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9. 26
요란스럽게 구는 낯선 목소리가 성가시기 짝이 없습니다.
몸이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탓에 멀미가 일 지경입니다.
설핏 깬 정신을 다시금 재우려 노력해 보지만,
워낙 강경한 모닝콜이라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요.
잠자리에 들었던 아샤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뜹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상대는 어느 때와 다름없는 르네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문장은 퍽 익숙한 목소리였던 것 같아요.
라고 무어라 물을 새도 없이, 창문의 커튼을 쥔 르네가 천천히 입을 엽니다.
아샤:(산만한 정신을 가다듬고, 목소리가 가리키는 곳 너머를 바라본다.)
검게 죽은 나뭇가지가 축 늘어진 팔처럼 바닥으로 쏟아지고,
건물 위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도로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도망칩니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바깥의 하늘은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온당 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것처럼 검은 구멍이 나있고,
주위는 시시각각 창백한 청동, 푸르스름한 시체의 색으로 물듭니다.
그 외에는 어떤 단어로도 이 광경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럽고 참담한 눈앞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아샤:
운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15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얄팍한 유리창 너머로, 커다란 재앙이 추락합니다.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높은 곳에서부터 거꾸로, 뒤집혀…….
죽음이 칼을 휘두르며 애곡과 비명이 들끓는 세계.
지옥이나 다른 바 없는 광경을 목격한 아샤, 이성 판정.
아샤:
SAN Roll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2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르네와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소한 볼일을 보고,
혹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
하루아침에 바스러진 일상을 발치에 두고 아샤는 집 안을 둘러봅니다.
집 안의 풍경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르네 또한 작금의 상황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네모난 방만이 온전한 세계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샤:(그러나 온전하지 못한 세계가 저곳에 있다. 창가에 선 르네를 천천히 돌아본다.) ...어떻게 된 일이야?
르네:(어느때와 다름없는 덤덤한 표정. 그러나 그 안에는 제법 당혹감이 섞인듯 몇번 눈을 깜빡였다.) 평소와 다르게 시끄러운 아침이여서 일찍 일어났어요. (그리고 덧붙인다.) .... 아샤, 사람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아샤:(요란하게 자신을 깨우던 건 어쩌면 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말은 어쩌면 그저 기민한 직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수습이 가능하기는 할지 가늠해보기를 포기하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응. 확인해봐야지.
르네:(다급하게 네 옷자락을 쥔다.) ...상황파악도 안하고 무작정 나가려고요? 마음이 급한건 알겠지만, 아샤... 우선은 이것부터에요. (다른 한손으로 TV리모컨 버튼을 누른다.)
TV를 켜면 모든 채널에서 긴급 뉴스가 방영중입니다.
익숙한 아나운서가 뉴스 데스크에서 속보를 전합니다.
“대한민국에 거주 중이신 모든 국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비상사태입니다.”
“현 시각 12시 41분,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전국에 발발하면서 각 도시의 건물 붕괴와 인명 피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 상황입니다. 현재 정부 각처는 상황 파악을 위해…….”
다급한 와중에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보도문을 읽던 목소리가 점차 뭉개지기 시작합니다.
흰 테이블 위에서 펄떡이는 모양새가 도마 위 횟감과 비슷합니다.
누가 자르지도, 비틀지도, 당기지도 않았는데……
채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누군가 큰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 스피커에서 여과 없이 터져 나옵니다.
한 박자 늦게, 아나운서가 천천히 자신의 입가를 매만지고,
빈자리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곧 둥근 뺨의 곡선 또한 무너집니다.
점토를 뜯어내는 것처럼, 오래된 음식이 부패하는 것처럼,
이윽고 원래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된 아나운서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다가옵니다.
걸을 때마다 진물과 같은, 피도 무엇도 아닌 진득한 액체가 스튜디오의 바닥을 적십니다.
아샤:
SAN Roll
| 기준치: |
69/34/13 |
| 굴림: |
28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케이블이 끊긴 것처럼 방송이 종료되고 대기 화면으로 전환됩니다.
새순이 돋아나는 봄철의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다른 채로 돌려보지만 방송은 정상 연결되지 않습니다.
아나운서의 꼴은 설명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었어요.
그렇다면 집 안에 있는 게 안전할 지도 몰라요.
창 너머로 저 멀리에 선 건물들이 하나씩,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하는 꼴이 보입니다.
시야가 간신히 닿을 만큼 먼 곳이지만, 분명히 어제도 그제도 멀쩡했던 건물이에요.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37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모든 것이 무너져, 탁 트인 시야 너머로 높이 솟은 십자가가 보입니다.
무너지는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직감을 닮은 어떤 확신이 듭니다.
땅을 파고 굴속으로 들어갈지언정, 하늘로 올라갈지언정,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언정, 바다 밑에 숨거나 그 누구의 도움을 구할지언정!
참담한 현실을 앞에 두고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7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흐느끼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은 기묘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듭니다.
TV는 꺼진 지 오래, 집 안에는 아샤와 르네 단둘.
안에서 들린다기엔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샤:...무슨 소리 안 들려? (눈을 아예 감았다.)
르네:(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너를 본다.) TV 소리...?
아샤:아니야. TV는 꺼졌잖아. (소리의 출처를 찾지 못하고 눈을 갸름하게 뜬 채로 주변을 둘러본다.) 뭔가를 먹으라고 하고 있어.
르네:... (그말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샤에게만 들린다거나. 아니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인공적인 소리가 한 번 더 들립니다.
[행정안전부] 긴급 대피 요망. 가까운 성당, 교회로 집합할 것.
아샤:정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어. (문자를 확인하곤 들고 있던 외투를 르네 어깨에 둘러준다.) 언제까지 이 안에 있을 순 없으니까 일단 움직이자. ...밖에 상황도 자세히 봐야 할 것 같고.
르네:(미미한 불안이 서린듯 여전히 네 옷자락을 꼭 쥐고있다.) ...놓지 말아요. 손.
아샤:...하하, 잡고 있어야 못 놓지. (미미한 웃음을 흘리곤 옷자락을 쥔 손을 제대로 감싸 잡았다.) 무서워, 르네?
르네:(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온기가 닿자 그제서야 너를 마주하고.) ....아샤가 다치는 것보다, 사라지는게 더
두려워요.
아샤:음... (무슨 반응을 해야 하지 난감한 눈으로 너를 잠시 보다) 알았어, 다쳐도 눈 앞에 있을게. (가볍게 대꾸하곤) 사라진 적도 없는데 왜 그런 걸 걱정해.
르네:그건... 내가 당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짤막하게 대꾸하고서 한걸음 먼저 나아간다.)
거리에 나서면 매캐한 냄새가 제일 먼저 아샤를 반깁니다.
불타는, 썩는 것 특유의 악취. 거리는 온통 쑥대밭이 된 상태입니다.
금이 간 아스팔트엔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찌그러진 차체의 파편, 무너진 가로등이 엉켜 길을 막습니다.
아샤:(잠깐 멈춰서서 발 앞의 시체를 살펴본다.)
서로 꽉 끌어안은 채 죽어있으므로 어우러진 피가 유난히 붉고 짙습니다.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5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목덜미는 여러 번 물어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광경임을 알아챈 아샤, 이성 판정.
아샤:
SAN Roll
| 기준치: |
69/34/13 |
| 굴림: |
79 |
| 판정결과: |
실패 |
아샤:...... (시체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간혹 극단적 상황에 몰린 이는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기를 택하고, 이번에도 그런 것일 줄 알았는데. 무거운 한숨을 내쉬곤 멀리서 움직이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아침인데도 어두운 하늘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괴물들의 정체가 녹아내리는 중인 사람이란 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것이라기엔 무디고 짐승의 것이라기엔 애매한 울음.
