 뜨거운 것을 떨구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
19살을 넘기지 못하고 람피온은 죽어. ...나는 오늘 죽어. 그치만, (제 뒤를 이어 저택에서 스러져 갈 장미들. 또다시 실패할 선생님. 너의 사랑이 무색하게 남들과 똑같이 맞이하는 끝... 전부 타고 나서 재만 남아버리는 우리의 기억.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것이다. 꺼져가는 운명을 또다시 생으로 붙잡아두는 것은.) 이 열병을 딛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건 너를 위해서.
너는 유령이 아니었어, 티아나. 그건 내가 알아, ......전부 기억할 수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서.
(뜨거운 손으로 네 뺨을 감싸쥐고, 흰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다 타버린 이야기의 마지막 장. 이제는 끝에 적을 하나의 문장을 알겠다. 흔들리는 숨으로 천천히 네 이름을 발음했다.) ...안녕. 티아나 레이라니. (나를 속일 정도로 나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 나도 당신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네가 많이 그리울 거야.
 
자정이 가까워지고,
 
열이 들끓기 시작한 몸은 아주 뜨거웠습니다.
 
티아나의 이마에 닿은 입술이 무색하게 그 더위는 누그러들지 않고 거세게 들끓습니다.
 
작렬하는 여름의 태양처럼 뜨거운 온도를 힘껏 끌어안으면,
 
직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정말로 마지막이에요.
 
인사를 나눌 시간도 이제는 끝.
 
마지막 불길이 치솟을 테니까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리움은 언제나 우리를 이어줄테니까요.
 
그리움과 사랑, 티아나 없이 사는 것이 퍽 괴롭고 외로운 일이 될테죠.
 
퍽 괴롭고 외로운 일이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믿습니다.
 
키에사가…… 기꺼이 나를 견디고 살아 줄 거라고.
 
오직 그 믿음이 영원한 이별을 견딜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두려움과 서글픔의 끝으로 어딘가 닿았고,
 
마지막 생각은 아주 간절했습니다.
 
마음의 온도를 잴 수 있다면 딱 불타오를 정도로.
 
더는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다치지 않게, 네가 온전히 행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은 내가 가져갈 테니.
 
자정의 시계가 열두 번을 웁니다.
 
고래의 울음소리를 닮았습니다.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지,
 
혹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말미를 조롱하는지
 
창틀에서 울새도 함께 울고요.
 
우리도 울었던가요.
 
열이 옮겨붙고 곧 홧홧하니 달아올라선 눈물 따위는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끌어안은 네가 뜨겁다고 느꼈을 때.
 
손 아래에서 피어난 것은 선명한 장미였습니다.
 
완전한 형태를 갖춘, 선명하게 붉은 람피온.
 
화려하게 흐드러지고, 찬란하게 피어났습니다.
 
뜨겁다 못해 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간 그 색.
 
마치 이것을 틔우기 위해 살아온 생명처럼…….
 
그날 심은 씨앗이 모든 순간을 거쳐,
 
오늘에서야 개화한 것입니다.
 
간절한 바람은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부서집니다.
 
꽃잎이 낙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티아나는 한 점 한 점 부스러지고 흩날려,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토록 이별을 바라지 않았는데 이별은 모든 것을 좀먹습니다.
 
열기 속에서 이지러지던 당신의 얼굴이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티아나:안녕, 나의 람피온.
 
흑, 흑흑…….
 
....
 
키에사는 머리맡에서 들리는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눈을 뜹니다.
 
람피온의 저택을 떠나는 날,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입니다.
 
한번을 거르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도 음울하고 울적한 아침이에요.
 
커튼이 여름 바람에 흔들리고,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가 일렁입니다.
 
이 저택의 장미 향기는 도통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것 같더라니, 바닥이 온통 장미 꽃잎 천지네요.
 
이 저택에서는 지천으로 널린 람피온이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방안에는 장미 향기와 키에사만 남아있습니다.
 
눈물이 말라붙은 뺨은 건조하고 따갑습니다.
 
장미는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타오릅니다.
 
꽃말 그대로 정열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모아 얼어붙은 호수에 걸고 거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겠지요.
 
다 시들어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락방에 끊임없이 모아두고 모아두며…
 
이제는 압니다.
 
그 꽃들이 단순히 피고 지는 한때의 것이 아니었음을.
 
살아있고 살아가던 어느 목숨이라는 것을.
 
우울한 생각은 그만둡시다.
 