그때, 골목을 배회하던 그것과 눈이 마주칩니다.
아샤:
매혹
| 기준치: |
15/7/3 |
| 굴림: |
99 |
| 판정결과: |
대실패 |
르네:
매혹
| 기준치: |
45/22/9 |
| 굴림: |
75 |
| 판정결과: |
실패 |
그러나 괴물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두 사람을 발견 하지 못한 것처럼요.
아샤 매혹 기능치 +10 , 르네 매혹 기능치 +3
눈과 코도 없고 귀마저 뭉개졌으니 알아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어요.
지나치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면 안전할 것 같습니다.
성당에 가려면 이 괴물과 시체가 즐비한 거리를 가로질러야만 합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매달리는 것처럼 귓속을 파고들고, 어깨를 짓누릅니다.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86 |
| 판정결과: |
실패 |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11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거리에 선 건물은 대부분 무너지고, 폐허가 된 지 오래입니다만
몸을 피할 만한 곳을 거쳐 성당으로 가는 게 좋겠군요.
아샤의 집과 성당 사이에 들를 수 있는 곳은
병원,
식당,
지하철역입니다.
새하얀 페인트칠로 완벽하게 마무리한 외벽은 눈부시게 깨끗했습니다.
오늘 본 병원은 무너지고 쓰러진 건물의 여파로
외벽이 검게 그을리고, 창문이 깨지고, 난간이 휘어진 상태입니다.
난리 통에 단단히 고장나 딱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틈만 벌어진 채로 멈춰 섰습니다.
아샤:
크기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73 |
| 판정결과: |
실패 |
아샤:
근력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87 |
| 판정결과: |
실패 |
근력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4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시체 썩는 냄새와 싸늘한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한 냄새가 스밉니다.
대신 다 녹아내린 시체가
대기 의자나
접수대까지 널려 있을 뿐입니다.
불길하게 점멸하는 형광등 탓에 더 스산하게 느껴집니다.
상아색이었던 의자는 이미 더러워진 지 오래입니다.
무엇으로 더러워졌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맙시다.
녹다 만 시체가 의자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려 있습니다.
환자복을 입고 있지 않으니, 적어도 병에 걸린 환자는 아니었겠죠.
이렇게 갑자기 녹아내릴 정도로 위중하진 않았을 거예요.
뉴스 보도대로 전염병이라기엔 어딘가 석연찮습니다.
아샤:
운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5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의자 아래에 떨어진
작은 수첩과
스마트폰이 눈에 띕니다.
단정한 손글씨로 꾹꾹 눌러 적은 일기가 절반쯤 채워져 있습니다.
평범한 일기일테니 이 상황에 별다른 도움이 되진 못하겠지만……
눈에 띄었다는 건, 어쩌면 읽어 주길 바라는 걸지도 모릅니다.
몇 군데 병원을 들렀는데, 다들 볼거리라기에 으레 그런 줄 알았더니……
볼거리가 아니라 물혹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동생은 수술을 받아야 한단다.
이제 겨우 두 살인데……. 부모님은 입원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동생 때문에 마음 졸이다보니 내일이 내 생일인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엄마와 아빠가 미안하다며, 동생의 병문안을 다녀온 다음엔 케이크와 선물을 사러가기로 했다.
단정한 글씨로 적은 일기는 선하고, 상냥하기 짝이 없습니다.
휴대 전화를 확인해보면, 오늘이 9월 26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이 생일인 시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나요?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4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아샤:(누군가의 마지막 기록을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주워본다.)
사람들은 멀쩡한 모습으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순번을 기다리거나, 약을 처방받기 위해 드나듭니다.
영상의 초점은 병원 한가운데 선 어떤 이를 겨냥합니다.
초점은 집요하게 한 점을 쫓고, 피사체는 기대에 부응하듯 번쩍 고개를 치켜 듭니다.
치켜든 고개가, 뺨부터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뉴스 속 아나운서처럼, 이마가 무너지고 코가 뭉개지고, 피눈물이 흐릅니다.
처음 보는 끔찍한 광경에 주위에 선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지만…….
최초의 발원지인 그가 옆 사람의 목덜미를 깨물고,
곧 꽃망울이 터지듯 비슷한 증상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영상에 담긴 모든 이들이 아래로, 아래로 흐릅니다.
아우성과 함께 화면이 몇 차례나 뒤집힌 후, 천장을 비춥니다.
지금 우리가 머리 위에 지고 있는 바로 그 천장입니다.
누구랄 것 없이 죽음을 질겁하고 삶을 구걸했으므로 목소리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휩쓸고 간 병원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습니다.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하던 지옥이 바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아샤:(발원지를 찾았음에도 원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끄고 접수대로 가본다.)
르네:(묵묵하게 네 뒤를 따라간다. 피 웅덩이를 최대한 피해서... 한걸음, 한걸음.)
컴퓨터 앞에서 엎어진
간호사, 그리고 접수대 아래에 쓰러진
의사.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68 |
| 판정결과: |
실패 |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76 |
| 판정결과: |
실패 |
물론 끔찍한 몰골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시체 아래 깔린
검은 파일철의 모서리가 보입니다.
진료를 보거나, 보아야 할 내용을 정리해 둔 파일철입니다.
전문 용어로 가득하고, 군데군데 번져서 제대로 읽기가 어렵습니다.
이상 증세라든가, 갑자기 녹아내리는 전염병의 징후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들이닥치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 인가요?
재앙의 진상이 병마가 아니라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첫 장 끄트머리에 쓰다만, 거칠게 휘갈긴
메모가 눈에 띕니다.
읽는다고 무언가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라 무척 유감이지만요.
다만 의사의 메모를 보며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1. 9월 26일 오늘, 사람들이 갑자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2. 녹아내리는 인간들은 서로, 혹은 스스로 잡아먹는다.
여기까지 떠올렸다면, 그전부터 가져왔던 가설에 확신을 얻을 것입니다.
아샤:(인간을 물고, 물리면 똑같이 변하고, 변하면 다시 다른 인간을 물고...) 아무래도 좀비인 것 같지.
르네:.... 영화로만 봤었는데. 이런 일이 가능하긴 했었나봐요. (현실감 없는 기분.)
아샤:병원들이 죄다 이래서야, 당장 치료제 같은건 꿈도 못 꾸겠지. (약품 몇 가지를 둘러보다 쓸만해 보이는 걸 챙긴다.) 이제 시작이니까, ...오래 지치면 안되겠네.
르네:(네 곁에서 쓸만한 구급약 하나를 찾아낸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듯.).....아샤는 지금, 슬퍼요? 화가 나요?
아샤:...글쎄. (바닥의 시체들을 응시하다 네게 고개를 돌린다.) 어때 보여?
르네:(무심한 눈으로 시체들을 내려보다가 손가락으로 너를 가리킨다.) 표정이 굳었어요. 웃지도 않고. ...이상해요.
아샤:아직은 슬퍼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어. 그런 건 다 잃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약품을 다 챙기자 허리를 펴곤) 그냥... 나는 안타까워. 너는 어때.
르네:아샤답네요. (외투를 여매고 네 옆에 선다. 어느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저는 이왕이면 깔끔한게 좋아요.
아샤:르네도 르네다워. (다시 네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선다.) 깔끔한 죽음같은 게 어디 있어. 뭐든 남을 거야. 죽는다는 생각은 먼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르네:.... ...(침묵이 이어진다.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다가) 아샤가 있는한 그런 일은 없을거라는걸 알고 있거든요.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그사이 훨씬 더 녹아내려선, 팔로 바닥을 기어다니는 경우도 흔히 보입니다.