세수하고 짐을 마저 여미는 게 좋겠어요.
 
드디어 이 저택을 떠나는 날인걸요.
 
당신을 붙잡을 이도 따라올 자도 없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곳과의 작별뿐.
 
저택 내부는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방문을 열고 복도를 걸으며 계단을 내려 가는 동안 화마가 남긴 탄내가 장미 향기를 지웁니다.
 
열린 문 틈새로, 식탁이며 바닥에 무수히 많은 꽃이 피어 있습니다.
 
키에사:(이곳은 무수한 장미의 무덤. 한 아이가 유령으로 남고싶어 하지 않았던 곳. 고여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내가 살아있다는 건 네가 있었다는 것의 증명이므로. ...내가 가는 곳이 네가 가는 곳이고, 내가 보는 것이 곧 네가 보고싶었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오빠를 보러 가자. 보다 많은 곳을 누비자. 지치지 말고, 슬픔에 지지 않고... 초록빛 들판, 노오란 갈대밭, 푸른 바다... 그 무엇이든, 그리워하는 마음 하나만 간직한 채. 하나의 심장에 지고 있는 것은 여전한 두 사람분의 무게, 하지만 걸음은 무겁지 않다.)
 
키에사가 저택의 문을 열 때, 더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어서 오라고 세계가 인사하는 듯했지요.
 
숲은 길을 내고 흙은 당신에게 밟히기를 고대합니다.
 
이 숲의 끝에 도달했을 때, 당신은 비로소 가을을 맞이하게 되겠죠.
 
안녕히 가세요.
 
티아나 로스트, 키에사 생존
 
키에사는 저택을 떠난 후 12달 후 편지를 한 통 받습니다.
 
에필로그 회전하는 미로로 이어집니다.
 
1997년 어느 날,
 
키에사에게 편지가 한 통 도착합니다.
 
우편함에 꽂힌 흰 봉투에는 붉은 실링왁스가 붙어 있습니다.
 
장미처럼 보이는 모양새네요.
 
발신인을 확인하면 람피온의 저택, 라이아입니다.
 
키에사:(편지를 조심스럽게 뜯어본다.)
 
당신은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려갑니다.
 
편지지 사이로 사진이 한 장 동봉되어있습니다.
 
……. 라이아의 말마따나,
 
처음 만난 티아나와 똑같은 얼굴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습니다.
 
티아나입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읽어나갑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순진한 얼굴로 웃는 어린 너.
 
내가 두고 온 유년 시절의 모든 추억이 사진 너머에 갇혀있습니다.
 
그리고 키에사는 곧, 사진이 두 장이라는 걸 눈치챕니다.
 
다음 장에 담긴 것은 티아나와 키에사 두 사람입니다.
 
아니, 아니, 아니.
 
키에사가 아닙니다.
 
그 눈동자는 분홍색이었거든요.
 
사진 속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특히 키에사와 꼭 닮은 그 아이는,
 
절대 티아나를 놔주지 않을 것처럼 필사적입니다.
 
……그 무렵의 티아나가 그랬듯이.
 
펜을 든 손이 떨렸던 건지 글씨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라이아는 편지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편지 끝에 쓰인 날짜는 도저히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날짜입니다.
 
19살이 된 티아나가 람피온의 저택을 떠나는 날이 될 테니까요.
 
그 뒤에 적힌 거리의 이름은 키에사가 그 당시,
 
숲을 빠져 나와 제일 먼저 도달했던 곳이고요.
 
그래요. 티아나 또한 키에사를 잃은 채로……
 
편지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당신의 손에 남은 것은 두 장의 사진과 한 장의 편지가 전부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은 간신히 미로를 벗어났으니까.
 
답장하지 않는다면 사장될 이야기입니다.
 
미로의 회전축이 달그락거립니다.
 
키에사, 당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부디 언젠가는 저희에게도 알려주세요.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Epilogue. 회전하는 미로, END.
 
수고하셨습니다.
 
.
 
.
 
.
 
흑, 흑흑…….
 
키에사는 머리맡에서 들리는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눈을 뜹니다.
 
람피온의 저택을 떠나는 날,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입니다.
 
한번을 거르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도 음울하고 울적한 아침이에요.
 
커튼이 여름 바람에 흔들리고,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가 일렁입니다.
 
이 저택의 장미 향기는 도통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것 같더라니, 바닥이 온통 장미 꽃잎 천지네요.
 