아샤:
매혹
| 기준치: |
25/12/5 |
| 굴림: |
38 |
| 판정결과: |
실패 |
르네:
매혹
| 기준치: |
48/24/9 |
| 굴림: |
6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아스팔트를 적시는 젖은 액체가 질척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눈도 없는 것들은 두 사람의 숨소리를 쫓는지 금세 발치에 몰려듭니다.
도망쳐야 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운 걸까요?
아샤:
정신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4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거리를 배회하는 괴물은 난데없이 쳐들어온 외계의 것들도 아니고,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도 아니에요.
이런 모습이 되어 가장 괴롭고 비참한 것은 괴물이 되어 버린 자신이겠죠.
좀비들은 느리고 지지부진할지언정 멈추지 않고 르네를 향해 기어 옵니다.
코앞까지 다가온 좀비는 커다랗게 입을 벌려 르네의 팔을 물어뜯습니다.
아샤:
SAN Roll
| 기준치: |
68/34/13 |
| 굴림: |
3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좀비는 결단코 입에 문 것을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무딘 이로 인간의 살점을 뜯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오히려 좀비의 얼굴이 문드러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요.
죽은 자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등골을 서늘하게 문지릅니다.
아샤:
근력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4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희게 막이 서리고, 녹아내리던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순간 청명함을 되찾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들은 떼어 내도, 떼어 내도,
처음에는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는데,
어지러운 머릿속을 매캐한 흙냄새가 헤집습니다.
아샤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치료를 위해서라도 서둘러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창밖의 풍경도, 문안의 광경도 끔찍하지만, 식당은 제법 멀끔합니다.
시체가 바닥을 적시고 있긴 해도 걸어 다니진 않는군요.
‘최초의 발원지인 그가 옆 사람의 목덜미를 깨물고, 곧 꽃망울이 터지듯 비슷한 증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좀비 떼를 떼어 놓자 시선은 자연히 잇자국을 향합니다.
아샤:
지능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7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하지만, 영상에서는 물리는 것과 동시에 감염이 시작……
아샤:
응급처치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83 |
| 판정결과: |
실패 |
(병원에서 챙겼던 약품들로 기본적인 응급처치를 한다.)
르네:....생각보다 별로 안아파요. (슬쩍 네 안색을 살피며 말한다.)
아샤:...보면 알아, 아프다는 거. (무딘 이로 몇번이고 짓씹힌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수년 간 안전한 나날들이 이어져 그새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죽음은 또 너를 덮치려 하는데.) 상처 부위 말고 이상한 곳은 없어?
르네:.... 정말 괜찮은데. (작게 중얼거리다가 꼼꼼하게 붕대로 마무리한 자신의 팔을 본다. 말없이 네 손을 잡고서) 조금 욱신거리는거 빼고는 별다른건 없으니까... 걱정마요. 스스로 이상하다 느낄때즈음엔, 내가 날 내버려두지 않을거거든.
아샤:(그제서야 네 팔을 무릎에 내려놓고는 잡은 손을 내려다본다.) 무슨 뜻이야?
르네:(간단명료하게 대답한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깔끔한 죽음.
아샤:...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 말을 끝맺지 못한 채로 쓰게 웃었다. 네가 죽음을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고, 너는 나를 어렵게 믿었다. 너를 나무랄 수 없다. 제 잘못이다.) 미안해.
르네:(평소와 다른 미소를 물끄러미 살핀다. 옛적에나 보았던 그 얼굴이다. 죽는건 나인데,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어? 다른 손으로 네 볼을 쿡, 찌른다.) 어디까지나 가정의 경우에요. 적어도 지금의 나는 멀쩡하니까. 아샤는 잘못한게 없는데... 왜?
아샤:다쳤잖아. (어렵게 뱉은 지켜주겠다는 말은 이렇게 쉽게 자격을 잃는다. 볼에 손가락이 닿자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본다.) 관대하네, 르네.
르네:(이 정도는 상처가 아니래도.) 몰랐어요? 난 처음부터 아샤에 대해선 관대했는데. (슬쩍 손을 바꿔 뺨을 쓰담아준다.) 지키지 못해도 괜찮아. 해낼 수 없어도 괜찮아.
당신이 이뤄내지 못하는건, 내가 이뤄줄거거든.
아샤:스스로 지키겠다는 말이야? (붉게 물들어 걷어 올린 소매를 바라보다) 그런 뜻이라면 좀 반가울 텐데.
르네:무슨 소리를 하는거에요, 아샤? 내게 있어서 고려대상은 오직 이 세상에서 당신 하나뿐인데. 당신을 지키고, 당신이 원하는걸 이뤄줄게. 내가 짓물러져 저들처럼 되더라도. (방긋 웃었다.)
아샤: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 사실은 알고 있지? (네 웃음에 마른 세수를 한번 하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에게 좀 더 박해질 필요가 있어.
르네:(말없이 어깨만 으쓱이더니 영상을 재생한다.)
처음 보는 끔찍한 광경에 주위에 선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지만…….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11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최초의 발원지인 그가 옆 사람의 목덜미를 깨물기 직전,
영상의 모서리를 확인하면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영상 속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서로를 먹어 치웁니다.
물리기 전에 이미 녹아내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녹아내리는 좀비들이 서로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단거죠.
반면, 르네의 상처는 기껏해야 멍이든 게 고작입니다.
욱신거리고 아프지만 절대 심각한 상처는 아닙니다.
누가 보아도 사람의 것인 잇자국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요.
사람에게 물려도 파상풍에 걸릴 수 있다는 걸 아나요?
치료가 끝나면 홀을 둘러보거나 주방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흰 테이블보 위며 아래에는 시체가 쌓여 있습니다.
음식이 담긴 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난 채……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100 |
| 판정결과: |
대실패 |
창문도 문도 전부 닫혀 있는데, 어디선가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립니다.
매달리다시피 엎드린 그는 멀쩡한 꼴은 아닐지언정
‘아직’ 살아 있습니다.
두 사람을 발견 했는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팔이 앞으로, 앞으로 뻗어 나옵니다.
필사적으로 테이블 위를 움켜쥐지만, 테이블보만 조금 구겨질 뿐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라기보단 흐물흐물한 풍선의 마지막 소리 같습니다.
아샤:
매혹
| 기준치: |
28/14/5 |
| 굴림: |
44 |
| 판정결과: |
실패 |
살아 있는 주제에 좀비처럼 구는 그것은 밀쳐 내지 않아도 스스로 자멸합니다.
테이블 위를 기던 상반신은 기울어져, 의자 아래로 떨어집니다.
얼마 남지 않은 상반신마저 천천히 녹아내리네요.
아샤:
SAN Roll
| 기준치: |
67/33/13 |
| 굴림: |
6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아샤:(녹아내린 시체에게서 겨우 고개를 돌리고 주방으로 향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문을 연 주방에는 요리사 복장을 한 좀비가 배회하고 있습니다.
이지가 없는 것처럼 이쪽 벽에 부딪히면 저쪽 벽까지 걸어가 또다시 쾅 부딪힙니다.
아샤:
매혹
| 기준치: |
36/18/7 |
| 굴림: |
2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까 몽. (GM):
매혹
| 기준치: |
48/24/9 |
| 굴림: |
1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르네:
매혹
| 기준치: |
48/24/9 |
| 굴림: |
6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아샤:
민첩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5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르네:
민첩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2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싱크대,
냉장고,
조리 테이블을 볼 수 있습니다.
싱크대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묻은 접시들이 들어 있습니다.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13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아샤:(계속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한 르네를 흘긋 돌아보고, 냉장고를 연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음식물 쓰레기입니다.
구더기가 끼고 파리가 들끓는 썩은 고기와 숨이 죽어 회색빛으로 메마른 식물들.
……그러고 보니 싱크대의 그릇에도 음식물 쓰레기가 묻어 있었죠.
오늘 내간 그릇이라면 그렇게 더러울 수는 없었을 텐데.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영업하던 식당의 냉장고 안이 이럴 수가 있는 걸까요?
썩고 녹아내려, 흉한 몰골로 변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다른 접시에는 음식이 없거나, 쓰레기가 올라 있거나, 음식이 되지 못 한 재료들이 썩어 빠졌지만…….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5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조리 테이블 끝에 클로시가 덮인 그릇이 하나 보입니다.
난장판이 된 테이블 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
꼭대기를 장식하는 무화과는 설탕을 발라 반지르르하게 빛나고 있지만……
보암직하거나 먹음직하기는커녕, 시체를 한 조각 잘라 둔 것 같습니다.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6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어울리지 않는 무화과의 다디단 향기가 감미롭게 시체 사이를 떠다닙니다.
달콤하기 짝이 없으니, 어서 나를 먹으라고……
다시 보니 그것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군요.
아샤:(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발 아래 녹아내린 것들만이 눈에 담겼다. 인간이 녹은 악취를 덮을 정도로 단 향은 오히려 달갑지 않았고, 그 기묘한 붉은색에 찝찝함만이 속을 태울 뿐이다. 타르트를 외면한 채 등 뒤의 르네를 바라본다.) ...배고파?
르네:(배가 고파보이진 않는 얼굴을 두어번 젓는다.) ...저것 혼자 멀쩡하네요. 꼭...
누군가가 발견하고, 먹어주길 기다린 것 처럼...
아샤... 안먹을거에요?
아샤:이 한가운데서 뭘 먹을 만큼 비위가 좋지는 않아. (고개를 젓는 모습에 클로시를 다시 덮는다.) 이거 말고는 뭐가 없는 것 같네. 먹을 생각이 없다면... 나갈까?
르네:(슬쩍 네 손을 잡는다.) ...응. 좋아요.
무화과타르트 외의 음식은 대부분 땅에 떨어지거나 시체에 깔렸기 때문에 입에 대기 꺼림칙합니다.
아샤:
건강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65 |
| 판정결과: |
실패 |
식당을 나서, 길목에 서면 좀비의 수가 퍽 많이 줄었습니다.
애당초 제대로 형태를 갖춘 개체도 거의 없습니다.
아샤:
매혹
| 기준치: |
36/18/7 |
| 굴림: |
7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르네:
매혹
| 기준치: |
48/24/9 |
| 굴림: |
1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혀가 녹아내린 것들은 음울한 울음소리를 내며.
잿빛 도로는 붉은 피를 카펫 삼아 화려하게 치장합니다.
익숙한 길목을 걷는데, 주위의 풍경이 이상합니다.
보도블록 사이에 피었던 이름 모를 풀꽃도, 도로 근처에 아름드리 드리웠던 나무도,
주택가의 담벼락을 타고 자라던 장미와 담쟁이덩굴도……
아샤:
운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7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걸음 바로 앞에 무언가 처박힙니다.
딛고 선 바닥이 흔들 릴 정도로 요란한 붕괴입니다.
그 옆에 있던 건물마저 순서대로 무너지고 맙니다.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로부터 아샤, 회피 판정.
아샤:
회피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73 |
| 판정결과: |
실패 |
무거운 기둥에 다리가 짓눌려 이동할 수 없습니다.
아샤:
근력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20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앞으로 르네는 민첩, 회피, 건강 등 신체 기능과 관련된 판정에 페널티 다이스를 하나 얻습니다.
르네:(언제 입술을 깨물었냐는 듯 평소의 얼굴로.) ...조금만 부축해줄래요?
아샤:(부은 발목의 상태를 살피다 뒤의 행렬을 뒤돌아본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목에 네 팔을 두르고 일으켜 세웠다.) 걸을 수 있어?
르네:... ...이 정도면 괜찮아요. (부어오른 발목을 보고서도 무심하게 발을 움직여본다. 미미한 찌푸림이 일순간 지나갔으나,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평온했기에.) 시간도 없고.
아샤:...그래, 괜찮다는 말이 습관이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네 무릎 밑으로 팔을 받쳐 몸을 안아 올린다.) 움직이면 더 부을 거야. 불편해도 잠시만 이렇게 가자.
르네:... ....(보였나? 하는 얼굴. 그러나, 다급한 상황에 토를 달만큼 상황파악이 부족하진 않았다. 얌전히 네게 몸을 맡기고 정면을 응시한다.) ...조금 빨리 가야겠어요.
르네가 잔해에서 빠져나와도 붕괴는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이었던 것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콘크리트 사이사이 샌드위치 속 재료가 되고 맙니다.
하늘을 꿰뚫을 듯 치솟았던 모든 지붕이, 도시가, 문명이 무너집니다.
죽음과 멸망이 창궐하던 중, 아기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주위의 건물은 모두 무너져 산 사람이 그 아래에 깔렸다면 살아남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르네 또한 함께 울음소리를 들었으니까요.
숨넘어갈 듯 요란한 울음소리가 꼭 두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선명합니다.
소리를 따라 홀연히 걷다 보면 지하철역에 도착합니다.
아래로 뻗은 계단을 두고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린 입구가 스산합니다.
지하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 계단을 내려가는 건 너무 위험하고…….
르네: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였다면, 진작 그랬어요.
...가요.
아샤:...지금은 혼자 있는 게 아니니까. 원한다면 어딘가에 몸을 숨길 곳을 찾아줄 거야.
르네:아샤가 불안하다면.... 내려줘요. 한걸음 뒤에서 따라갈게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아샤:(조심스레 너를 땅으로 내려놓고, 손을 잡은 채로 앞장 선다.)
몇 칸을 밟아도 우려한 것처럼 괴물이 갑자기 등장하거나 위험한 일이 벌어지진 않았습니다.
지하에 가까워질수록 시시각각 불길함이 느껴집니다.
지하의 바닥에 다다르면 불길함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발 디딜 곳도 없이 역사를 꽉 채운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으니까요.
종말을 피해 바닥으로 파고든 그들은 결국 지상의 괴물과 똑같은 꼴입니다.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5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아기 울음소리와 뒤섞인 낯선 목소리가 신경을 가느다랗게 긁습니다.
시체를 피해 걸음을 옮기려 해도 워낙 빼곡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림짐작해 보아도 족히 도시 하나의 인원일 것이라고 쉽게 예감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아기를 찾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울음소리가 이정표가 되어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기는 아주 앳된 티가 나고 스스로 목을 가누기도 어려워 보입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앙앙거리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인상을 와락 쓴 탓에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고, 사정없이 구겨졌습니다.
휘어지는 눈꼬리며 칭얼거리는 입매도 똑 닮았습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어깨와 가슴을 새근새근 들썩이다가……
땡볕 밑의 눈사람처럼 뼈대도 남기지 않고 녹아내린 아기는 그저 뜨겁고 축축합니다.
텁텁한 플라스틱과 고무 냄새가 코끝을 마비시킵니다.
그제야 아샤는 자신이 안은 것이 살아 있는 아기가 아니라
……장난이라면 도가 지나치고, 우연이라기엔 무척 불길합니다.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85 |
| 판정결과: |
실패 |
팔다리조차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윤곽이 불분명합니다만 얼굴만은 온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아는 르네보다 어딘가 어리거나, 어딘가 늙거나, 어딘가, 어딘가 다르지만……
아샤:
매혹
| 기준치: |
36/18/7 |
| 굴림: |
73 |
| 판정결과: |
실패 |
탑승객을 태울 수 없사오니, 자리에 앉아 종말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천장에 걸린 화면에는 열차가 없다고 쓰인 글씨가 요란하게 깜빡입니다.