이 저택에서는 지천으로 널린 람피온이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방안에는 장미 향기와 키에사만 남아있습니다.
 
눈물이 말라붙은 뺨은 건조하고 따갑습니다.
 
어젯밤의 일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티아나의 죽음, 미뉴에트의 낙화 같은 여름의 비극은 다가올 가을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그저 닿았던 입술, 손끝이 평소와 달리 따뜻했다고 기억해주세요.
 
여름의 온도를 떠올릴 때면 그 이름을 떠올리겠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지난날에 오래도록 머물러선 새로운 계절을 맞을 수 없을 테니까요.
 
키에사는 바닥에 쓰러진 장미 꽃송이가 눈에 익을 겁니다.
 
다락방에 가득히 무덤을 쌓아뒀던 말린 꽃과 꼭 같은 종류였거든요.
 
다만 죽은 채 말라붙은 것들과 달리 홧홧하게 불타는 꽃잎과 파르라니 빛나는 금술을 갖고 있습니다.
 
라이아가 이것을 호수의 둘레에 걸어 두면……
 
그로써 세계는 열 번의 겨울을 나겠죠.
 
짐을 챙깁시다.
 
가방을 닫고 잠그려는데,
 
책상 한쪽 구석에 놓인 오르골을 발견합니다.
 
고장이 나서 챙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부를 열어봐도 소리는 침잠하고 침묵하니 고요만 횡횡합니다.
 
가져갈까요?
 
키에사:(이런 것도 있었지... 챙긴다.)
 
오르골을 챙기면 정말 떠날 시간입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발걸음을 억지로 잡아뗍니다.
 
흩어진 꽃잎들 사이 당장에라도 티아나가 서 있을 것 같은데.
 
2층 침대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 것 같은데.
 
이 문을 열면 너머에는 네가 왜 이리 늦게 나오냐며 투덜거리고 있을 것 같은데……
 
부질없는 희망은 불티가 되지도 못하고 그을음으로 남아 가슴을 새까맣게 태웁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붙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세요.
 
이제는 열아홉 번째 여름을 영원히 뒤로 할 수 있도록,
 
가을과 겨울을 지나 스무 번째 여름을 맞을 수 있도록,
 
당신의 장미. 미뉴에트와 영원한 이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떨어진 꽃은 말이 없으니 이별은 모두 당신의 몫입니다.
 
이 방이 이토록 작았던가.
 
10살 무렵에는 무척 크게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작다 못해 볼품없이 느껴집니다.
 
그건 꼭 누군가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겠죠.
 
그저 키에사가 자라버린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기 전,
 
키에사: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신은 바닥에 흩어진 꽃잎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태엽입니다.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둥근 타원형의 태엽은 기계장치의 씨앗처럼 보이기도,
 
굳어버린 눈물방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키에사는 그 태엽의 있을 자리를 알고 있습니다.
 
오르골에 딱 이만큼의 빈자리가 있었잖아요.
 
키에사:... (오르골에 태엽을 끼워 맞춰본다.)
 
오르골에 태엽을 끼우면
 
끼익, 끼익.
 
오래도록 기름칠하지 않아 뻑뻑한 부품들이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끝에 달린 작은 손잡이를 돌리면 드디어 담긴 소리가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흑, 흑흑…….
 
머리맡에서 들리던 익숙한 울음소리.
 
그리고,
 
티아나의 목소리입니다.
 
열 번째 여름부터 열아홉 번째 여름이 오기까지,
 
그사이의 모든 목소리.
 
키에사가 알고 모르던 목소리들이 그곳에 담겨 있습니다.
 
태엽과 나사와 쇠와 철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어딘가 낡고 무뎌서 티아나의 것 같다가도
 
전혀 티아나의 것 같지 않습니다.
 
10살의 목소리는 너무 어린 탓에 정말 이랬던지 종잡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은 티아나의 부속품입니다.
 
티아나와 나누던 이야기,
 
둘이서 함께 내쉬던 호흡,
 
키에사가 주고받던 감정.
 
들어있는 것은 온통 우리의 기록이자, 추억.
 
결단코 잊을 수 없는 그 계절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금 키에사 의 곁에 머무를 테지만,
 
그 어떤 계절도 지나간 나날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건 이미 지나갔고 사라지고 불에 타 흔적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반복되는 상자 안에 갇힌 목소리가 지독하게 그리웠습니다
 
외전 끝.

핸드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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