하긴, 세계가 죽어 가는데 열차가 정상 운행될 리 없겠죠.
다음 정거장에도, 이번 정거장에도, 이전 정거장에도 열차는 멈춰 서지 못하겠죠.
망자를 태우는 열차가 아닌 이상에야 탈 이도 없겠지만요.
이대로 역사에 앉아, 우리도 녹아내리길 기다릴까요?
아샤:(인형들의 얼굴을 확인하면 잠시나마 몸이 굳었다. 왜 이것들은 모두 너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잡고 있는 손을 의식해 시선을 네쪽으로 돌리면, 너 또한 형편 없이 망가진 이것들을 보고 있을지. 그저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몸을 돌렸다.) 보지마.
르네:.... 아샤.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 앞은 금방이고 어둡게 물들고 만다.그저 놓치지 않겠다는듯 꼭 붙들고 있는 온기만이 유일한 선로인것처럼. 쿵, 쿵 울리는 심장소리는 누구의 소리일까. 잠시 겉도는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금 너를 본다.) ...두려워요?
아샤:...응. (잡고 있는 손은 떨리지 않았고, 옮기는 발걸음에는 망설임도 없었지만 대답은 짧고도 분명했다.) 이런 게 익숙해질 것 같아서 두려워. (거리에 널린 시체를 작은 묵념조차 없이 넘어가는 것. 녹아내리는 사람을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는 것. 그들에게 손을 뻗지 않는 것. 죽음 앞에서 사람과 인형을 먼저 구분하려 드는 것. ...그리고,) 세계가...
정말 죽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르네:... 모든게 무너져내리고 있어요. (하루아침에 종말이 다가와도 두려울 것 하나 없었다. 온세상이 피로물든 이 순간조차도. 세계가 멸망해도, 어제 인사하고 지나갔던 사람이 오늘은 굴러다니는 시체더미에 불과하더라도. 지금 이 손을 잡은 당신만 무사한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그럼에도. 당신이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나와는 달랐기에 질문을 던졌다.) ...아샤는, 스스로 무력하다 생각해요?
아샤:남이 보기에도 충분히 무력해.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적이라면 그를 막아서기라도 할 텐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르네:하지만 당신이라면... (포기하지 않겠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나서겠지. 그게 르네 보니타가 이해할 수 없는, 아샤 체르니였으니까.)
..... 나갈까요.
아샤:그래. ...교회로 가자. (자신이 살아있는 한, 네가 살아있는 한. 모두가 죽지 않는 한 누군가는 있을 것이라 믿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절망 뿐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희망을 믿는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여전히 태양이 있던 자리는 텅 빈 구멍이 된 탓에 시간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꼭 시간이 멈춘 듯 기나긴 정적을 드리우는군요.
곰팡이가 핀 것처럼 희고 붉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13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새는 떨어지며, 물고기는 떠오르고, 녹아내리는 인간의 지성과 육신이 참담합니다.
죽음이 남겨 둔 홀쭉한 껍질만 바닥에서 질척거리는군요.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5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핏기없던 시체의 색이 어느새 사라진 하늘은, 불꽃과 연기에 휩싸여 화려하게 치장했습니다.
노을이라기엔 불길하고, 석양이라기엔 끔찍한 색.
굉음과 함께 긴 꼬리를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별입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장면은 다시 볼 수 없을 장관입니다만,
저 멀리 그려지는 별의 궤도가 아니라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별이 떨어진 곳마다 불이 붙고, 화마가 치솟습니다.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던 건물도 차례차례 부서집니다.
지각 아래에서 용이 깨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땅이 요란하게 흔들립니다.
아샤:
관찰력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83 |
| 판정결과: |
실패 |
두 사람의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이 눈에 띕니다.
이대로라면 그 별에 짓눌려 쥐포구이가 되 거나, 혹은 폭파의 여파에 휩쓸려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샤:
회피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77 |
| 판정결과: |
실패 |
끔찍한 소리가 바로 뒤에 떨어진 건 그때였습니다.
땅을 쪼개고, 별을 부수는 소리는 뼈를 긁는 것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습니다.
아샤:
SAN Roll
| 기준치: |
66/33/13 |
| 굴림: |
99 |
| 판정결과: |
실패 |
눈만이 아니라 팔등이라든가 목덜미, 뺨 같이 드러난 부위에 긴 생채기가 보입니다.
날카로운, 부서진 것들이 스치고 지나가며 만든 상처입니다.
아샤:
지능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상처 입을지언정 우리는 아직 인간이고, 형태를 유치하고 있습니다.
르네:....깔려죽는건 면했으니까, 이 정도는. (슬며시 다른 한쪽으로 보이지 않는 눈을 가린다.)
아샤:(흰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손으로 훔쳤다. 아침까지 네가 걸음걸음을 살펴 디뎌 희었던 옷감은 남의 피가 아닌 너의 피로 적셔진 지 오래였다. 엉망인 네 곁에서 홀로 멀쩡함에 면목이 없었다. 과연 죽음이 사랑하는 운명이다.) ...다행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르네:(조금 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프다, 라는 감각보다 옷이 더러워진 것에 대한 불쾌감이 먼저 찾아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또다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겠지.) 이런 다 죽어가는 세상 속에서 당신 혼자 남겨지는 것보단. (어차피 우리 중 누군가가 다칠 수 밖에 없다면, 그건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는 쪽이 훨씬 좋았다. 죽음은 제 그림자와 마찬가지지 않는가. 반대로 말하자면, 매 순간의죽음 앞에서 자신이 기적처럼 이곳에 서있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편이 낫잖아.
아샤:르네 보니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저울에 올려놓으면서 네 쪽으로 기울어지지는 않는다. 죄책감에 일그러질 수도, 고마움에 웃을 수도 없는 얼굴로 너를 보았다.) ...네가 그냥 살아있기만을 바란 적 없어. (목숨만을 겨우 건졌다며 안도할 생각 없었다.) 무사하게 살아야지. 다행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르네: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번의 생사를 오갔는지,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있으면서도. (한쪽을 잃어버린 세상은 생각만큼 버겁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다. 나에게 있어서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제 곁의 온기를 느끼는 것조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삶이 있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희생은 감수하고서 당신 곁에 서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나쁘지 않은 거래인가.) (옷 한자락을 찢어 가볍게 동여맸다. 더는 네가 신경쓰지 않도록 선명한 핏자국은 외투로 가리고,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곳에 가자고.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을 부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아샤는 다정해서 매번 나를 걱정해요.
아샤:그렇게 많이 생사를 오갔으면서, 너는 정말 단 한번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 없어? (아프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나, 죽기 싫다는 마음.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걷어낼 수 없는 그런 당연한 마음이 네게 없는 것처럼 굴 때마다, 그런 것을 찾아주고 싶어 견디기 어려웠다.) 네가 너를 걱정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할 거야. 네가 스스로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할 거고,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대신 해주려고.
르네:...살고 싶으니까. 다행이라고 말하는거에요. 이전의 나였으면 어땠을거 같아요? (날아오는 별을 피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어떤 죽음이 닥쳐오더라도 막아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삶은 언제나 갈피없이 흔들려 조금의 바람에도 날아가고, 흩날려서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는데.) 아샤가. 내 히어로가 있으니까 나도 노력하는거야. (제 아무리 노력한다한들 사랑해보지 않았던 것을 품에 안기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유일하게 품을 줄 알았던 너를 통해 감정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여기까지가 르네 보니타의 최선이었다.) ... 앞만 보고 걸어도 돼요. 잘 따라가고 있다니까.
아샤:......(살고싶다. 그런 말을 네 입에서 들으면 그것만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고싶어 하는 것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너를 대신해 살아줄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이제서야 드는 조바심 때문이다. 지금의 세계는 무참히 무너져 내리고 있고, 네가 사랑해 마땅할 것들이 하나씩 부서진다.)
르네:(그럼에도 불구하고 . 목적지는 바로 눈 앞까지 다가왔다. 부르고 있다. 세계가, 우리를. ) ...갈까요. 더 늦어지기전에.
밤하늘의 별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고,
아침이 돌아오는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강렬하게 깨지는 나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가 사람의 이성을 갉아먹고 좀먹는다는 사실 입니다.
아샤:
정신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고개를 흔들면 소리도 별처럼 부서져 고운 가루로 흘러내립니다.
불길한 소리는 계속해서 당신을 구하고, 원하고, 찬양 하지만,
손가락 끝에 닿는 체온이 아샤를 현실로 잡아당깁니다.
눈을 깜빡이면, 어느새 존재하지 않는 삿된 소리는 사라지고,
텅 빈 거리 위에는 여전히 두 사람만이 살아 있습니다.
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르네가 속삭입니다.
르네는 시야가 온전하지 않아 비틀거리면서도 똑바로 걸어갑니다.
성당의 입구에 설 때까지도 별은 끊임없이 떨어졌습니다만,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탁하게 변한 흰색 벽돌,
견고하게 쌓인 탑과 구원자의 죽음을 전시한 십자가.
그 앞에 서니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본능 같은 위화감입니다.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리고 몇 걸음 앞선 르네가 당신을 돌아봅니다.
르네:아까 그 문자... 다시 한 번 확인해볼래요?
여기……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뒷덜미를 스칩니다.
[행정안전부] 긴급 대피 요망. 가까운 성당, 교회로 집합할 것.
아샤:(세계가 부른다는데, 자신이 안 갈 수가 있나.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석고로 세운 조각상의 시선이 두 사람을 내려다봅니다.
열쇠를 쥔 성인과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
근엄하고 경건하기 그지없는 풍경이건만 오늘따라 왜 이리 스산하고 불길한지요.
하지만 앞선 르네가 밀어봐도 성당의 문은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습니다.
아샤가 손을 대면 한 치의 저항 없이 매끄럽게 열립니다.
예배당에는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내려앉았습니다.
별이 추락하는 소리도, 낯선 목소리의 속삭임도, 아기 울음소리와 말발굽 소리, 요란한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바깥의 근심, 걱정은 모두 거짓처럼 느껴집니다.
천장까지 솟은 기둥 사이로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색색의 빛을 떨굽니다.
좌우로 늘어선 긴 의자, 앞에 솟은
단상은 무난하게 성당의 구색을 갖췄습니다.
포도나무와 엉겅퀴 문양을 새겨 넣은 단상에는 두꺼운 책이 한 권 놓여 있습니다.
검은 가죽 표지에는 당연하지만,
성경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는 처음 보지만 어쩐지 익숙한 문장이 빼곡합니다.
뒤로 갈수록 일목요연하게 멸망을 노래하고 종말을 예고합니다.
여태 당신의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와 똑같지 않았나요?
성경의 몇 가지 구절을 들춰보면, 종말의 징조, 과정, 결과…….
심지어, 당신이 보아온 광경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모든 것의 마지막이 이미 정해져 있었단 걸까요?
아샤:
SAN Roll
| 기준치: |
64/32/12 |
| 굴림: |
71 |
| 판정결과: |
실패 |
새파란 이파리를 낸 나무 두 그루는 똑같이 생겼습니다.
거울에 비춘 것처럼 가지의 방향만 반대로 섰을 뿐.
아샤:
교육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80 |
| 판정결과: |
실패 |
최초의 낙원,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그 이파리로 몸을 가렸다죠.
무화과나무가 가지를 드리우면 향긋한 단내가 밀려옵니다.
꽃도 열매도 보이지 않고, 바람도 들지 않는데
두 나무 중 한 그루의 가지에만 숨겨두듯, 무화과가 달려 있습니다
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한껏 무르익었습니다.
무화과 그림자 아래, 나무껍질에 새겨진
글씨가 보입니다.
좌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는 단 한 알의 무화과가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우편, 생명나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77 |
| 판정결과: |
실패 |
뱀같이 교활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다시금 속삭입니다.
아샤:(안 먹는다... 이런 곳에 있는거 함부로 먹는거 아니다..)
아샤:
운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4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삼키고 맙니다.
평범한 무화과는 부드럽다 못해 물러 터져선, 저항 없이 떨어집니다.
흐물흐물하게, 혀 위에서 녹는 식감이 꼭 봄에 내린 서리 같습니다.
잇자국을 남기고 뭉개진 단면은 혈관처럼 우둘투둘하게 일어나 여태까지 본 시체를 연상시킵니다.
분명히 혀끝에는 달기만 한데, 어째서 이토록 불길할까요?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연달아 고요하던 성당을 할큅니다.
마치 예배당의 모든 창이 깨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면 여전히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들었던 소리가 모두 거짓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르네는 이번에도 듣지 못한 건지 태연한 얼굴입니다.
르네:(무슨일 있냐는 얼굴로 되려 너를 본다.)
아샤:......이번에도,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천장까지 솟은 기둥 사이로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색색의 빛을 떨굽니다.
색에 물든 유리 조각은 부서지고, 재조립되어 새로운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창틀에 걸린 불규칙한 무늬의 배열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첫 번째: 화려한 빛무리에 둘러싸인
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탄생을 축하하듯, 태초부터 존재하던 빛은 나팔을 불고 어둠은 요람을 펼칩니다. 오직 홀로된 자.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
그 권능이 완전하고 완벽하여 전지전능하니 타종이 필요치 않습니다.
두 번째: 궁창의 물이 갈라져 구름을 찢고, 바닥의 물은 흘러넘쳐 바다를 이룹니다.
물이 말라 드러난 곳은 땅이 되니, 신이 밟은 곳은 평야가, 밟지 않은 곳은 산이 되었습니다.
빛과 어둠은 낮과 밤이라 불립니다.
세 번째: 풀과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과목이 자라니 보기 좋았습니다.
하늘에는 날개 달린 새들이 둥지를 틀고, 바다에는 온갖 모양의 물고기와 짐승들이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땅의 짐승들 또한 넘어지고 내달리며 빈 곳을 채웁니다.
네 번째: 신은 자기 형상 곧 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심혈을 기울인 끝에 기어코 남자와 여자가 첫 숨을 터트리니, 매우 기뻐하며 축복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여태까지 창조한 것 중에 신은 사람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땅에서 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였으나…….
다섯 번째: 신의 형상을 닮았되 신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유한하고 불안정하여 망각 하고, 죽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반복했습니다. 몇 번의 삶과 죽음이 반복되자 사람들은 신마저 잊었습니다. 하루는 천년이오, 천년은 하루라.
신이 사람을 만들기까지 보낸 날보다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허망함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찾았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신의 이름이 태어나고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신을 잊은 이들에게도 축복은 여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했으며 땅에 충만했습니다. 보기에 좋았으나 기쁘지는 않았습니다.
여섯 번째: 신은 슬픔에 젖어 자신이 만든 것들에게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정성껏, 심혈을 기울여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열매를 만들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고, 생명을 주는 것.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 ■■을 닮은 것.
무화과에 숨을 불어 넣어, 자신의 권능을 숨긴 신은 눈을 감았습니다.
무한한 삶은 너무나 지겹고 외로웠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해부터 여름이면 무화과나무가 가지를 뻗고 열매를 틔웠습니다.
일곱 번째: 세상 모든 것이 신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신이 자신의 역할을 잊고 보살피지 않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악한 것들은 본디 더 악해졌고, 얼음이 녹으며 바다가 넘치고 땅이 갈라지니 동식물이 죽어 나갔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한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체질이 녹고, 뼈가 스러지고, 살점이 문드러졌습니다. 썩은 피가 흘러넘치니 어디에도 신이 사랑한, 신을 닮은, 신의 형상을 본뜬 것은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신을 찾고, 구원을 부르짖었습니다.
마지막 유리 조각에 시선을 던졌을 때, 당신은 깨달았습니다.
태어나길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하며 완전무결한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에는 무수히 많은 신이 있기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를 열렬히 신봉하는 사교도도 존재하지 않았죠.
그는 작은 세계의 주인입니다. 지구가 바로 그의 것입니다.
직접 하늘을 빚고 땅을 펴고 바다를 적셔 다듬었으니까요.
비록 수많은 피조물이 거짓된 신, 혹은 이계의 신을 칭송하더라도 그는 심판의 칼날을 드리우지 않았습니다.
신에게 인간의 신앙이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몇 년, 몇백 년, 몇천 년을 지나 얼마나 긴 억겁이 흘렀을까요.
신에게 부여된 불멸의 영원이 지겨워진 그는 불현듯 한 가지 일을 벌입니다.
당신이 바로 나의, 우리의, 세계의 신이에요.
모든 영원을 잊었으므로 당신에게는 아샤의 삶만이 남아 있지만, 당신이 곧 그입니다.
당신은 인간으로 살기를 원했고, 그러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을 비롯한 신의 권능을 작은 과실에 담아 두었습니다.
종말이 도래한 것은 당신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입니다.
윤이 나고 탐스러우며, 보암직도 먹음직도 한 그 과실은
오직 당신만 찾을 수 있는 세계 어딘가에 숨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사명은 과실을 찾아, 베어 물고, 세계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쏟아지는 이야기를 감당하기 위하여 가만히 있자니, 르네가 다가옵니다.
마치……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너는 신의 존재를 믿어?
르네:(망설임 없이 고개를 젓는다.) 신이 있으면 불공평하잖아요. 세상이 이런 꼴이 되었는데도, 외면하고 있을리가.
아샤:...그래. (누군가를 끌어올리려 부단히 노력한 지난날에 불구하고, 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가. 그는 생명의 귀함을 알고 살린 목숨보다, 모른 채로 얼마나 많은 목숨을 뒤로 했는가.) ......나도 안 믿어.
르네: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에요. (평소와 다른 이질감을 느낀 것은 본능에서 비롯된 습관. 네 안색을 살핀다.)
아샤:정말 무능한 건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래서 그래. (신을 찾지 않은 이유는, 한 인간의 숨을 신이 불어넣었고, 삶을 안배했고, 끝을 그가 정했다는 믿음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아샤 체르니는 인간의 변화를 믿었다. 선을 믿었다.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에 신은 필요 없다 믿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종말이 왔다는 것은, 그가 신을 믿지 않아서, ...자신을 믿지 않아서일까.) 무력한 건 나야.
...무능한 건 나야, 르네.
르네:(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듯 연한 눈동자 하나가 너를 마주한다. 눈동자가 조금 가늘어지더니,) 갑자기 자포자기라도 한것처럼 말하네요. ...내가 아는 아샤 체르니는 이런 말을 하던 사람이 아니였는데. (그리고 어깨를 으쓱인다. 마치 당연하고 정해진 이야기처럼.)
무능하다고 한들, 당신이 포기할까?
아샤:(제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네 말끝에는 자신을 잘 안다는 확신이 서려 있어 엷게 웃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너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신실할지도 몰라, 르네. ...어쩌면 누구보다 신을 많이 찾았을지도 모르겠네. ......이렇게 무능한 신을 말이야.
르네:(마치 스스로를 신에 비유하는 듯한 이야기에 수긍하면서도 살짝 표정이 굳는다.)
당신이 사람인지, 신인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 내가 믿는건 아샤 체르니 그 자체니까.
하지만.. (말을 끊고 코앞까지 다가와 누구보다 의심하는 눈초리로 너를 살핀다.) 당신 이상해. 내가 아는 아샤 체르니가 아냐.
아샤:...진실을 알기 전과 후가 같을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내가 아니야. 비인간적이잖아, 내가 모든 걸 망쳤는데.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가 마음에 들어한 풍경을. 맑게 갠 하늘을, 나비가 내려앉는 땅을, 네가 사랑해야 할 이 세계를.) 이 죄책감은 네가 아는 아샤 체르니가 느끼는 게 맞아.
르네:(묵묵히 이야기를 듣더니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린다. 무성의한 시선이 교회 곳곳에 닿는다.) ....당신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무엇이 되었든간에, 내가 지켜보아왔던 아샤 체르니도, 28년을 살아온 아샤 체르니도 결코 거짓된 존재는 아닐텐데.
무지는... 죄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러더니 가볍고, 장난스러운 어조로. 하지만 결코 웃음기는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다정하고 착하기도 하여라. 자책도, 자괴도 모두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비롯될 수 없는 마음 아니겠어요? 내가 잘못봤네. 그래, 당신은 아샤 체르니가 맞아.
아샤:인간 하나가 무지했다면 죄가 되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 하나가 무지해서 세계는 이 모양이 됐어, 르네. 여전히 나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구나... (찬찬히 성당 내부를 훑는다. 반신을 신으로 만들기 위한 과육을 찾아.) 신을 단죄 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게 슬플 뿐이야. 그렇다면 너 하나라도 박하게 굴어줘. 인간으로서.
당신만이 삼킬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는 압니다.
왜 당신이 녹아내리지 않았는지, 다치지 않았는지,
이토록 낯선 목소리는 어째서 자꾸 당신을 뒤흔드는지,
괴물이 왜 당신을 보고 울부짖는지, 애걸하고 매달리듯 발아래 엎드려, 멈추지 않고 기어 오는지.
여름을 기다린 과실이 완전히 무르익었는지 예배당이 무성한 향기로 가득 찹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두 그루의 나무로 향합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열매, 혹은 비슷한 것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마치 대답하듯 생명나무의 이파리에 글귀가 드러납니다.
감히 영생을 부여하는 그 열매를, 함부로 따먹지 못하도록,
비로소 여름,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종말에 드러나게끔.
그러니 이 가지 끝에 열매가 맺힐 일은 없어요.
벌어진 속살이 꼭 사람의 단면과 같다고 생각했잖아요.
금세 썩어 문드러지지만, 이토록 달콤하고 향긋하니 가장 사랑스러운 것과 닮았잖아요.
무화과에 숨을 불어 넣어, 자신의 권능을 숨긴 신은 눈을 감았습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신은 분명히 원하던 바를 이루었습니다.
르네는 살아 숨쉬며 당신을 사랑하고, 함께했으니까.
신의 권능을 도려낸 아샤의 육신 또한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
이대로라면 여태까지 보았던 괴물과 시체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려 흔적도 남지 않을 거예요.
아샤:(아무것도 모른 채로 인간으로 녹아내렸다면. 자신이 죽인 것을 헤아리지 않아도 되고, 눈 앞의 살아있는 너만 살펴도 되었다면. 인간의 몸에 우겨 넣은 신의 인격은 어느새 인간의 이기심에 물들었는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외면하고 싶어 네 앞에서 눈을 감았다. 단 향을 마실수록 숨구멍마저 막고 싶었다.) ......르네 보니타. 너는 지금도 죽음에 아주 가까이 서있어. ( 네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도망쳐줄래.
르네:(깜빡. 자신이 잘못보았다고 생각했는지 제 눈을 의심한다. 여지껏 아무 문제없이 지켜왔던 당신이다. 교회에서부터, 아니 오늘 눈을 뜬 이후로 내내 느껴지던 불안이 현실이 되어 찾아온다. 물렸다고 한들, 그것은 자신이며 당신은 아무 문제가 없어야 마땅할 터인데.)
...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나 혼자 도망가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죽음. 그보다 더욱 두려운건 홀로 남겨졌다는 막연한 외로움. 고독함. 만약 살아있기에 홀로 남는 것이라면 망설임없이 생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자연이, 인류가, 세계가 멸망해도 나는 문제없다. 오롯 그 세계에 당신만이 존재한다면. 하지만... 당신조차 사라진 세계에서는 무엇으로 나를 명명할 수 있는가. 의미를 잃은 삶에 무엇을 덧댈 수 있는가.) ...싫어. 손... 놓지 않기로 했잖아요.
아샤:(안다. 최초의 약속은 너를 지켜주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너의 방향을 삶으로 돌려주고, 세계를 사랑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네 옆에서, 너의 손을 잡고. 하지만 무능한 신이 이루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의 생과 함께 죽음을 안배했다. 우습게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런 것이다.) 네가 가장 질색하는 죽음을 줄 거야. 많이 아플 거고, 깔끔하지도, 나를 빛내지도 못할 거야. 나는 더이상 네가 알던 아샤 체르니가 아니겠지.
...네가 아는 나는 어때? 기꺼이 인간을 먹어 치울 정도로 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 같아?
르네:누가, 당신이? (한없이 다정한 온기어린 손길을 떠올린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건 지난 기억들이다. 만약 나에게 죽음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제 목숨을 구한 너의 몫임이 분명하기에. 그때도, 지금도 기꺼이 네게 자신의 목숨을 건넬 준비는 되어있었다. 이는 당연한 명제에 가깝다. 네가 인간이여도, 감히 세상의 신이라하여도 아샤체르니는 나의 영웅임이 변치 않을테니까.) ....내가 아는 아샤 체르니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만약 그 상대가 나라면. 신으로써 심판하세요. 몇번이나 피를 뒤집어쓰고, 죄없는 사람을 셀 수 없이 죽였음에도 반성과 뉘우침같은건 모르는 오만하고도 이기적인 르네 보니타를.
아샤:(
제발, 한번쯤은 나를 미워해 봐. 너는 그럴 자격이 돼. 입안에 맴도는 문장은 녹아내리는 혀끝에서 입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야, 아샤 체르니는 르네 보니타가 유일하게 사랑한 이 세상의 일부일 테니까. 나를 미워하는 순간 너는 이 세상에 어떤 미련도 남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네게 안겨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지금의 나에게 심판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 신이 있다면 천국과 지옥도 있겠지. 내가 만들었을 거야. 신이 죽는다면 어디로 가게 될 것 같아.
(너의 잣대로 감히 신을 판단하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르네 보니타.)
...세계보다 네가 소중하지 않고, 너보다 세계가 소중하지도 않아. ...반대로 말한다면, 세계보다도 네가 소중하고, 너보다 더 세계가 소중한 거겠지. 망가진 세계도 내 눈에는 사랑스러워 보인다면. 이미 숨을 잃어 볼품없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세계를 저버리지 못하고, 죽은 모든 안타까운 것들을 안고 간다 해도 나는 역사에도 기록될 수 없는 최악의 신이 될 거야. ...그렇게 될까 해.
이런 나를... 불완전한 히어로를, 무능한 신을. 이 세상의 일부를 아직도 사랑해?
르네:나는 신같은건 믿지 않지만, 아샤 체르니를 믿지. (볼품없고 다 망가져가는 세계가 그리도 사랑스러운가. 일방적인 애정에 가까운 그 마음은 어쩌면, 내가 당신에게 품고 있는 것과 비슷한 감정인걸까. 턱 아래까지 차오른 죽음이 제 목을 감싸쥔다. 그럼에도, 작은 웃음이 피어오르는건 결코 차갑고 고독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흘러가는대로, 흩날리는대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던 목숨을 건져올린 순간부터
르네 보니타의 생은 당신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본래의 주인을 찾아가는 거라고.)
이상한걸 물어보네요. 신은 죽지 않아요. 그들은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무슨 일을 저질러도 비난받지 않아. 왜냐면...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망가뜨리는건 지극히 평범한 일이거든. 원한다면, 다시 만들어내세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박제된 나비의 삶을 아는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그것은 상징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남긴다. 나역시 당신에게 있어 상징으로써 남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기꺼운 삶일터이니. 얕은 숨을 뱉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잔혹한 자신의 세계에게 걸어간다.)
기나긴 죽음 속에서도 사랑할거야. 나의 히어로, 나의 세계, 나의 신. 아샤 체르니.
아샤:그게 싫어서 인간이 되고 싶었어. 그랬던 것 같아. 인간은 잘못을 하면 비난 받고, 때가 오면 죽을 수도 있잖아. (인간은 신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존재 여부조차 모름에도 간절히 원하는 동시에 원망한다. 그러나 수만 갈래의 바람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도 그 중 날 것의 감정은 찾을 수 없어서. 인간은 이름도 모르고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자에게는 진심을 내어주지 않아서. 다만 쓸쓸했던 것 같다. 신은 사랑하는 피조물 속에 섞일 수 없었고, 그것을 욕심 낸 결과는 이렇다.)
원하지 않아. 인간 아샤 체르니가 신에게 직접 내리는 벌이 있다면 그걸로 할게. 다시는 어떤 것도 만들지 않아.
(제 발로 직접 걸어오는 너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내 손으로 처음 살린 생명이자, 마지막으로 죽이는 목숨이구나.)
그리고 모든 걸 빼앗은 신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있다면...
르네 보니타. ...네가 사랑하는 세상 한 줌을 쥐고 가.
나는 기꺼이 너를 안고 갈게. 사랑하는 세계와 함께.
르네:(문드러져가는 손을 쥔다. 깔끔한 것이 좋다고 한적이 있었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상대는 당신일텐데, 무엇이 문제랴. 자신의 피로 물들었던 옷에 다시 한번 색을 입힌다. 조금 더 선명하고, 다정함이 가득한 붉음으로. 네가 이끄는대로 다가가 익숙한 온기를 끌어안는다.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뿐인 당신은 이대로 깊은 잠에 빠질것이며, 남겨진 자신은...)
(무너져가는 네 이마를 몇번이고 쓸어넘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웠을 자신의 신에게 인사를 고하듯 입술을 묻는다.)
....잘자요, 나의 ■■...
당신이 매정하고, 잔인하고, 못된 신이어서도 아닙니다.
당신에게 르네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당신을 잊은 자들보다 당신을 위한 그 하나가 더 마음을 끌어당겼으므로.
삼키기를 거절한 당신은 신의 권능을 잃고, 손끝부터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아있던 모든 권능이 소모되면, 아샤도 질척질척하고 더러워지겠죠.
예배당의 의자는 눕기에 불편했지만, 그래도 천장의 성화는 아름다웠습니다.
혼자 남아 천천히, 천천히, 아주 느리고 외롭게 썩어 갔을 것 입니다.
알면서도, 당신은 도저히 그녀를 먹어 치울 수 없었습니다.
너무 달고 아름다워, 무엇보다 소중했으니까요.
END 2.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